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한 번에 예닐곱씩 여인을 품는데, 그중 다섯은 사흘도 가지 못해 목이 잘려 궁 밖으로 나온다 했다.
단정히 머리 위에 놓여야 할 익선관은 늘 바닥에 널브러지고, 허리춤에 둘려 있어야 할 옥대도 틈만 나면 자취를 감추고, 적색 용포 역시 매일 술에 젖어 얼룩진다고도 했다.
종묘사직의 대를 이어 온 선왕들이 천인공노할 나라의 수치.
언제 폐위되어도 놀랍지 않을 폭군.
그 사내가 규연의 낭군이었다.
“좋은 날이다. 한데 어찌들 그리 우느냐.”
“아가씨…….”
몇 해 전 왕비를 뽑는 삼간택이 열리던 날 아침, 고운 아가씨를 모시던 종들은 눈물로 소맷자락을 적셨다.
마지막 시험이 끝나지 않았으나 세 명의 처자 중 누가 왕비가 될지는 뻔했다.
한규연. 왕 위의 구렁이라 불리며 조선을 움켜쥔 영의정 한용희의 질녀. 규연을 제칠 수 있는 처녀는 없었다. 간택은 명분을 위한 허울이었을 뿐,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눈물이 끊이지 않았다. 귀하게 자란 규연을 무자비한 폭군의 왕비로 보내야 한다니, 홀로 남은 아가씨를 제 자식처럼 모신 이들의 억장이 무너졌다.
“이리 귀한 우리 아가씨를 어찌…….”
“조선 땅에서 가장 높은 여인이 되는 일이야. 누가 보면 괴물에 팔려 가는 줄 알겠구나.”
“하나…….”
엉엉 우는 이들 틈에서, 정작 팔려 가는 신부는 담담했다. 그녀는 어떠한 슬픔도, 두려움도, 회한도 드러내지 않고 평온한 얼굴로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본래 말은 사람을 거칠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법이야. 전하를 노리고 일부러 불경스러운 말을 얹는 자들도 있었을 게다. 하니 그리 애달파하지 마. 삼간택에 나서던 처녀의 집에서 곡소리가 났다는 말이 돌면 좋을 게 무어 있겠어.”
미래의 왕비로서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한 답변이었다. 그러나 규연을 보필해 온 현주댁은 슬픔 어린 눈으로 어린 소녀를 바라봤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현주댁만큼은 규연이 왜 이리 평온한지 잘 알았다.
〈어디 다친 곳은 없습니까?〉
〈예, 대군 대감. 다행히 무사합니다. 몹쓸 꼴을 보여 송구합니다.〉
〈몹쓸 꼴이라니요. 전혀요. 그리 말하지 마세요.〉
눈이 포슬포슬 내린 날이었다. 왕위와는 한참 거리가 있던 시절, 당시에는 대군이던 왕이 규연의 집에 찾아왔다.
규연의 오랜 벗인 이경은 왕의 벗이기도 했다. 잠시 들렀다며 두 사내가 몰래 담벼락을 넘어선 날, 어린 규연은 대군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날 보았던 정갈하고 총명한 사내는 이제 없다고, 궁궐 너머로 흘러나오는 소식은 결코 부풀기만 한 헛소문이 아니라고, 현주댁은 간절한 눈으로 말을 전하려 했다.
하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규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마에 올라타 궐 안으로 향했고, 온 세상이 예상한 그대로 왕비가 됐다.
* * *
“채비를 마쳤사옵니다, 중전마마.”
“그래. 이만 나가 보거라.”
규연의 새하얀 적삼과 치마의 매무새를 살핀 상궁이 조용히 침전을 비웠다.
주상과 중전의 합방일이었다. 종묘사직의 대를 이을 적자를 낳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살을 맞대야 했다.
그러나 벚꽃이 흐드러진 때에 가례를 올리고, 그 후로 세 번의 봄이 찾아오도록 규연은 초야를 치르지 못했다.
씁쓸한 현실을 떠올리던 규연이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가례를 마치고 신방에서 낭군을 기다리던 첫날밤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 * *
〈저, 전하!〉
밖을 지키던 상궁의 당황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가례를 치르는 내내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왕에게서는 술 내음이 났다. 제법 거리가 벌어져 있는데도 맡을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취기가 깊었다.
〈신첩……. 윽!〉
일어나 인사를 올릴 새도 없었다.
