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무서울 정도로 고요하고 무거운 침묵이 중궁전에 내려앉았다.
자리를 지키던 궁녀들도, 소식을 전한 이 상궁도, 내내 규연의 곁에 서 있던 정 상궁도, 잠시나마 기대에 부풀었던 규연도,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규연은 얼굴 위로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늘 그렇듯, 그저 차분하고 평온한 표정으로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러나 손의 떨림까지 온전히 다스릴 수는 없었다. 당의 앞자락 뒤로 숨겨 맞잡은 손이 잘게 떨렸다.
“어느 댁의 여식이라 하더냐.”
“그것이…….”
“괜찮으니 차분히 말해 보거라.”
“하나가 아니라 셋을 들이신다 합니다.”
이 상궁의 말에 정 상궁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규연의 손에도 힘이 더 바짝 들어갔다.
“하나는 지난번 전하의 승은을 입었던 지밀상궁이고, 하나는 대제학 대감의 여식이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어서 말하거라.”
“이판 대감의 딸이라 합니다.”
마지막 여인이 누군지 전해졌을 때, 규연은 왜 이 상궁이 뜸을 들였는지 단번에 알아챘다.
이조 판서는 숙부 영의정의 최측근 중 하나였다.
영의정의 사람 중 하나가 후궁의 아비가 된다는 건 언제든 규연의 자리가 새로운 후궁에게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조정의 대소사가 언의 손을 떠난 지가 한참이었다. 지금의 첩지는 분명 영의정의 뜻이었다.
규연이 원자를 낳지 못하니 후궁을 들여 후사를 보라는 상소가 쏟아지는데도 지금껏 후궁 하나 들이지 않은 것 역시 그 결과였다.
영의정은 이런저런 이유를 만들어 언의 곁에 둘 수 있는 여인을 차단했고, 오로지 규연만을 남겨 뒀다.
언이 궁으로 기생을 들여도 개의치 않고, 의녀나 궁녀를 건드려도 내버려 두었지만, 권력을 쥘 수 있는 여인의 자리만큼은 철저히 비워 뒀다.
그런데 그랬던 영의정이 궁 안으로 그의 사람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어제 주상전하를 알현했습니다. 한데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
〈중전마마가 아닌 다른 여인이 그 자리에 오르면, 세자뿐만 아니라 대군까지도 예닐곱이 나올 수도 있지 않겠냐고요.〉
〈…….〉
〈한데 그 말씀을 듣고 나니 소신의 머릿속에도 한 가지 생각이 스쳤습니다.〉
〈…….〉
〈어쩌면 정말 그리될 수도 있겠다고요.〉
며칠 전 영의정과 나눴던 대화가 규연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저를 압박하시는 겝니까, 숙부님.’
규연이 끔찍이도 싫어하는 영의정의 비릿한 미소가 눈앞을 둥둥 떠다녔다.
규연은 두 눈을 감고 크게 숨을 골랐다.
그녀의 목을 옥죄는 손길이 느껴지고,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이 느껴졌지만, 규연의 곁을 지키는 사람들 앞에서 무너지거나 흔들리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어찌들 그리 죽을상을 짓는 게야. 지금껏 후궁을 들이시지 않았던 게 더 이상한 일이었지 않더냐.”
“하나, 마마…….”
“여럿이 첩지를 받으니 할 일이 더 많을 테지. 부족함이 없도록 준비를 철저히 하거라. 흠이 있어서는 안 돼. 내 직접 살필 것이다.”
규연은 평소보다 더 힘 있는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고 분위기를 정리했다.
“다들 낯빛에서 그림자를 지우거라. 그리 상심할 일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내명부의 일이다. 내가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나를 모시는 너희 역시 그래야 한다. 알겠느냐.”
“예, 중전마마.”
흔들림 없는 단호한 명령에 궁인들이 마음을 다잡고 뒤숭숭한 기색을 감추었다.
얼굴 위에 드러내는 감정이 올가미가 되고 족쇄가 되는 것이 궁이라는 공간이었다.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울수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마음을 숨기며 단단하게 무장해야 버텨 낼 수 있었다.
“아마 첩지와 관련해 전하께서 곧 나를 찾으실 게다. 미리 채비해 두자꾸나.”
“예, 마마.”
규연은 상궁들에게 명령을 내린 뒤, 창 앞으로 다가가 그 너머에 있는 작은 정원을 바라봤다.
