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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60/60)

<60화>

재경은 내년 봄에 있을 자신의 결혼식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솔직히 가장 신경 쓰고 있는 건 어디에서 결혼식을 올릴지가 아니라 이 소식을 어떻게 전달하는 게 좋을지였다.

“이번에도 잡지에 하셔야지요.”

백 비서는 냉큼 이번 일도 크게 키우려는 야심을 보였다. 연속적으로 최고 매출을 갱신하는 와중이라 이젠 제법 직원도 생겼다. 

“그럼요.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는 건 너무 아까워요.”

다른 여직원이 끼어들자, 백 비서가 팔짱을 끼며 직원을 응시했다. 이렇게 한 걸음 멀어져서 보면 백 비서의 까탈스러운 성격은 여전해 보였다.

몇 개월 전 재경은 작은 사무실을 얻어서 나왔다. 직원을 여러 명 늘린 이유는 종이 잡지를 출간해 보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에세이로 쓰실 거죠?”

기대하는 직원의 말에 백 비서가 미간을 구겼다.

“그럼 좀 뻔하지 않을까요?”

“내 생각도 그래요. 이미 한 번 했었던 것도 있고. 너무 제 이야기만 담으면 일기와 구분이 되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요.”

재경은 고민하다가 다른 더 좋은 의견이 없느냐는 눈으로 직원들을 보았다. 그러자 한 직원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저! 아이디어 생각났습니다.”

“또 쓸데없는 말 하시려고 하신다.”

평소 그 직원의 말을 잘 잘라먹는 백 비서가 또다시 퉁명스럽게 굴자, 재경이 고개를 저었다.

“해 보세요. 아이디어는 다다익선이니까.”

“훗. 오늘 새로운 에디터 면접 보잖아요. 그때 질문해 보면 어떨까요?”

“정보 누설을 하잔 겁니까? 우리 회사로 출근하게 될지, 아닐지 모르는 사람한테?”

백 비서가 사납게 묻자, 직원이 얼른 손을 내렸다. 분위기가 싸늘해지자, 재경이 못 말리겠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돌려서 물어보면 되죠.”

“네?”

“꼭 내 일이라고 밝힐 필요는 없잖아요? 돌려서 물으면 되는 일이니까. 해 봅시다.”

그렇게 면접 시간이 다가오자, 나타난 사람은 그녀도 아는 사람이었다.

“한서일보 김주혁 부장?”

백 비서가 먼저 알아보고 다가가자, 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경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전보다 더 여유롭게 보였다.

한서일보를 그만두었다는 말은 들었는데. 주혁이 재경의 회사로 이력서를 넣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백 비서였다.

*   *   *

면접을 보는 동안, 백 비서는 불안한 듯 슬쩍 스마트폰을 쥐었다가 놓았다. 괜히 이번 일을 도결에게 알렸다가 그 지랄맞은 성격에 당장 쫓아올까 봐 두려워졌다. 

게다가 자신은 지금 고도결 대표의 비서가 아니라 차 대표의 비서였다. 괜히 두 사람 사이를 이간질하면 곤란해졌다.

“후.”

머리를 쥐어짜는 백 비서를 보고 직원이 고개를 기울였다.

“저분 아는 사이세요?”

“…아니요.”

“근데 왜 표정은 아닌 것 같죠? 마치 현재 애인의 전 남친을 보는 듯한 눈빛인데.”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회사에서 하는 겁니까? 격 떨어지게.”

“하, 참. 제 눈엔 지금 면접 보는 차 대표님 주변에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서성거리는 백 비서님이 더 격 떨어져 보이거든요?”

그렇게 휙 지나가는 직원을 본 백 비서가 한숨을 쉬었다. 도결이 그간 김주혁 부장을 얼마나 경계했었는지 생각하면, 이러는 게 당연했다. 정작 재경은 아무 뜻이 없을 테지만.

‘이러다 저 인간이 회사에 입사라도 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눈을 끔뻑이던 백 비서가 빠르게 도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대표님, 저 백 비서입니다. 지금 어디 계십니까?”

