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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9/68)

9화

* * *

‘감히 주상을 기루로 불러내다니. 왕 위에서 놀고 있음을 보여 주겠다는 겐가.’

기루의 방 안에 앉은 규연이 주위를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영의정이 다짜고짜 ‘기회’를 주겠다며 비열하게 웃을 때부터 기운이 심상치 않았지만, 일을 꾸민 장소가 기방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문 너머로 잔뜩 흥에 오른 사내들의 큰 음성과 시중을 드는 기생들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나라의 왕비가 앉아 있을 곳도, 한 나라의 왕이 신하의 청을 받고 찾아올 곳도 아니었다.

언의 힘이 얼마나 약한지, 그가 얼마나 바람 앞의 촛불같이 위태로운 상황인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오셨습니까, 마마.”

그 참담함에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을 때,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며 익숙한 낯의 사내가 인사를 올렸다.

영의정의 차남이었다. 규연의 사촌 오라비기도 했다.

“전하께서도 곧 찾으실 겁니다. 염려 마시고 편히 기다리시지요.”

“…….”

“상이야 이렇게 잘 차려져 있고, 술이 가장 중요할 터라 이리 직접 챙겨 왔습니다. 아버지께서 무척 힘쓰셨습니다, 마마. 오로지 중전마마를 위해서요.”

제 아비와 꼭 닮은 비릿한 미소가 사촌의 얼굴에 한껏 번졌다.

규연은 침묵을 지킨 채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잔에 가득 채워 드리십시오, 마마. 좋은 일이 있으실 겁니다.”

사촌은 씩 웃어 보인 뒤, 주안상 옆에 술병을 내려놓고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규연은 곧바로 금색 보자기를 풀고 술병을 확인했다. 고급 백자 안에 담긴 술의 알싸한 향이 규연의 코를 찔렀다.

‘보통 술일 리 없어.’

영의정이 수를 쓰지 않았을 리 없었다. 평범한 술이었다면 아들이 직접 나르게 할 리도 없었고, 규연에게 ‘기회’니 어쩌니 하며 말을 꺼낼 리도 없었다.

규연이 곧바로 잔을 채운 뒤 은으로 된 젓가락으로 술을 휘휘 저었다.

독을 넣었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건 규연도 잘 알았다. 영의정은 아직 언을 죽일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혹시나 싶은 불안함에 잔을 휘젓지 않을 수 없었다.

“하…….”

소리 내 한숨을 내쉰 규연은 술잔을 잠시 응시하다 천천히 술을 한 모금 머금었다.

무엇인지 확인하려면 규연이 직접 마셔 보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냥 술일 리 없는데…….’

맛이 이상하지도, 향이 이상하지도 않았다. 그저 평범하디 평범한 술 같았다.

“아…….”

그런데 그 순간, 규연이 쥐고 있던 잔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순식간이었다.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호흡이 가빠지면서 온몸에 열이 오른 건.

미약이었다.

규연은 그제야 왜 영의정이 오늘 밤을 ‘기회’라 했는지, 그의 아들이 좋은 일이 있으리라며 씩 웃었는지 알아챘다.

그들은 언에게 미약을 먹여 이성을 잃도록 만든 다음, 규연을 안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고작 한 잔, 그것도 한 모금을 머금었을 뿐이건만, 약이 퍼지는 속도와 그 효과가 심상치 않았다.

규연은 달아오르는 몸을 느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우선은 이 술을 치워야 했다.

똑바로 서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숨이 점점 가빠지고, 식은땀이 나고, 온몸이 예민해지며 자극이 몰려오는 게 느껴졌다.

‘안 돼. 버텨야 해.’

참기 위해 짓이긴 입술에 피가 맺혔다. 규연은 안간힘을 쓰며 난이 담긴 화분에 술을 쏟았다. 술병에 단 한 방울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고는 곧장 방을 빠져나갔다. 걸음은 비틀거리고, 시야는 점멸됐다. 규연은 밭은 숨을 몰아쉬며 기방 안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절대 이 꼴을 언에게 보여 줄 수 없었다. 약에 몸이 달아 숨을 헐떡이는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은, 정말 더 이상은 언 앞에서 비참해지고 싶지 않았다.

‘제발. 제발 찾아오지 마. 제발…….’

불이 꺼진 방 안으로 숨어든 규연은 몸을 웅크린 채로 덜덜 떨며 계속해서 빌었다.

언이 이곳을 찾더라도 제발 규연만큼은 발견하지 않기를 바랐다. 시간이 갈수록 온몸이 젖고, 잔떨림은 심해지고, 원치 않는 눈물도 고이기 시작했다.

‘제발…….’

너무나도 간절하고 애타게 빌었건만.

“중전.”

규연의 청이라면 모두 들어주지 않기로 결심한 건지, 하늘은 그녀의 간절한 바람을 깡그리 짓밟았다.

언이었다. 기어코 언이 규연을 찾아냈다.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언이 한 발자국 내딛자마자 규연이 몸을 옹송그리며 소리쳤다.

열이 올라 붉어진 얼굴도, 풀려 버린 눈도, 피가 맺힌 입술도, 덜덜 떨리는 몸도, 전부 보이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두려웠다.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언이 가까이 다가오면, 완전히 이성을 잃고 그에게 매달릴까 봐 겁이 났다.