언이 초야를 치르지 않은 채 신방을 박차고 나가고, 그 이후로도 규연에게 밤을 허락하지 않았을 때부터 각오했던 일이었다.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며 수도 없이 생각했으며, 이런 날이 오면 어떻게 내명부를 관리할지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그리기도 했다.
그러니 버틸 수 있고, 또 버텨야만 했다.
“…….”
그런데 막상 현실로 닥치니 그 충격이 훨씬 거대했다.
내내 그리고 그리면서 마음의 준비를 했다한들, 아픔이 옅어지지도 않았다.
언이 다른 여인을 품에 안는 것이야 이골이 날 만큼 봤고, 이제 더 이상 흉 질 공간이 남아 있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불안하고 또 아팠다.
언이 진심으로 마음을 주고, 또 진심으로 미래를 함께 그릴 수 있는 위치에 누군가가 생긴다는 사실이, 그리고 어쩌면 규연의 자리마저 빼앗아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괴로웠다.
* * *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전하.”
규연이 예상했던 대로, 해가 지자 언이 규연을 불렀다.
석강이 진행될 시간이었으나 언은 여느 때처럼 모든 일정을 뒤로하고 대전의 왕좌에 앉아 있었다.
다행히 손에 술병이 들리지도 않았고, 익선관을 벗고 있지도 않았고, 용포 역시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주위가 엉망이었다. 맨정신인데도 한바탕 소란이 일었는지 사방에 파편이 흩뿌려져 있었다.
“사실 중전이 먼저 찾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
“후궁 첩지를 내린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와 나를 마주하기를 내심 기대했는데.”
“…….”
“고고하신 중전께서는 내가 후궁을 셋이나 들인다는데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겠지요. 어찌나 그리 대단한지. 감탄이 다 나옵니다.”
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표정 역시 다른 때보다 더 차갑고 매서웠다.
규연은 당의 뒤에 가려진 손으로 치맛자락을 꽉 부여잡았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언은 분명히 규연을 할퀼 테고, 규연은 상처를 내색하지 않고 견뎌 내야 했다.
“혹시 기대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요.”
“내가 후궁들도 안지 않으리라는 기대. 그대처럼.”
언은 피식 웃으며 물었고, 규연이 쥔 치맛자락은 더욱 구겨졌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중전과 같아서는 안 되지.”
“당연히 안 될 일이지요. 내명부에서 길일을 찾아 날을 잡을 것입니다. 그러니…….”
“길일이라.”
규연이 완벽하게 흔들림을 감추고 꼿꼿이 앉아 대답하려 하니 언이 그 말을 뚝 잘랐다.
“원자를 한 번에 밸 수 있는 날이라도 구할 겁니까?”
“빠른 시일 내에 전하의 후사를 볼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으니까요. 그리할 수 있는…….”
“정말 상관없습니까? 다른 여인에게서 내 아이를 봐도?”
“다른 여인에게서 나도 전하의 자식이고 왕실의 일원입니다. 그러니 제가 어미처럼 돌볼 것이고요.”
“어미처럼?”
어미와 같이 돌본다는 말을 들은 언이 큰 소리로 웃으며 왕좌에서 일어났다.
그는 몹시도 우스운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한 얼굴로 규연에게 바짝 다가왔다.
“가끔 신기합니다. 어디서 이런 여인이 나왔을까.”
“…….”
“꼭 태어날 때부터 중전이 되기로 정해져 있던 것 같아.”
“…….”
“다른 여인이 궁 안으로 들어온다는데도 투기를 부릴 생각 따위는 하지 않고, 후궁에게서 낳은 자식을 어미처럼 살핀다는 말을 술술 내뱉고.”
“…….”
“여인으로서는 아무것도 욕심나지 않나 봅니다. 이제 내게 아양 따위 부릴 생각은 없나 봐요. 아아. 아니지, 아니지. 그런 적조차 없었지.”
욕심이 나지 않을 리 없었다. 규연은 매 순간 욕심냈다.
부디 그녀가 언에게 여인으로 다가가기를, 사랑하는 연인으로 다가가기를, 앵두를 손에 쥐여 주던 그날 밤의 낭자로 다가가기를.
“어미처럼 돌보겠다고?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중전이 질투에 눈이 멀어 원자를 죽이면 죽였지, 어미처럼 돌본다? 말이 안 될 이야기지.”
“전하 그 무슨!”