성큼성큼 다가온 왕은 커다란 손으로 규연의 턱을 그러쥐었다. 부드러움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우악스러운 손길이었다.
〈이리 반반한 얼굴인데 참으로 안타깝지.〉
낭군이 된 왕을 바라보던 규연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널을 뛰었다.
수줍음이 서린 얼굴로 그녀를 걱정하던 대군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매화 향이 섞인 독한 술 내음, 총기가 가신 탁한 눈동자, 단단한 입매에 걸친 비릿한 웃음.
규연이 마음에 품었던 사내가 아니었다.
분명 생김새도 같고, 그때와 다른 점이라고는 앳된 기운이 사라진 것뿐인데, 아예 다른 사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그날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영상의 질녀가 아니었다면 적어도 오늘 밤은 한번 안아 보았을 텐데 말이야.〉
〈…….〉
〈한데 이걸 어쩌나. 짐이 어제부터 영상에게 아주 단단히 화가 났거든. 이유가 무언지 알아?〉
시선을 피하려는 의도를 알아챈 듯, 왕은 여전히 규연의 턱을 놓아주지 않고서 그와 눈을 맞추게 했다.
〈……무엇이옵니까.〉
〈어제 내 침전으로 들인 의녀 넷을 전부 궁에서 쫓아냈다. 계집 하나가 무척 고와 오랜만에 마음에 찼는데 말이야.〉
〈…….〉
〈흔적도 없이 내쫓아 버렸어. 이유가 무얼까 했더니, 우리 고귀하신 영상 대감께서 꼴에 제 식구를 챙기려 그리했나 봐?〉
갓 혼인을 하고, 초야를 치르기 위해 들어온 신방에서 나누기에는 참으로 지독한 대화였다.
홀로 감정의 씨앗을 움 틔우고 있던 규연에게는 더더욱 괴로운 말이었다.
〈이 답답한 궐에서 중전이 힘을 얻을 방법이 무엇인지는 아느냐.〉
〈…….〉
〈영상이 분명 일러 주었을 터인데. 이곳에서 어찌해야 하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이야기했을 것이 아니냐.〉
조용히 읊조리는 말인데도 꼭 윽박지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왕은 연신 물었고, 규연의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두려움이 가득 비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게 전부였다.
〈말하지 않겠다면 내 혼인 선물로 알려 주마.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이 없지.〉
왕은 빈정거리듯 웃고는 규연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갖다 댔다.
여린 살에 닿는 뜨거운 숨결이 너무도 생경했다. 규연은 그녀도 모르게 몸을 바르작거리다 겨우 움직임을 감췄다.
〈하나. 주상의 총애를 얻을 것. 베갯머리송사를 이길 신하 따위는 없다.〉
〈…….〉
〈둘. 주상의 씨를 받아 배 속에 용종을 품을 것. 미래의 왕이 네 배 속에서 나는 순간, 영상의 세상에 아니라 네 세상이 찾아올지도 모르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한없이 달았다.
커다란 손이 남기고 간 붉은 기운이 얼굴에 남아 있고, 이전과 다르다는 두려움에 몸이 잘게 떨리는데도, 규연은 그의 목소리가 달콤하다고 여겼다.
〈하나 나는 네게 그 무엇도 허락하지 않을 게다.〉
〈…….〉
〈총애가 아닌 지독한 박대가 네게 향할 테고, 내가 너를 품에 안는 일 또한 없을 테지.〉
그러나 감미로운 목소리는 연신 독을 뱉어 냈다.
입술 밖으로 새어 나온 독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규연의 가슴에 박히고, 후벼 파인 상처는 여린 눈물이 되어 뺨을 적셨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내 같았다. 규연과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둘이 어떤 마음을 속삭였는지, 새까맣게 잊다 못해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말을 마친 왕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침전 밖으로 나갔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그 걸음에는 조금도 망설임이 보이지 않았다.
규연은 홀로 남아 소박맞은 초야를 보냈다.
차마 잠들 수도 없어 하염없이 눈물만 흐르던 시간, 지금보다 어린 그녀는 왕의 말을 애써 부정했다.
잔뜩 취했으니 술기운에 저러시는 것이라고, 날이 밝으면 아예 기억조차 못 하실 것이라고, 분명 진심이 아니셨을 것이라고.
하지만 왕은 진심이었다. 단 하나의 허언도 없었다.
