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68)

3화

* * *

“숙부님께서?”

“예, 마마. 안으로 모실까요?”

“그래. 그리하거라.”

이른 아침부터 영의정이 규연을 찾아왔다.

쉽게 알현을 청하는 시간이 아니었다. 규연은 묘한 불안함을 느끼며 영의정을 안으로 들였다.

“중전마마.”

“이리 이른 시간부터 어인 일이신지요. 오늘은 조참이 있는 날이 아니십니까? 채비하시기도 바쁠 터인데요.”

“본래대로라면 조참에 참석해야 하는 날이지요. 한데 전하께서 급작스레 파하셨습니다.”

“어쩐 연유로…….”

“그분의 뜻을 한낱 신하인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하도 흔히 있는 날이라 더 이상 대신들이 혀도 차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지요.”

얼핏 듣기에는 나라와 왕을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한 충신의 한탄 같았다.

그러나 규연은 숙부의 시꺼먼 속을 누구보다 잘 아는 여인이었다.

눈앞의 사내가 무슨 꿍꿍이로 이른 시간부터 규연을 보러 왔는지 생각하느라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이대로 가다가는 종묘사직에 큰 죄를 지을 것입니다. 흔들리시는 전하를 붙잡지 못한 신하로 남아 역사에 사죄하고 또 사죄해야 할지 모르지요.”

“…….”

“어떻게든 전하의 마음에 이는 파도를 가라앉혀야 합니다. 이대로 가다가 피바람이라도 불면 정말 큰일이에요.”

규연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리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는 것인지 걱정됐다.

영의정은 피바람을 걱정했지만, 언이 칼을 휘두르는 일은 불가능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왕비가 되었다고 해도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어언 세 해였다. 영의정과 언의 관계가 어떤지, 힘의 흐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훤히 보였다.

언의 손과 발은 영의정이 모두 잘랐다. 그가 무엇을 꿈꾸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마께서는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신지요.”

“무엇을 말입니까.”

“전하의 일렁이는 파도를 가라앉히는 방법 말입니다.”

규연은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녀의 답을 듣고자 던진 물음이 아님을 잘 알았다.

“사내는 본래 제 핏줄을 이은 자식을 보면 변하는 법입니다.”

“…….”

“소신 역시 천둥벌거숭이처럼 살다 큰아들을 얻은 후로 달라졌지요. 아마 모든 사내가 이러할 겁니다.”

영의정의 눈빛이 단숨에 예리하게 벼려졌다.

그의 가면과도 같은 여유롭고 천연덕스러운 모습이 사라지고, 날것의 날카로움만 남아 규연을 마주했다.

“세 해가 지났습니다, 마마. 마마께서 중전의 자리에 올라 이 궁으로 들어오신 지가 어언 3년이에요.”

“…….”

“한데 용종을 품기는커녕 합방 한 번 이루지 못하셨지 않습니까. 이는 중전으로서의 태만입니다, 마마.”

숙부라 해도 왕비와 신하였다. 영의정의 말은 월권과도 같은 발언이었다.

그러나 규연은 목소리를 잃은 것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비참한 사실이었으나 그의 말이 맞았다. 부인할 수 없었다. 원자를 낳아 왕손의 대를 잇는 일은 분명 중전으로서 해내야 할 의무였다.

“어제 주상전하를 알현했습니다. 한데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

“중전마마가 아닌 다른 여인이 그 자리에 오르면, 세자뿐만 아니라 대군까지도 예닐곱이 나올 수도 있지 않겠냐고요.”

감정을 감추는 일이라면 이골이 난 규연이었다. 그러나 방금 영의정의 말을 들은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한없이 요동쳤다.

“한데 그 말씀을 듣고 나니 소신의 머릿속에도 한 가지 생각이 스쳤습니다.”

“…….”

“어쩌면 정말 그리될 수도 있겠다고요.”

분홍색 당의 뒤에 가려진 규연의 두 손이 잘게 떨렸다.

왜 이리 이른 아침부터 달려왔나 했더니. 사실상 규연을 협박하러 온 것과 같았다.

규연은 느긋한 미소를 머금은 영의정을 빤히 바라봤다. 드러낼 수 없는 불꽃이 그녀의 속을 까맣게 태웠다.

‘이전부터 이리될 수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언이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을 때부터 각오는 했었다.

세상 사람들이 떠드는 것과 달리, 영의정은 규연을 위한 든든한 지원군이 아니었다.

규연은 그저 그의 장기짝일 뿐이었다.