“만약에 중전이 정말 원자를 해치더라도 나는 아무것도 못 할 겁니다. 벌하려 하면 어디 영상이 나를 가만히 두겠습니까? 절대 안 될 일이지. 그럼. 암암.”
언이 날려대는 비수에 가슴이 난도질당하는 건 익숙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언의 칼이 만들어 내는 상처가 더 강하게 규연의 마음을 후벼 팠다.
“아아. 또 이 눈이야. 이런 말을 듣고도 완전히 기대를 접지는 못하는 눈.”
“…….”
“그래도 내가 달라질 것이라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눈.”
차마 아무 말도 내뱉지 못하고 있을 때, 언이 규연의 턱을 꽉 그러쥐고 그녀의 눈을 들여다봤다.
조금도 부드럽지 않은 손길이었으나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을 쑤시는 아픔이 너무 거대하고 깊어서 다른 곳의 통점은 모조리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합니다. 중전과 내가 아주 지독한 싸움을 하고 있다고.”
“…….”
“사방을 헤집고 흔들어 쑤시는 내 칼이 이기는지, 이 칼을 온전히 받아 내는 중전의 맷집이 이기는지.”
“…….”
“그런 것 같지 않습니까?”
한쪽 입꼬리만 올라간 공허한 미소가 언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규연은 여전히 입을 꾹 닫은 채로 언을 바라보기만 했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찾고 싶었다. 언이 이렇게 모진 말을 쏟아낸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이렇게 난동을 부린 것 역시 하루 이틀 일이 아닌데, 왜 이렇게 규연의 가슴이 더 찢어지게 아픈지.
후궁이 들어온다는 심란한 소식 때문인지, 아직 어제 있었던 대비전에서의 일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서인지.
‘……아.’
규연은 속으로 깨달음의 탄식을 뱉었다. 어제 대비전에서의 일을 떠올리니 답이 나왔다.
‘연고. 연고의 그 기대 때문이구나.’
언이 연고를 보냈다는 그 한마디. 그럴 리 없다며 부정했지만, 한편으로는 내심 사실이기를 바라며 품었던 은근한 기대가 이유였다.
어떻게든 규연을 상처 입히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사람을 매일 마주하면서 그가 규연을 위해 마음을 썼을지 모른다며 마음이 부풀었던 사실이 너무도 우스웠다.
붕 떠올라 더해진 높이 때문에 추락의 통증이 더 깊었다.
규연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언 앞에서 처음 보이는 반응이었다.
규연은 그녀 자신을 향한 비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늘 감정을 감췄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니었다.
놀란 언이 턱을 쥔 손에 힘을 풀고, 규연은 완전히 지쳐 버린 눈으로 언을 응시했다.
“제가 이길 겁니다, 전하. 이기고 싶지 않은데, 분명 이길 겁니다, 전하.”
언의 말대로 그렇게나 당하고도 예전의 기억을 놓지 못해서, 연고 하나에 마음이 부풀고, 그런 뜻이 아님을 알면서도 ‘보고 싶어 불렀다’는 말에 가슴이 살짝 떨리고 말아서.
규연이 이길 싸움이었다. 규연이 언을 바보같이 연모하는 탓에 그녀가 이길 수밖에 없었다.
“신첩은 내명부의 수장입니다. 그 자리에 주어지는 역할을 신첩의 모든 것을 다 바쳐 훌륭하게 해낼 것입니다. 그 무엇도 무너지거나 금 가지 않게 열과 성을 다할 것이에요.”
“…….”
“그러니 후궁에게서 본 전하의 자식을 신첩 손에 잃을 염려는 하지 마십시오. 전하께서 후궁을 셋이 아니라 삼십을 들여 서른 명의 원자를 보신다 해도 누구 하나 제 손에 죽지 않을 겁니다.”
“…….”
“만약 그 아이들이 전하를 꼭 빼닮기라도 한다면…….”
규연은 한없이 슬픈 눈으로 언과 다시 눈을 맞췄다.
눈물 한 방울 고여 있지 않은데, 통곡하는 사람보다 그 슬픔이 깊어 보이는 눈이었다.
“바보같이 마음에 품고 정까지 내어 줄 터이니까요.”
조용히 규연을 바라보던 언의 눈동자가 요동치고, 규연의 맑은 눈은 끝도 없는 아래로 가라앉았다.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규연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동작으로 허리를 숙인 뒤, 천천히 문을 향해 걸어갔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