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68)

4화

* * *

차분한 얼굴로 대비전으로 향하던 규연의 발걸음이 무척 무거웠다.

언에게 꽉 잡혔던 손목이 아직도 욱신거렸다. 그가 힘을 가리지 않은 탓에 가느다란 손목에 여전히 흔적이 보였다.

그녀의 손을 막던 매정한 손, 그보다 더 가슴을 찢어 놓았던 서릿발 같은 눈빛과 비수가 되었던 말이 하나하나 멍울이 되어 규연의 마음에 맺혔다.

“대비마마, 중전마마께서 드셨사옵니다.”

“들라 하라.”

문 너머로 대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규연은 숨을 고르며 어제의 기억을 지우려 애썼다. 흔들리는 상태로 대비를 마주할 수는 없었다.

“대비마마께 문안 올리옵니다. 간밤 평안하셨는지요.”

그녀는 군더더기 묻지 않은 깔끔한 움직임으로 예를 표했다. 흠잡을 것 없이 완벽한 예법이 느껴졌다.

하지만 정갈한 며느리를 바라보는 대비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오히려 불만이 가득했다.

그녀의 기색을 확인한 규연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쓸데없는 기 싸움이 벌어질 것이 눈에 훤했다.

“안타깝게도 그리 평안하지 못합니다.”

“어찌 그러시옵니까. 무엇이 대비마마를 평안치 못하게 하셨는지 일러 주시면, 소첩이 최선을 다해 마음에 드시도록 만들겠사옵니다.”

“글쎄요. 중전이 해낼 수나 있으려나.”

규연이 한껏 자세를 낮췄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대비는 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눈빛과 말투로 규연을 대했다.

지금의 대비는 선왕의 어린 계비였다. 언과는 10살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그의 여섯 아들 중 마지막 두 아들만이 대비의 소생이었고, 언을 포함한 네 명의 아들은 죽은 왕비의 자식이었다.

아직 어린 친아들 둘이 궁가 하나 받지 못하고 친정에 틀어박힌 것이 불만인 탓인지, 대비는 언과 규연을 무척 못마땅해했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대비 자신 역시 영의정의 권세에 붙어 힘을 얻은 집안의 사람인데도 그녀는 규연을 냉대했다.

“소첩 참으로 부족한 사람이오나 대비마마께서…….”

“주상께서 어제도 난동을 부리셨다지요?”

“……예, 대비마마.”

“그때 중전은 무얼 했습니까? 달려는 가 보았어요?”

“직접 가 보았습니다.”

“하면 말렸나요? 그 광증이 중전을 보는 순간 잠잠해지덥니까?”

“송구하옵게도 말리지 못하였습니다, 마마. 소첩의 불찰이옵니다.”

“당연히 중전의 불찰이지요. 부부 사이가 원만하고, 하다못해 주상 아래 건강한 원자라도 있었으면 일이 이 지경이 되었겠습니까? 이러다 왕가의 대라도 끊길까 두려워 요즘 내가 잠이 안 와요.”

규연은 꾹 참으며 침묵을 지켰다.

명색이 대비지만 뒷방 늙은이와 다름없는 신세라 그 분(憤)을 규연에게 풀어 내는 것이니 그저 참는 수밖에 없다며 자신을 달랬다.

“내 처음에는 같은 여인으로서 중전이 참으로 가여웠습니다. 현숙한 여인임을 아니 더욱 그러했지요. 한데 이제는 나도 한계입니다.”

“…….”

“대체 무얼 하기에 주상이 밤도 한 번 같이 보내지 않는단 말입니까? 이 무슨 낯 뜨겁고 모자란 일입니까!”

그런데 오늘은 대비가 쏟아 내는 말이 유독 날카로웠다.

규연을 따라 들어온 궁인들은 물론이고, 대비전의 궁인들마저 당황해 저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을 정도였다.

“송구합니다, 대비마마. 소첩, 입이 열 개라도 올릴 말씀이 없습니다.”

“매번 그리 말로만 넘어갈 것입니까? 그리해서는 안 되지요.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다 3년이나 흐른 것이 아닙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왕실의 어른인 내가 그저 웃으며 중전과 주상을 봐주어 이리된 것 같아요.”

“대비마마, 어찌 그리…….”

“연 상궁. 밖에서 병사 하나를 들여오거라.”

연 상궁은 대비를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상궁이었다.