“전하, 제발!”

그러나 언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규연의 두 팔을 꽉 잡더니, 자신을 마주할 수 있도록 그녀의 몸을 돌렸다.

“앗!”

그저 손이 닿았을 뿐인데 몸이 더 떨리며 열감이 밀려왔다. 규연은 혹여나 신음이라도 새어 나갈까 입술을 더 꽉 깨물며 언에게서 벗어나려 애썼다.

“얼마나 마셨습니까. 그 술.”

그러나 언이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병이 보이지 않던데 설마 다 마신 겁니까?”

“아닙니다. 한 모금만 머금었습니다. 나머지는 전부 쏟아 버렸고요.”

규연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려 애쓰며 상황을 전했다.

“한 모금만 머금었는데 몸이 이렇단 말입니까?”

언은 경악과 분노가 뒤섞인 표정으로 규연을 마주했다. 규연은 별다른 답을 하지 못한 채 눈물로 얼굴을 적시기만 했다.

“전하, 제발 신첩을 놓아주십시오. 궁으로 돌아가세요. 이곳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알아서 하긴 뭘 알아서 합니까. 지금 이 꼴로 대체 뭘!”

“제발. 이리 간청드립니다. 물러가 주세요.”

너무나도 애절한 목소리가 언에게 닿았다.

규연은 지금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언과 거리가 좁혀지자 그의 향과 온기가 그대로 전해져 달뜬 몸이 더 날뛰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추한 꼴을 보일 게 빤했다. 약에 취해 홀로 연모하는 사내에게 달려드는 여인이라니. 끔찍했다.

“보통 미약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신첩이 알아서…….”

“알아서 할 수 있는 약이 아닙니다! 열기를 해소하지 못하면 몸이 엉망이 된다고요!”

언은 답답함을 이겨 내지 못하고 소리쳤다.

보통 농도의 미약이 아니었다. 여러 약에 내성이 높은 언을 취하게 하기 위해 센 약을 가져온 게 분명했다. 규연이 이만큼 버티고 있는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상관없습니다. 이겨 낼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제발 그냥 떠나가 주십시오, 전하.”

“안이 타들어 간단 말입니다! 시간이 흐른다고 나아지지 않아요. 열을 달래지 않으면 잘못했다가는…….”

“저를 얼마나 더 비참하게 만드시려고 이러시는 것이옵니까!”

결국 규연 역시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수도 없이, 정말 수도 없이 언의 품에 안겨 잠드는 상상을 했었다. 언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흩어지고, 뜨거운 숨이 서로를 덥히는 순간을 몇 번이고 그리고 또 그리고는 했다.

그러나 간절히 바랐던 그 밤에는 서로를 향한 감정이 있었다. 억지로 몸을 달구는 약 따위가 아니라, 서로의 온기를 갈구하는 마음이 있었다.

“나라고 좋아서 이리하는 줄 압니까?”

규연의 팔을 잡고 있는 언의 손에 힘이 더 바짝 들어갔다.

“열기를 달래지 못하면 안에서 피가 맺힙니다. 그 피가 어떤 고통을 만들어 내는지 중전은 모르지 않습니까.”

이를 악문 목소리가 규연의 귓가에 닿았다.

쉴 새 없이 차오르는 눈물 탓에 언의 표정이 어떤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규연을 안게 된 이 상황에 지독히도 화가 나 있다는 것만 목소리로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

그런데 눈물이 흘러내리고 시야가 또렷해진 순간, 언을 바라보던 규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또 그 눈이었다.

대비 앞에서 규연을 헷갈리게 했던, 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하는 것만 같은 그 눈.

앵두를 쥐여 주며 괜찮냐고 묻던 대군 시절의 흔적이 또 덧대어졌다.

‘왜 자꾸 이러시는 겁니까. 대체 왜…….’

그 눈이 보인 순간, 규연의 마음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하지만 뒤흔들리는 마음은 그만큼 규연을 참담하게 했다.

착각일지 모르는 눈빛 하나에 속절없이 기대감이 차오르고, 어쩌면 규연이 내내 바라던 대로 아주 작은 마음 한 조각이라도 섞여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피어오르고, 그렇다면 이렇게라도 언에게 안기고 싶다는 생각이 금세 번져 버려서.

마음이 또 한 번 무너져 내렸다.

“전하. 왜 신첩을, 앗…….”

점점 아득해지는 정신 탓인지, 아니면 비참한 마음이 눈을 흐리게 만든 탓인지, 나를 왜 그렇게 바라보냐며 직접 물으려던 차에 달뜬 감각이 기어코 일을 냈다.

살짝 몸을 움직인 것뿐인데, 규연이 지금껏 한 번도 내지 않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놀란 규연이 움직임을 멈추고 시선을 피한 순간, 내내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언의 눈빛이 달라졌다.

순식간이었다.

끈을 풀며 갓을 벗은 언이 곧바로 고개를 꺾어 규연에게 입을 맞춘 건.

규연이 너무나도 애타게 바라던 언의 열기가, 기어코 그녀에게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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