〈규연아.〉

〈예, 숙부님.〉

〈앞으로 내가 너를 거둘 것이다. 지금껏 살아왔던 것보다도 더욱 풍요롭게 너를 돌봐 줄 수 있지. 하나 조건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요.〉

〈왕비가 되어야겠다. 왕비가 되어 내게 더 큰 힘을 안겨 주어야겠어.〉

몇 해 전 아비의 상을 치르던 날, 영의정과 단둘이 마주했던 순간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했다.

당시의 규연은 기댈 어른이 아무도 없었다. 그녀를 정성스레 키워 준 현주댁과 몸종들이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규연을 지킬 힘이 부족했다.

그러니 그때의 규연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영의정의 제안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규연은 어린 나이에도 심지가 곧은 여인이었고, 아비로부터 물려받은 정치적인 감각이 있었다.

영의정의 제안이 달갑지 않았다.

그가 어떤 사내인지 알기에 그러했고, 왕비라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알기에 더욱 그러했다.

영의정이 내민 손을 덥석 잡았다가는 화가 미치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게다가 그때는 왕비라는 자리도, 왕비가 될 사람의 자리도 전혀 비어 있지 않은 때였다.

세자에게는 이미 세자빈이 있었고, 둘째 대군인 호산 대군에게도 부인이 있었다. 혼기가 차지 않은 어린 대군을 제외하면, 남는 건 언뿐이었다.

소식이 뚝 끊긴 언을 기다리고 있던 시절이었다. 영의정이 말하는 자리가 언의 옆자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언과의 사이를 온전히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모르는 척 마음을 숨겼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계비로 들어가신 중전마마께서 멀쩡히 계시고, 세자저하께도…….〉

〈세자는 왕이 되지 못할 게야.〉

그는 너무나도 태연하게 불경스러운 말을 입에 올렸다. 누군가 듣는다면 당장 반역죄로 목이 잘릴 터였다.

그러나 영의정은 그가 내뿜는 곰방대의 담배 연기처럼 한없이 느긋하기만 했다.

정해진 왕마저도 바꿔 놓을 수 있다는 자신감. 이미 권력을 틀어쥐었다는 확신. 힘이 주는 여유가 흘러넘쳤다.

〈연성 대군이 왕이 될 게다.〉

연성 대군 이언. 규연이 생각하던 그 이름이 영의정의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의 부인이 되거라. 중전이라는 자리에 올라 나의 뜻을 이뤄 주면 내 너에게 끝없는 부귀영화를 약속하마.〉

부귀영화는 그녀를 홀릴 수 없었다. 날 때부터 쥐었던 풍요는 그녀에게 그리 매력적인 유혹이 아니었다.

그러나 ‘연성 대군의 부인’이라는 자리는 규연의 가슴을 떨리게 했다.

손에 앵두가 놓였던 순간부터 연락이 끊기기 전까지 언과 보내 온 다정한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때의 모습이시리라 믿었지. 한없이 다정했던 그분이 나를 기다리고 계실 거라고.’

조용히 과거를 되새기던 규연이 속으로 한숨을 삼켜 냈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영의정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었다. 그 역시 규연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소신이 드린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중전마마.”

“…….”

“기회가 그리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하니 유념해 주십시오.”

단호한 목소리와 상반된 여유로운 미소가 그의 입가에 내려앉았다.

영의정은 용건을 전했으니 더 이상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는 듯, 미련도 비치지 않고 일어나 대조전을 벗어났다.

규연은 홀로 남은 침전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언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궐에서 쫓아내겠다는 엄포 앞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 * *

“어찌 또 광증이 도지셨다는 말이냐! 상선은 무얼 했고!”

“송구합니다, 마마. 상선 영감이 손을 쓰려 해 보았는데, 전하께서 조금도…….”

“하……. 희정당이라 했느냐?”

“예, 마마.”

“어서 그곳으로 가자.”

영의정의 방문으로 충분히 심란하건만. 정오가 지나자마자 다시 일이 터졌다.

언을 보필하는 내관 하나가 왕의 광증을 말려 달라며 중궁전으로 달려왔다.

흐트러진 옷과 관모에서 그곳의 상황이 어땠을지 충분히 짐작 갔다.

‘광증’이라 이야기하는 언의 기행이 벌어지면, 누구도 그를 말릴 수 없었다. 규연이 부리나케 달려간다 해도 달라지는 바는 없었다.

그러나 궁인들은 적어도 광증을 진정시키려 했다는 ‘흔적’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항상 규연에게 와 도움을 청했다.

그저 몸과 마음이 축나며 이용당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규연은 소식을 들을 때마다 언에게로 달려갔다.

“중전마마!”

“고하거라. 안으로 들 것이다.”

