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68)

8화

* * *

“마마께서 입궁할 후궁들의 초야 길일을 잡는 일에 무척 공을 들이고 계신다 들었습니다.”

“내명부에서 가장 공들여야 하는 일 중 하나니 당연하지요.”

“하하. 조선은 복도 많지요. 하늘이 내린 국모를 품었으니.”

날이 밝자마자 영의정이 규연을 찾아왔다.

어젯밤 감정을 토해 낸 일로 진이 빠진 규연이었지만, 늘 그렇듯 내색하지 않고 정갈히 몸을 단장한 채 숙부를 맞이했다.

영의정이 손을 쓰고 있는 요즘일수록 그의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됐다.

“마마를 이리 보고 있으면 돌아가신 형님 생각이 납니다.”

“…….”

“형님께서는 늘 마마의 총명함을 자랑하셨지요. 사내로 태어났으면 진작 소년등과를 했으리라 자신하셨습니다. 어찌나 영민하고 바른지 매일매일 놀란다며 허허 웃으셨어요.”

죽은 아비의 이야기가 나오자 규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영의정의 입에서 아비가 거론될 때마다 치가 떨렸다.

“그때는 형님께서 자식 자랑이 과하시다고 여겼는데, 마마를 모시고 나니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

“마마께서는 무서울 정도로 총명하신 분입니다. 세상만사를 다 겪은 이 늙은이의 기준에서도 말이지요.”

“…….”

“하니 모르지 않으실 겁니다. 제가 이판의 여식을 전하의 후궁으로 들여오는 것의 의미를.”

규연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꼿꼿이 앉아 영의정을 마주했다.

잘 알았다. 소식을 듣자마자 알아챘다.

그러나 그의 뜻대로 순순히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만일 영의정이 규연을 내친다면, 그래서 폐서인이 되어 궁 밖으로 나간다면, 규연을 기다리고 있는 건 죽음이었다.

영의정에게 순순히 목숨을 내어 주고 싶지 않았다.

‘……전하께도 더 독이 되겠지.’

그렇게나 모진 말을 듣고 언을 생각하는 게 얼마나 바보 같은지 알았지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규연이 물러나고 영의정의 말만 따르는 꼭두각시가 중전 자리를 꿰차면 언에게도 위협이 될 터였다.

영의정이 제멋대로 왕과 중전을 휘두르는 꼴은 조금도 보고 싶지 않았다.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숙부님. 너무 잘 알아서 문제지요.”

“하하. 그렇지요. 하나 마마께서도 제 식구십니다. 평생을 존경해온 제 형님의 자식이지 않습니까. 숙부가 되어 어찌 질녀를 내칠 생각만 하겠습니까. 그래서…….”

영의정이 말을 하다 말고 찻잔을 들어 올려 천천히 한 모금 머금었다.

“마마께 기회를 드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무슨 기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여기서 다 이야기해 버리면 재미가 없지요. 장소를 일러 드릴 테니 오늘 밤 그곳으로 나오십시오. 제 무사들이 마마를 모실 겁니다.”

무척이나 수상했고, 또 무척이나 감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규연으로서는 영의정의 제안을 거절할 힘이 없었다.

아직 아무런 패도 쥐지 못한 지금, 우선은 웅크리고 영의정의 뜻을 따라야 중전의 자리를 지킬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하실 게지요?”

“……그리하지요.”

그러니 우선은 발톱을 감춘 채로 영의정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야 했다.

규연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나아가 언을 지키기 위해서.

* * *

“윤식아.”

“예, 전하.”

“어허. 여기서는 그리 불러서는 안 된다 몇 번을 말했건만.”

“송구합니다, 나리.”

용포와 익선관을 벗고 감색 도포와 갓을 쓴 언이 피식 웃으며 윤식을 바라봤다.

윤식은 금군청 소속의 무관으로 언이 이경 다음으로 신뢰하는 자였다.