그는 규연을 안지 않았다.
중전을 통해 원자를 보셔야 한다는 상소가 날로 쏟아지고, 영상을 비롯한 신료들의 압박이 이어져도 규연이 왕의 온기를 느끼는 날은 오지 않았다.
* * *
“오늘도 오지 않으시겠지.”
세 해 전 초야를 떠올리던 규연이 한숨을 내쉬며 작게 읊조렸다.
왕은 합방일마다 자리를 비웠다. 중전이 있는 침전을 버려 두었다. 단 한 번도 그녀를 찾지 않았다.
규연으로서는 차마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의 수치였다.
중전의 입지에도 흠집이 났고, 여인의 자존심은 짓밟혔다.
조선을 쥔 영상 대감의 후광을 업었지만, 참으로 지독하게도 소박맞는 왕비. 그게 규연의 위치였다.
초야도 치르지 못했으니 용종을 품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여인으로서의 위치가 흔들릴수록, 규연은 중전이라는 역할에 더욱 힘을 다했다.
왕에게 사랑받는 왕비는 되지 못해도, 나라의 어미 역할만큼은 잘 해내고 싶었다.
“주상 전하 납시오!”
밀려드는 생각에 갇혀 있을 때, 꼭 꿈을 꾸는 것만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규연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전 밖을 지키던 중궁전의 궁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세 번의 봄이 오는 동안 이어진 수많은 박대에도 규연의 불꽃은 꺼질 줄을 몰랐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참으로 천치 같았지만, 좀처럼 마음이 접히지 않았다. 하니 침전으로 들어오는 발소리에 가슴이 뛰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었다.
“……전하.”
하나 두둥실 떠오른 마음은 이내 바닥으로 처박혔다.
한껏 풀린 왕의 눈이 의미하는 건 하나였다.
양귀비. 양귀비즙으로 만든 향에 취해서야 왕의 걸음이 규연에게로 닿았다.
“양귀비에 취하시는 것만큼은 아니 되신다고 말씀 올리지 않았습니까. 전하. 이것만은…….”
“나는 중전이 참으로 신기합니다.”
규연은 양귀비 향이 사람을 어떻게 좀먹는지 잘 알았다. 그래서 이것만큼은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건만, 왕은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저자에 그런 말이 돈다지요? 미쳐 버린 폭군 대신 총명한 중전이 궁의 살림을 보살피고 있다고.”
“헛소문입니다, 전하.”
“왕이 되고 싶은가? 내 목을 치고 익선관을 쓰고 싶습니까?”
“얼토당토않은 말씀이십니다. 어찌 그런 불경한 말에 귀를 기울이시는지요.”
몽롱한 얼굴이 규연에게로 바짝 다가왔다.
예나 지금이나 규연의 마음을 녹인 훤칠한 얼굴이 가까워지니 그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면 여인으로서 아무런 욕심이 없는 겐가?”
간질거리는 부끄러움은 이내 아픈 수치스러움으로 변해 규연을 흔들었다. 아래로 향했던 그녀의 시선이 왕을 똑바로 마주했다.
“이쯤 되니 궁금합니다. 얼마나 더 당하고 짓밟혀야 중전의 눈에서 헛된 기대가 사라질지.”
왕은 짙은 조소를 남기고 눈을 감았다. 규연은 향에 정신을 놓은 그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이건…….〉
〈앵두입니다. 여름에 붉게 익는 과일이 한겨울이 되도록 나무에 달려 있어 따 놓았는데……. 낭자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소녀에게 과분한 선물입니다. 그리 귀한 앵두라면 대군 대감께서…….〉
〈무엇이든 주고 싶어 그러합니다. 전혀 과분하지도 않고요. 오히려 낭자에게 쥐여 주기 민망한 선물이지요.〉
새하얀 눈이 세상을 뒤덮었던 그날 밤에 우리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낭자의 이름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규연. 한규연이라 하옵니다.〉
〈나는 언입니다. 이언이요.〉
그날 감히 대군이었던 당신의 이름을 듣지 못했더라면.
적어도 이렇게 가슴이 찢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적어도 당신을 미워할 수라도 있었을 것이라고.
규연은 차마 뱉을 수 없는 말을 삼키며 허공을 응시했다.
이제 더 이상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바짝 메마른 가슴은 그마저도 사치라는 듯, 눈물까지 빼앗아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