그녀 역시 조금은 당혹스러운 눈치였으나 궐에 오래 머문 노(老)상궁답게 금세 표정을 가다듬고 상전의 명을 따랐다.

“회초리도 꺼내 오거라.”

굵은 회초리까지 대비의 손에 쥐어지자 방 안의 공기가 빠르게 얼어붙었다. 모두가 숨죽이며 대비와 규연을 바라봤다.

“왕실의 기강을 위해 따끔하게 혼을 내는 것도 어른의 역할입니다.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요.”

“…….”

“중전이 내명부를 잘 이끌고 있다고는 하나 자기 사람들에게는 너무 무른 듯합니다.”

“…….”

“그간 중전에게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상전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죄로 진작 몇 번이고 단죄했어야 하는 이들인데 말이에요.”

대비가 무엇을 건드리려 하는지 보이자 중궁전의 궁녀들이 숨을 죽였다.

규연에게 직접 손댈 수는 없으니 아랫것들을 통해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자 하는 모양새였다.

“죄가 크니 다리 하나는 내어 가야겠습니다. 다시는 걷지 못하게 만들어 주어야 본보기를 보일 수 있겠지요.”

“대비마마!”

규연에게서 아연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과해도 너무 과했다. 대비전의 궁녀들이 더욱 당혹스러워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어제 영상이 중궁전에 들었다지요. 무슨 말이 오갔는지 내 압니다.”

어그러진 미소와 함께 전해진 말을 듣자마자 규연이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대비가 숱하게 분풀이를 했어도, 선을 넘은 적은 없었다.

규연 뒤에 있는 영의정 때문에 몸을 사리기도 했고, 궐에서 권세를 휘두를 만한 뒷배도 그리 강하지 못했다.

그런데 영의정이 규연을 내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주워듣자마자 이리 방만하게 행동한다.

“나는 영상이 어떤 자인지 잘 압니다, 중전.”

대비는 규연이 쫓겨날 것이 분명하다며 확신하고 있었다. 한껏 올라간 입꼬리가 이를 증명했다.

규연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한없이 고운 얼굴에서 점점 더 빛이 사라졌다.

“전하께서 소첩을 찾지 않는 일은 순전히 소첩의 잘못입니다. 아랫것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대비마마.”

“그래요? 하면 골라 보세요. 상궁 하나의 다리를 내놓겠습니까, 아니면 내게 직접 회초리를 맞겠습니까?”

규연은 물론이고, 그녀 뒤에 자리하고 있던 중궁전의 궁인들 역시 놀란 낯을 가리지 못했다.

모두가 경악한 상황에서 정 상궁이 빠르게 앞으로 와 다리를 걷었다. 그녀가 벌을 받겠다며 안으로 들어온 병사를 바라봤다.

“물러가거라.”

“중전마마. 대비마마의 말씀이 참으로 지당하십니다. 소인을 비롯한 중궁전의…….”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물러가거라.”

힘이 실린 규연의 목소리에 정 상궁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늘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규연이 이렇게 위압감 있는 목소리를 낼 때면, 그녀의 뜻을 꺾을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정 상궁은 누구보다도 이를 잘 알았다.

“소첩을 때리십시오, 대비마마. 달게 받겠습니다.”

“……그래요. 하면 그리하지요.”

적당히 자리를 파할 수도 있었다. 영의정의 말은 아직 협박일 뿐이었으니, 규연에게는 여전히 힘이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을 모면한다 한들, 냄새를 맡은 대비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차라리 규연이 수치를 감내하는 편이 일을 키우지 않는 방법이었다.

“수를 세세요, 중전.”

“……하나.”

규연의 여린 맨다리가 드러나고, 두꺼운 회초리가 살을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수는 끝도 없이 올라갔다. 하얀 살 위에 피가 터지고, 보기 싫은 자국이 남았다.

중궁전의 궁녀들은 모두 숨죽여 울었다. 대비전의 궁녀들마저 고개를 숙인 채 눈짓을 주고받으며 뒷일을 염려했다. 대비만이 형형하게 눈을 빛냈다.

규연은 아린 통증을 참으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이런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언의 눈빛과 말이 그녀의 심장을 찢어 놓는 것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 * *

“내가 광증을 일으켰다 하면 부리나케 달려온다 하더니, 과장이 아닌가 봅니다.”

대비전에서 겨우 벗어났을 때, 언의 내관이 다시 규연에게로 달려왔다.