“고하셔도 듣지 못하실 것이옵니다. 조금 전 갑자기 오수에 드셨습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상궁이 해연을 맞았다. 다행히 고비는 넘긴 듯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잠잠해졌다 한들 멀쩡할 리 없었다. 언의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

희정당 안으로 들어간 순간, 규연은 말을 잃고 그 자리에 굳었다.

안이 엉망이었다. 창을 가리는 발은 찢어져 바닥에 널브러져 있고, 방을 장식하던 자기 역시 산산조각 난 채 바닥을 어지럽혔다.

온갖 물건을 집어 던지며 난동을 부린 흔적이 가득했다. 양귀비 향과 또 다른 풀의 내음이 마구 뒤섞여 정신마저 혼미하게 했다.

“전하, 어찌 이러십니까.”

언은 구석의 벽에 몸을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익선관은 어디로 벗어 던진 건지 보이지 않았고, 용포 역시 매무새가 말이 아니었다.

규연은 난장을 헤치고 조심스레 언에게로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그의 앞에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대군 대감과 벗이라고?〉

〈그게 그리 놀랄 일이야?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시다. 뵐 때마다 감탄하게 되지. 문무 어디에도 빠지시는 게 없고, 풍류 또한 보실 줄 아셔.〉

〈그리 대단하신 분이 어찌 너와 어울리신단 말이냐?〉

〈네 벗이 그만큼 훌륭한 게지!〉

어린 날 이경과 나누었던 대화가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었다.

늘 놀리기는 했어도 참으로 총명하고 용맹했던 이경이었다. 사람 보는 눈 역시 믿을 만했다.

한데 그런 벗이 ‘연성 대군’이라는 말만 나오면 입이 닳도록 격찬을 늘어놓았다.

규연이 처음 언을 마주했을 때, 그녀는 이경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노라 생각했다.

고작 짧게 마주친 게 전부였지만, 그의 성품과 아름다움이 드러나기에는 충분했다.

“대체 어이하여……. 어이하여 이러시는 것이옵니까.”

그런데 한 해 뒤에 궁에 들어와 마주한 언은 그때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얼굴만 똑같은 사내가 나타나 그인 척 세상을 속이고 있다 믿고 싶을 만큼, 너무나도 망가져 있었다.

갑작스레 형제를 잃고, 준비되지 않은 채로 왕이 되어 영의정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 해도 이렇게 난동을 부리는 것만이 방법은 아니었다.

규연은 차오르는 울음을 삼키며 곤히 잠든 언의 얼굴을 바라봤다.

참으로 수려한 외모였다. 길고 깊은 눈매에는 단단한 힘이 있었고, 높은 콧대와 날렵한 콧날에는 기지가 보였다.

시선을 내려 끝이 살짝 올라간 붉은 입술까지 담아 내고 나면, 어느 여인이고 볼을 붉힐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용모였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언젠가는 이 아름다운 용안으로 신첩을 바라보며 다시 웃어 주시리라 믿었는데.

〈……대군 대감?〉

〈아……. 그러니까……. 내가 이곳에 왜 왔냐면……. 아, 그보다 함부로 담을 넘어 미안합니다. 대문을 넘어 들어오면 소란스러워질 듯해서요.〉

〈괜찮습니다. 한데 무슨 연유로 또 오신 것인지요? 혹시 이경을 찾으시나요? 그렇다면 이곳에 없습니다.〉

〈아니요. 이경과는 상관없습니다.〉

〈하면…….〉

〈낭자가 보고 싶어 왔습니다. 하루 온 종일 아른거리는 그대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요.〉

앵두를 쥐여 준 뒤 며칠이 지나 홀로 담을 넘고 마음을 고백했던 그 순간처럼 신첩이 보고 싶었노라 속삭이시리라 믿었는데.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이 규연의 가슴에 맺혔다. 슬픔에 잠긴 그녀는 홀린 듯이 손을 뻗었다.

자기의 파편이 볼에 상처를 남겨 놓았다. 고운 피부에 남긴 피를 닦아 주고 싶었다.

“저, 전하!”

그러나 규연에게는 그 조심스러운 손길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깊이 잠든 줄만 알았던 언이 어느새 두 눈을 치켜뜨고 규연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전하, 아, 아픕니다.”

당장이고 으스러질 듯한 악력이 전해졌다. 고통으로 얼룩진 눈이 언을 바라봤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손을 뻗습니까.”

그러나 손목에 전해진 고통은 얼마 가지 않아 눈 녹듯 사라졌다.

“나는 중전에게 그 무엇도 허락한 적 없습니다.”

언이 뱉은 말이 주는 상처가 지독하게도 아파서 손목의 통증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잊혔다.

가슴이 너무 아파서, 정말 찢어질 듯이 아파서, 규연은 손목에 새빨간 흔적이 남는 것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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