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 *
“합방일에 중전마마의 침전으로 드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전하. 소식을 들은 대소신료들이 참으로 기뻐했사옵니다.”
한쪽 팔을 기댄 채 몸을 뉘고 있던 언이 심드렁한 얼굴로 눈앞의 사내를 바라봤다.
영의정 한용희. 사실상 국구(國舅)인 사내였다.
왕 위의 구렁이라 한다던가. 언은 세간의 소문을 떠올리며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영상.”
“예, 전하.”
“궁에 붙여 둔 눈과 귀가 짐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가 보지?”
“궐에 있는 모든 이들이 애타게 바라던 기쁜 소식이다 보니 빠르게 들려왔을 따름이옵니다, 전하.”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영의정의 얼굴에는 여유가 흘러넘쳤다. 왕과 마주 앉은 신하의 모습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도 아무런 해가 가지 않을 터인데 무엇 하러 몸을 사리는가? 익선관만 내가 썼을 뿐, 이 나라의 칼자루가 뉘 손에 있는지 모르는 자가 없는데.”
“전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누가 무어라 해도 이 나라의 주인, 이 나라 조선의 근본은 전하십니다. 누가 감히 그런 망발을 전하께 고했나이까. 당장 엄벌을 내리시옵소서.”
지독한 가증이었다.
말로만 저리 앓는 소리를 낼 뿐, 머리를 조아려 보이지 않는 얼굴에 미소가 어렸을 것이 빤했다.
“전하. 합방일만이라도 중전마마의 침전에 드셔야 합니다. 대를 이을 왕손을 낳는 일 역시 종묘사직을 위한 대업이지 않사옵니까.”
“…….”
“부디 하해와 같은 은혜를 베푸시어 온 나라에 경사가 찾아오게 하소서.”
참으로 역겨운 이였다.
나라 꼴이 이 지경이 되기 전에도 그랬고, 이렇게 엉망이 된 후로는 더욱 그러했다.
언은 쓰고 있던 익선관을 벗어 손에 쥐었다. 체통과 위엄을 생각한다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지만, 그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안에 들어서 있던 궁인들이 포기하듯이 눈을 감고, 영의정 역시 언의 기행이 익숙하다는 듯 덤덤하게 왕을 바라봤다.
언만 씨익 웃으며 익선관을 던졌다 받는 일을 반복했다.
왕의 지위를 나타내는 모자가 언의 손 위에서 툭툭 놀아났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지. 누가 들으면 원자를 짐 혼자 낳는 줄 알겠어.”
“…….”
“나도 모르는 새에 내가 여인이 된 겐가? 그것도 아니면, 머리가 돌아 버린 폭군은 남들과 달라 배 속에 아이를 품을 수 있나 보지?”
“…….”
“원자가 태어나지 않는 것이 문제면 중전을 바꾸면 될 일 아니더냐.”
“…….”
“혹시 아는가? 영상이 죄다 내쫓아 버린 그 의녀들 같은 계집이 중전이 되면, 내 눈이 돌아가 세자는 물론이고 대군마저도 예닐곱이 나올지?”
언은 참으로 재밌는 이야기 아니냐며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나 웃는 건 언밖에 없었다. 지금껏 내내 여유롭던 영의정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피가 무섭긴 한가 보우이. 질녀를 내치는 일은 영 꺼려지는가?”
중전인 규연을 내친다는 것은 곧 영의정을 내친다는 뜻과 같았다.
그저 미치광이 왕일 뿐인 언이 이를 감당해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애초에 시도 자체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정신을 놓은 듯한 웃음 너머로 전해진 말에는 뼈가 있었다.
절대 영의정의 핏줄을 통해서는 후사를 보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보였다.
억지로 왕위에 앉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묶인, 허울뿐인 용포를 두른 자의 작은 저항이었다.
“영상.”
“예, 전하.”
“짐이 이 마음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줄까? 이리 가까이 와 보게. 어서 귀를 대 봐.”
단숨에 가벼워진 목소리가 영의정을 불렀다. 금세 굳은 표정을 지워 낸 그가 천천히 언에게로 다가왔다.
“양귀비. 내게 양귀비를 더 가져오게. 하면 중전을 안아 볼 터이니.”
그러나 작은 몸부림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자취를 감췄다.
왕이라는 자가 정신을 놓고 취할 수 있는 약을 청한 것이건만, 충신을 자처하던 영의정은 웃음을 가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리하겠노라 답했다.
언은 그 모습을 보며 진심으로 웃었다.
참으로 뭣 같은 궐이었다. 참으로.
* * *
“마마. 아직 밤바람이 찹니다. 이만 안으로 드시지요.”
“그리 춥지 않아. 내 속이 갑갑해 바람을 쐬려는 것이니 막지 말거라.”
