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 * *
“별장이 이른 시간에 흙빛 얼굴로 나를 찾아온 것을 보니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온 궁에 소문이 퍼졌나 봅니다.”
“아……. 마마, 그것이…….”
“괜찮습니다. 그 난리가 있었는데 말이 돌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더 우습지요.”
규연은 옅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마주 앉은 이경을 바라봤다.
왕이 대비에게 활을 겨눴고, 이를 막으려 중전이 왕의 앞을 가로막았다.
궁 안에 말이 퍼지지 않을 리 없었다. 발 없는 말은 천 리를 내달렸을 테고, 궁에서 일하는 자들은 모두 그 소식을 알 터였다.
그러니 호위청의 별장인 이경 역시 소식을 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규연의 얼굴에 씁쓸함이 가득 번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기 위해 무던히 애쓰고 있었지만, 규연이 아무리 노력해 봤자 또 ‘불쌍한 중전’으로밖에 보이지 않으리라는 사실이 그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마마. 옥체를 늘 보전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럼요. 알지요. 그래서 이렇게 튼튼하게 잘 지내고 있지 않습니까.”
“소신이 드리려는 말씀은 그것이 아닙니다. 마마께서도 아실 테고요.”
애써 밝은 척 웃어 보였지만, 철없던 시절부터 함께 지내 온 죽마고우까지는 속이지 못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부터 걱정이 가득 묻어 있던 이경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진 채로 규연을 마주했다.
“마마를 최우선으로 생각하시라는 뜻입니다.”
“…….”
“전하도, 내명부의 일도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지만, 마마도 꼭 돌보셔야 합니다. 꼭이요.”
“…….”
“주제넘은 말씀인 것을 압니다. 감히 제가 드려서는 안 되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지만…….”
이경은 깊은 한숨을 감추지 못했고, 규연은 그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그저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대비전에서 일어난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이경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말을 전해 준 이들은 언이 대비에게 활을 겨눈 것만 시끄럽게 떠들었으나 이경을 기겁하게 만든 건 대비가 규연의 다리를 엉망으로 만들어 놨다는 소식이었다.
얼마나 수치스러웠을지, 그리고 또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그 마음이 차마 가늠조차 되지 않아 간밤에 눈 한 번 붙일 수 없었다.
‘이리도 야위셨는데 대체 무엇을 보고 잘 지낸다는 말을 믿으라 하시는 겁니까.’
이경은 차마 뱉지 못한 말을 삼키며 주먹을 꽉 쥐었다.
얼마 전 연못 앞에서 마주했을 때보다 규연의 얼굴이 더 상해 있었다.
그리 긴 시간도 아니건만 그새 더 망가지고 지쳐 버린 모습을 보니 이경의 마음마저도 해어졌다.
드러낼 수 없는 마음을 감춘 이경은 품에 넣고 있던 작은 알합을 내밀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효능이 뛰어난 연고입니다. 분명 효과가 있을 터이니 잊지 말고 꼭 바르십시오, 마마.”
대비가 한참이나 매질했다고 했으니 규연의 다리가 멀쩡할 리 없었다.
일을 언급하고 싶지 않아 별다른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무엇을 위해 내미는 약인지는 명확했다.
이경은 이렇게라도 규연의 상처를 달래 주고 싶었다.
“아…….”
규연은 작은 탄식과 함께 이경의 선물을 바라봤다.
찰나였지만, 작은 알합을 담은 눈에 수만 가지 감정이 스치는 게 보였다.
‘어제 일을 곱씹으시는 겐가…….’
이경은 계속 규연을 살폈고, 그녀의 얼굴에 비친 감정이 무엇인지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전하를 생각하시는구나.’
연정이라는 게 얼마나 잔인한지, 연모하는 마음이 깊을수록 사랑하는 이의 감정이 뚜렷이 보였다.
상처를 살피길 바라며 연고를 쥐여 준 사람은 이경이었지만, 규연은 이 순간에도 언을 떠올렸다.
언을 떠올리고 생각할 때만 나오는 표정이었다.
아마 규연조차도 모를, 그렇지만 내내 곁을 지킨 이경만은 아는, 아주 분명한 표정이 보였다.
“고맙습니다. 별장이 항상 이리 챙겨 주니 참으로 미안해요. 벗밖에 없다는 말이 틀린 소리는 아닌가 봅니다.”
규연은 다시 그럴듯한 미소를 만들어 낸 뒤 이경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 모습이 이경을 더욱 아프게 했다.
그녀의 상처를 달래 주기 위해 마음을 쓴 사람이 이경이 아니라 언이기를 바라는 아쉬움과 야속함이 이경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마마. 사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 연고. 전하께서 제게 전해 드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직접 가져다줄 수 없으니 제 손으로 마마께 안겨 드리라고요.”
상처 입은 규연의 얼굴을 바라보는 게 힘들었다.
이경은 규연이 바라는 답을 알았고, 조심스럽게 그 바람을 이뤄 줬다.
“이경.”
“……예, 마마.”
그런데 이경의 말을 듣는 순간 규연이 그를 ‘별장’이 아닌 이름으로 불렀다. 궁에 들어온 뒤 처음이었다.
“나를 위로하려고 없는 말까지 만들어 낼 필요는 없어요.”