“이리 길을 나서고 있는 내가 참 우습지 않느냐.”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영상이 부른다 하여 기루로 달려가야 하는 왕이지 않느냐. 우습고 또 기구하지.”

달빛이 은은히 감싼 밤길을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언의 입 안에 쓴맛이 퍼졌다.

영의정은 한껏 숙이는 척 잠행을 청하며 언을 밖으로 불러냈다.

그가 야밤의 밀회 아닌 밀회를 원하는 장소는 기루였고, 소식을 들은 언은 실소를 감추지 못했다.

제집에 진수성찬을 차리고 절하며 모셔도 모자란 것이 주상이거늘, 왕 위에서 그보다 강한 권력을 쥐고 조선을 쥐락펴락한다는 소리를 듣는 영의정은 꼭 아랫것 부리듯 언을 불러내고 있었다.

분명한 모욕이었다.

노발대발하며 경을 쳐도 모자랐다.

그러나 언은 온전한 왕이 아니었고, 영의정도 왕 밑의 영의정이 아니었다.

언은 살아남아야 했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미칠지언정 발톱을 드러내서는 안 됐다.

“윤식아.”

“예, 전하.”

“영상의 뜻이 보이느냐?”

“소신, 배움이 모자라 알지 못하겠습니다. 송구합니다, 전하.”

아직 어린 티가 나는 얼굴이 눈에 띄게 당황하자 언이 피식 웃었다.

그러나 진심이 다한 웃음이 스친 건 찰나였다.

언의 눈동자는 금세 공허해졌고, 잠시 지워졌던 영의정의 형상은 다시 또렷해져 언의 머릿속에 자리했다.

“후궁들이 궐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손을 쓰는 게다.”

“……예?”

“중전에게 기회를 주는 게지.”

“기회라면…….”

“나와 밤을 보내고 배 속에 원자를 품을 수 있는 기회.”

“그, 그걸 어찌…….”

잠행에 숨겨진 뜻을 전혀 알지 못했던 윤식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그러나 언은 동요 없이 평온했다. 다만 얼굴과 목소리에 씁쓸함이 가득했다.

“하면 중전마마께서도 궐 밖에 나와 계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마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을 게다.”

한 나라의 왕과 중전이 대신 하나의 손에 전부 놀아나는 상황이었다.

“내가 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규연을 떠올리니 문득 어젯밤의 대화가 떠올랐다.

〈만약 그 아이들이 전하를 꼭 빼닮기라도 한다면……. 바보같이 마음에 품고 정까지 내어 줄 터이니까요.〉

차라리 평소처럼 잔뜩 상처 입은 눈으로 그 말을 건넸으면 조금 나았을까.

지칠 대로 지쳐 넝마가 된 공허한 눈이 너무나도 선연했다.

뒤로 돌아서 문을 향해 걸어가는데, 대비가 낸 상처 때문에 여전히 절뚝거리는 걸음걸이 역시 계속 아른거렸다.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조차 느껴진 탓에 쉬이 지울 수 없었다.

‘아니야. 흔들릴 때가 아니다.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야.’

언은 다시 정신을 다잡고 잠시 멈추었던 발을 다시 움직였다.

“아마 내 술에 미약을 잔뜩 타 놓고 기다리고 있을 게다. 참으로 빤한 노친네지.”

“전하!”

두 걸음쯤 나아갔을까. 언이 평온한 목소리로 내뱉은 엄청난 이야기에 윤식이 걸음을 뚝 멈추었다.

“어찌 그런 말씀을 그리 쉽게 하십니까! 미약이라니요! 어찌 그것을 아시면서도! 당장 궐로 돌아가시지요. 그런 곳에 소신이 전하를 모시고 가게…….”

“너도 알지 않느냐. 나는 어떤 미약에도 취하지 않는다.”

“하나 그것이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미약에 취하지 않으니 중전을 안지도 않는다. 영상이 오늘 밤에 이루고자 하는 건 단 한 가지도 이루어지지 않을 게야.”