“하나…….”
“괜찮대도.”
규연은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는 정 상궁을 보며 미소 지었다.
정 상궁은 여전히 조마조마한 마음을 다 지우지 못했지만, 규연이 원체 단호했다.
게다가 규연이 직접 속이 갑갑하다 말하였으니 더더욱 막을 길이 없었다.
“날이 어두워도 부용정은 항상 아름답구나. 오늘은 달마저 환하니 더욱 보기 좋아.”
규연은 정자를 품은 연못 앞에 서서 나지막이 감상을 속삭였다.
속이 문드러지는 하루였다.
온 궁궐이 합방일에 규연을 찾은 언의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그러나 말은 돌고 돌아 똑같은 결론에 닿았다.
‘왕이 중궁전에 들었으나 또 중전을 안지 않았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이야기는 더 짙은 비웃음만을 자아냈다.
궁 안에서 마주하는 모든 시선이 버거웠다.
감히 그녀와 눈을 맞출 수 있는 이가 몇 없음을 아는데도, 모든 이들이 규연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연꽃까지 활짝 피었으면 참으로 좋았을 터인데요.”
멍하니 연못을 바라보며 한숨만 삼키고 있을 때,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규연은 곧장 뒤를 돌아 목소리의 주인을 마주했다.
“아직 밤기운이 쌀쌀합니다, 중전마마. 고뿔이 드시지는 않을까 염려되옵니다.”
“다들 내가 당장 쓰러질 것처럼 보이나 봅니다. 오랜만에 만난 벗마저도 그리 이야기를 하니.”
내내 표정이 없던 얼굴에 옅게나마 반가움이 비쳤다.
부용정에 찾아온 이는 이경이었다. 그는 호위청의 별장으로, 규연의 오랜 벗이었다.
그녀가 언에게 마음을 빼앗긴 날, 언을 규연의 집으로 데려온 장본인이기도 했다.
“옥안의 빛이 어두우십니다.”
“밝은 날이 몇이나 된다고.”
규연의 자조 섞인 말이 이경의 걱정을 받아쳤다. 미소인지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미약한 웃음에 이경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에게 규연은 왕의 아내이고, 조선의 어머니이기 이전에 오래 지켜봐 온 소중한 벗이었다.
이경은 유달리 해맑은 웃음을 짓곤 하던 규연을 똑똑히 기억했다.
〈이것 봐. 홍매화가 이렇게 예쁘게 피었어. 정말 곱지?〉
〈꽃 옆에 너무 붙어 있지 마라. 안 그래도 못난 얼굴 더 못나 보인다.〉
〈누가 할 소리를? 이경이 네가 제일 못났어!〉
장난스레 놀리면 뿔을 내고, 반대로 이경을 놀릴 때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소녀인 것처럼 말갛게 웃었다.
기쁨에도, 슬픔에도, 참으로 솔직한 여인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휘몰아친 운명의 폭풍은 규연에게서 너무 많은 것들을 앗아 갔다.
영의정의 형이자 규연의 아비인 호조 판서 한용언이 급작스레 죽었다. 단숨에 심장이 멎었다고 했다.
그의 죽음을 두고 수많은 말이 오갔지만, 결국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태어나는 순간 어미를 잃은 규연이었다.
하나뿐인 자식을 귀히 여기며 금지옥엽처럼 키운 아비가 떠나니 그녀의 세상 역시 송두리째 흔들렸다.
〈아버지. 방금 무어라…….〉
〈일이 그리되었다. 영상 대감이 심상치 않아. 단순히 너와의 혼담만 무른 것이면 다행이련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심상치 않다는 것은 무슨 뜻이고요?〉
〈몇 해 전에 영상 대감의 고명딸이 죽지 않았더냐. 어떻게든 왕비로 만들고자 그리 애를 쓰더니. 그 뒤로는 질녀인 규연이를 호시탐탐 노렸는데, 형님인 호판 대감이 원체 단호히 막아 꿈을 접었다고 들었다.〉
〈……하면 이제 규연이가 홀로 남았으니 영상 대감께서 그 아이를 왕비로 만들고자 한단 말씀이십니까?〉
〈아직은 내 짐작이다. 하나 들어맞을 터이지. 그게 아니고서야 왜 너와의 혼사를 엎고자 하겠느냐.〉
이경만이 아는 혼담이었다.
원체 두 집안의 사이가 좋아 이경과 규연이 갓난아기였을 때부터 오간 약속이었다. 하지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호판은 규연에게 한 번도 혼인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죽마고우와 혼담 이야기를 하는 것이 꽤나 머쓱했기에 이경 역시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런데 깨질 리 없다 여긴 약속이 단번에 파투 났다.
이경의 아비는 영의정이 홀로 남은 질녀를 데리고 왕비 놀음을 벌일 속셈이라 짐작했다.