“마마, 만들어…….”
“그대가 전하의 오랜 벗임을 잘 압니다. 나의 벗인 세월만큼이나 전하와 함께 시간을 보냈음을 알아요. 하지만 나도 전하의 부인으로 제법 긴 시간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압니다.”
“…….”
“아마 지금쯤이면 머릿속에서 지우셨을 겁니다. 어제 어떤 일이 있었는지.”
“…….”
“그러니 이렇게 애쓰지 말아요. 이게 나를 더 아프게 한답니다.”
규연은 그 어느 때보다도 씁쓸한 눈으로 이경을 바라봤고, 이경 역시 슬픔이 가득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마주했다.
이리 괴로워하는 규연을 마주하고 있을 때면, 끝도 없이 ‘만약’이 튀어나왔다.
만일 이경이 더 빨리 그의 마음을 알아채 규연에게 고백했더라면, 그래서 혼담이 오갈 때 얼른 그녀를 신부로 삼았더라면, 넘쳐나는 이 사랑을 온전히 쏟아 냈더라면, 규연이 이렇게 말라 가지는 않지 않았을까.
무의미한 짓이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이경이 잘 알았다. 한번 놓친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찾아오지 않을지 몰랐다.
‘한데 왜 이리 틈만 나면 떠오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마마와 함께 눈을 뜨고,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미래를 그리면 어떻게 됐을지 묻는 물음이요.’
하지만 연정을 갈구하는 간절한 마음은 틈만 나면 이성을 억누르고 튀어나와 만약을 꿈꾸게 했다.
“…….”
그러나 이경의 바람은 금세 바스러지고 부서졌다.
이경의 마음만 담겼다 했을 때는 감흥 없이 바라보던 알합이었건만.
언이 전하라 했다는 한마디가 더해진 지금, 알합을 바라보는 규연의 눈빛이 달랐다.
어쩌면 이경이 거짓을 고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살짝의 기대만으로 애정이 짙어진 그 눈빛을 본 순간, 이경의 가슴에 또 한 번 흉이 졌다.
* * *
‘정말 전하께서 보내셨을까?’
이경에게는 매몰차게 느껴질 정도로 단호히 말하며 부정했지만, 막상 한마디를 듣고 나니 규연의 가슴이 부풀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미련할 정도로 바보 같다는 것도, 이렇게 헛된 기대를 품어 봤자 결국 또 다치고 마는 건 규연이라는 것도 잘 알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매번 같은 일을 반복하게 되는지.
언이 규연을 위해 마음을 썼을지도 모른다는 아주 작은 기대가 자꾸만 그녀의 시선을 알합에 묶어 뒀다.
“전하께서 보내신 연고이니 무척이나 효능이 좋을 것입니다. 지금 바로 바르시는 것이 어떠실지요, 마마?”
“정 상궁. 자네까지 그런 말 하지 말게.”
“하나 별장 영감이 하신 말씀이 아닙니까. 거짓을 고하시는 분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늘 나를 챙기려 하는 벗이지 않나. 내 마음을 생각해 거짓을 말하고도 남아. 전하께서 연고를 보내실 분이 아님은 정 상궁도 잘 알잖아.”
“어제 전하께서 마마의 상처에 마음을 쓰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비록 그 결과가 다소 요란하기는 하였어도……. 분명 마마께 마음을 쓰셨으니 충분히 보내실 만하지요.”
숱한 고생을 바로 옆에서 매일 지켜보고 있는 정 상궁까지도 거짓이 아닐 것이라 이야기하니 규연의 마음이 흔들렸다.
“자네까지 나를 위해 거짓을 고하지 말게.”
말로는 계속 부정하고 있었지만, 규연의 시선은 여전히 알합에 닿아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절대 아닐 테니 함부로 기대하지 말라는 경고의 북소리가 계속 울리는데, 자꾸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피어났다.
‘그러고 보니 어제 그 눈빛이…….’
비록 다음에 이어진 모진 말 때문에 또 다른 상처로만 남긴 했지만, 어제 규연이 보았던 언의 눈빛이 평소와 달랐다.
어쩌면 언이 그의 마음 한 조각을 규연에게 나눠 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되었든 상처에 잘 듣는 연고니 바르면 좋겠지. 지금은 되었고 잠들기 전에 발라주련. 빨리 나아야 전하께 절뚝이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테니까.”
“예, 마마. 그리하겠습니다.”
규연은 들고 있던 알합을 정 상궁에게 넘겨주었다.
설령 언의 마음이 섞여 있지 않다고 해도 상처에 좋은 것이라면 발라서 나쁠 것이 없었다.
아직 낫지 않은 상처 때문에 언 앞에서 모자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마마! 중전마마!”
아주 조금, 언이 주었을지 모른다는 작은 기대 때문에 아주 조금 기분이 나아지자마자 요란한 목소리가 규연을 찾았다.
“무슨 일이기에 이리 다급해?”
“그, 그것이…….”
평소답지 않게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온 이 상궁의 얼굴은 착잡함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직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지만, 규연은 이 상궁을 보자마자 직감했다.
잠시나마 붕 떠오른 마음이 또 땅 아래 깊은 곳까지 처박히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전하께서 후궁 첩지를 내리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예감은, 한 치도 빗겨나가지 않고 적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