“그래도 가실 수 없습니다, 전하.”

“살려면 가야 한다.”

“전하!”

“여기서는 전하라 부르지 말라 해도. 지금은 손 위에서 신나게 춤을 출 때야. 익선관 위에 있는 영상 대감인데 신명 나게 놀아 드려야 하지 않겠느냐.”

윤식은 속이 미어진다는 얼굴로 언을 바라봤으나 언은 씩 웃기만 했다.

멈춰 섰던 걸음이 성큼성큼 기루로 향했다.

영의정을 만나러 왔다 하니 생글생글 웃고 있던 기생 하나가 기루에서 가장 깊은 별채로 언을 안내했다.

그의 예상을 조금도 빗겨 가지 않는 전개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미 상이 차려져 있었다.

언은 새어 나오는 비웃음을 참아내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미리 와 있을 줄 알았는데 그 예상 하나는 틀렸군.’

규연이 먼저 와 있으리라는 예상과 달리 방은 비어 있었다.

“이곳에 오기로 한 자가 또 있을 텐데.”

“예, 나리. 곧 오실 터이니 조금만 기다리시지요. 금방 이곳으로 드실 것이옵니다.”

간드러진 목소리가 한껏 아양을 떨며 대답했다.

“술을 먼저 내어 드릴 테니 편히 드시며 기다리시어요. 한 잔 올리겠사옵니다.”

기생은 살랑거리는 동작으로 상 위에 술을 올린 뒤, 언의 곁으로 와 앉아 술병을 들었다.

분명 직접 따르고 언이 술을 삼키는 모습을 확인하라는 명을 받았을 터였다.

언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잔을 들었고, 기생은 빈 잔에 술을 따랐다.

‘……미약이 섞이지 않았어. 그냥 술이야.’

거침없이 술잔을 입술에 가져다 댔던 언의 눈매가 날카롭게 벼려졌다.

아주 미량이 섞여도 향이 달라지는 게 미약이었다. 누구보다 언이 잘 알았다.

그런데 기생이 따른 술은 그저 평범한 술이었다. 아무것도 섞이지 않았다.

‘이럴 리 없는데.’

술을 쭉 들이켜니 더 확실해졌다. 멀쩡한 술이었다.

이상했다. 언이 예상한 그림을 벗어날 리 없는데,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기생이 빈 잔을 다시 채우는 동안, 언은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규연이 나타나지 않는 게 이상했다. 사실 술을 따르는 건 규연의 몫이어야 했다.

미약은 한번 들이마시면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온몸에 퍼졌고, 순식간에 이성을 잃기 때문에 다른 여인이 먼저 보였다가는 일이 틀어지기 쉬웠다.

‘……노리개?’

날카로운 눈이 방 곳곳을 살피고 있을 때, 상다리 뒤에 가려져 감춰져 있던 노리개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기생들이 치장할 때 쓰이는 노리개가 아니었다. 궁중에서나 쓰이는 진귀한 장신구, 옥으로 된 중삼작노리개였다.

‘설마.’

아찔한 생각 하나가 언의 머릿속을 스쳤다.

규연이 오지 않은 게 아니었다. 이곳에 머물다 갑자기 자취를 감춘 것이 분명했다.

“나, 나리! 어디 가십니까!”

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거침없이 방 밖으로 향했다.

“꺄악!”

“뉘, 뉘시오!”

그는 거침없이 나아가며 옆방의 문을 열어젖혔다. 안에서 은밀한 시간을 보내던 이들의 비명이 들려왔으나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방을 네 개쯤 열어 보았을 즈음, 언의 발이 별채 가장 안쪽의 불 꺼진 방까지 닿았다. 마지막 방이었다.

언은 망설임 없이 굳게 닫힌 문을 열었다.

“……중전.”

그곳에 규연이 있었다.

언을 취하게 하기 위해 준비했을 것이 분명한, 지독한 미약을 대신 들이마신 채 벌벌 떨고 있는 규연이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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