당시에도 왕보다 더한 권력을 쥔 사내라 불리던 영의정이었다. 그러니 이경과 그의 집안은 그저 잠자코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경은 혼담을 묻었다. 그렇게 하라 명받았고, 아비를 잃은 규연에게 이제 와서 옛이야기의 전말을 꺼내는 것도 우스웠으니.
그 뒤로 몇 날이 흐르고, 이경이 장난스레 언의 발을 규연에게로 이끌었다.
〈이곳 골목은 어찌 그리 잘 아느냐?〉
〈제가 항상 말씀드리던 저의 벗을 기억하십니까? 그 아이의 집이 이곳 근처입니다.〉
〈아아. 그 낭자 말이지?〉
〈예, 대군 대감.〉
〈네 이야기만 들으면 무척 대찬 여인 같던데.〉
〈대차기만 한가요. 사내로 태어났으면 아마 사람 여럿 잡아먹었을 겁니다.〉
〈그리 말하니 어떤 여인인지 참으로 궁금하구나.〉
〈만나 보시렵니까? 대감께서 놀라 도망가실 수도 있습니다.〉
규연이 그날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이경도 새하얗게 뒤덮인 그날의 밤을 똑똑히 기억했다.
언 역시 너무도 소중한 벗이었으니, 또 다른 귀한 벗인 규연과도 연이 닿으면 셋이 함께 즐거이 지낼지 모른다는 기대가 만든 밤이었다.
〈그리 말하는 것을 보면 어째 네가 은애하는 여인이 아닐까 싶은데?〉
〈농으로라도 그런 말씀 마십시오. 친누이 같은 벗입니다. 얼마 전까지는 혼담이 오가서 꽤나 어색했는데, 그것도 엎어졌으니 이젠 정말 그저 누이입니다.〉
〈혼담이 엎어져?〉
〈예. 그것보다 시간이 늦어 대문을 열어 줄 리는 없으니 담을 넘어야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날 밤까지만 해도, 아니 그날 밤의 그 순간까지만 해도, 이경은 자신의 마음을 몰랐다.
언에게 이쪽 담을 넘으라며 방향을 일러 주고, 혹여 함께 넘으면 들킬까 싶어 반대쪽 담을 넘어 안채 마당에 들고서야 알았다.
이경이 없는 새에 마주쳐 수줍게 대화를 나누는 언과 규연이 눈에 담기자 이경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
태어나 처음 겪는 감정이었고, 태어나 처음 겪는 격통이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사실은 이경이 무척 오래전부터 규연을 마음에 담아 왔음을. 그저 오랜 벗이라고 덮으며 애심을 깨닫지 못하였음을.
“무엇을 그리 생각합니까?”
“……송구합니다. 잠시 옛 기억이 떠올라서요.”
“옛 기억?”
“……별것 아닌 기억입니다.”
예전이라면 별것 아니어도 이야기해 보라며 되물었을 터인데.
지칠 대로 지친 기색의 규연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연못으로 시선을 돌렸다.
참으로 대찬 여인이라며 혀를 차게 하던 옛 모습은 그녀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운명의 장난이 규연을 이토록 슬프게 바꿔 놓았다.
“옛 기억이라 하니 나도 떠오르는 게 있습니다. 우리 집 연못에 피어 있던 연꽃이요. 맹꽁이 우는 소리를 들으며 진분홍 연꽃을 보던 게 여름의 낙이었는데.”
행복했던 시절의 추억이 고운 웃음이 되어 규연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그러나 찰나였다. 그녀의 입꼬리에 맺힌 둥근 선은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분홍빛 뺨을 잃고, 말간 미소도 잃고, 야윌 대로 야위어 버린 규연을 보며 이경은 생각했다.
〈고운 이름을 가진 낭자더구나. 참으로 고운 여인.〉
그날 밤 언이 규연에게 반했던 순간 그저 솔직히 이야기했더라면.
사실은 벗이 아니라고, 오래전부터 마음에 담았던 여인이라고 말했더라면.
〈대군 대감께서 왕위에 오르신단 말씀이십니까?〉
모든 이의 예상을 깨고 언이 왕위에 올랐을 때, 당장 규연에게 달려가 그녀의 손을 잡고 도망갔더라면.
한번 정한 혼사를 무르는 일이 어디 있냐며 절대 용납할 수 없노라 우기기라도 했더라면.
“적어도 우리가 이리 불행해지지는 않았겠지요.”
“지금 무어라 말했습니까? 작아서 듣지 못했습니다.”
“……아닙니다, 마마.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랑받지 못한다는 이유로 규연의 가슴이 눈물로 얼룩지지 않고, 절대 사랑해서는 안 되는 여인을 품어 이경의 가슴이 넝마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이경은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후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