다리에 연고 한 번 제대로 바르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규연은 궁인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언이 있다는 곳으로 달려왔다.

그리 간절히 달려왔건만, 눈앞에 보이는 언은 지독히도 멀쩡했다.

평소처럼 익선관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고, 붉은 용포마저 단정했다. 방도 전혀 어지럽혀지지 않았다.

“그냥 심심해 불러 보았습니다. 상선이 내게 이르기를, 중전을 생각해서라도 난동을 부리면 안 된다더군요. 이리 마음을 쓰니 그 뜻을 헤아려 줘야 한다나.”

“…….”

“해서 얼마나 마음을 쓰기에 상선이 저런 말까지 하나 싶어 시험해 보았습니다. 내가 또 눈이 돌아갔다고 하면 그대가 얼마 만에 달려오는지.”

상선이 참으로 송구스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규연은 그저 넋이 나간 채로 언을 바라봤다. 허탈했다. 화를 낼 기력도 없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다리의 상처가 벌어졌다. 그런데도 부리나케 빠른 걸음을 재촉했으니 치마에 가려진 상흔은 다시 엉망이 됐을 터였다.

움직일수록 고통이 엄습했지만, 오로지 언만을 생각하며 버텼다.

그가 아파서는 안 되니까. 그가 또 난동을 부리다 다쳐서는 안 되니까.

너덜너덜해진 그녀 자신은 보지 못했다.

“옥체가 미령하지 않으시다면 그것으로 되었습니다.”

“…….”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전하.”

이대로 언을 바라보고 있다가는 넝마가 된 마음을 들킬 것 같았다.

모든 곳이 죄다 곪고 터져 더 이상 다칠 곳도 없을 듯한데, 마음이 자꾸 자라나기라도 하는 건지 매일매일 새로운 고통이 찾아왔다.

규연은 이를 악물고 통증을 참아 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긴장이 풀리자 배로 찾아온 고통에 당장이고 주저앉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잠깐.”

최대한 빠르게 언의 시야에서 벗어나겠다고 다짐한 순간,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규연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왜 다리를 접니까?”

감쪽같이 감췄다고 생각했다. 이를 악물고 숨겼다고 여겼는데, 언의 눈썰미를 속이지 못했다.

그가 알아차릴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기에 규연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핑계를 찾아내야 하는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머릿속이 백지였다. 어떤 말로 도망가야 하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묻지 않습니까! 왜 걸음이 엉망이 되었냐니까!”

호통 같은 물음에도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규연의 입술은 작게 달싹이기만 할 뿐, 소리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저, 전하!”

그 순간, 언이 규연에게 다가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꼭 품에 안듯 그녀를 감싸 끌어당기자 규연이 언에게 안긴 채 바닥에 주저앉은 모양새가 됐다.

너무 놀란 규연의 귀가 새빨개진 것도 잠시, 언이 그녀의 치마를 걷어 올렸다.

궁인들이 화들짝 걸음을 물리고, 땅으로 고개를 박았다. 규연 역시 너무 당황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스란치마를 걷어 올리니 너른바지 아래로 피가 묻은 속바지가 보였다. 언은 시뻘건 피가 묻은 흰 천을 잠시 응시했다.

그러다 이내 속바지마저 치워 내니 순식간에 가느다란 맨다리가 드러났다. 규연이 예상했던 대로 상처가 다시 벌어지고 터져 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누가 이리 만들었습니까.”

누가 보아도 매가 남긴 상흔이었다. 깊은 상처는 때린 자의 앙심이 얼마나 지대한지 여실히 드러냈다.

규연에게 물었으나 언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중전의 다리를 이 모양으로 만들 수 있는 자는 이 궐에서 몇 없었다.

하나는 언이었으나 그는 그러지 않았으니, 남은 이는 한 사람뿐이었다.

“대비마마입니까?”

“전하. 신첩의 잘못으로 이리된 것이옵니다. 그러니 부디 노여움을 푸시고…….”

규연은 언의 눈동자를 태우는 불꽃을 보았다.

조금 전에 보았던 흐리고 나른한 눈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처럼 언의 눈이 타오를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알았다.

막아야 했다. 무슨 일을 벌여서라도 막아야 했다.

“전하!”

그러나 규연은 언을 막을 수 없었다.

그녀의 간절한 외침이 따랐지만, 이미 그의 걸음은 대비전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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