[회사입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도결의 물음에 백 비서가 머뭇거렸다. 슬쩍 눈으로 재경의 표정을 살폈다. 옅은 미소를 띠고 있는 재경은 주혁에게 악의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감정이 남아 있으면 어쩌나 싶어서 백 비서의 심장이 다 떨렸다.

“저… 그게.”

[바쁜 일 아니면, 오후에 통화해도 되겠습니까? 곧 회의가 있어서요.]

“예. 별일은 아닙니다. 지금 김주혁 부장, 아니 김주혁 씨가 회사에 면접 보러 온 것뿐이니까요.”

백 비서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그다음에 일어날 일을 차마 예상 못 하고.

*   *   *

10분 후에 회의가 있다던 도결은 잠시 뒤 재경의 작은 사무실에 나타났다. 그러곤 커다란 키로 재경의 옆에 서서 가만히 주혁을 응시하고 있었다. 주혁은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또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양심이 없는 겁니까? 없는 척하는 겁니까?”

도결이 서늘하게 주혁의 손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제게 꽃을 꺾어 주며 협박 아닌 협박을 하던 녀석이 다시 또 재경에게 달라붙으니,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결의 활활 타오르는 눈을 보면서 재경이 이마를 짚었다.

“도결 씨, 여기 내 직장인데요.”

살짝 경고를 담은 말을 뱉은 재경이었다. 그러나 그가 평소와는 달랐다. 그녀가 경고하기도 전에 금방 물러서던 도결이 오늘은 어쩐 일인지 물러서지 않았다.

“도결 씨?”

“이 인간은 여기 두면서, 왜 나는 안 되는 겁니까?”

그가 서운함을 숨기지 않고 묻는 바람에 재경은 할 말을 잃고 입을 벌렸다. 이 일은 재경 대신 백 비서가 대신 해명했다.

“김주혁 씨는 이력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럼 나도 하나 보내죠. 이력서.”

백 비서는 가만히 도결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다가 경악했다.

“지금 면접을 보시겠다고요?”

“못 할 것도 없죠.”

그가 주혁의 옆으로 가서 털썩 앉자, 재경이 눈을 질끈 감았다. 질투가 없는 순한 남자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까 전부 연기였던 모양이었다. 

뜨겁게 타오르는 도결의 눈빛을 보면서 재경은 차마 나가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좋아요. 그럼. 마음대로 하세요.”

재경이 떨떠름하게 대답하자, 주혁이 싱글벙글 웃으며 약 올리듯 도결을 돌아보았다.

“차 대표님. 이 친구한테는 같은 질문 안 하시나요?”

“…….”

그녀가 말을 하지 않자, 도결의 눈썹이 매섭게 올라갔다. 자신을 차별하지 말라는 듯한 경고에 재경이 헛웃음을 보였다.

“이미 끝난 질문이고….”

“둘 중 한 사람이 붙는 자리인데. 왜 제겐 기회를 안 주십니까? 차 대표님.”

재경은 그의 시기 어린 질투에 못 이겨 한숨을 쉬었다. 그 옆에 있던 직원은 순순히 재경이 끝내 말하지 못한 질문을 대신 해 주었다.

“저희 대표님이 곧 재혼하실 예정인데. 어떻게 소식을 전하면 가장 이목을 끌고 사랑스러울 수 있을지를 물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재경이 당황해서 이 말을 꺼낸 직원을 보자, 백 비서가 활짝 미소를 보였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의견이 맞아떨어졌는데, 재경은 수치심에 얼굴이 뜨겁게 달궈졌다.

도결은 피식 웃는 듯하더니 능청스럽게 고민하는 시늉을 했다.

“대답을 못 하시는 것 같은데. 탈락 아닌가요?”

못마땅하다는 듯 주혁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물었다. 그러자 도결이 찌릿 주혁을 노려보는가 싶더니 재경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인터뷰하는 건 어때요?”

“에세이가 아니라, 인터뷰요?”

모두가 당황하자 도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날짜는 크리스마스가 좋겠네요. 장소는 우리 호텔 레스토랑. 그때 마셨던 와인은 빼고.”

*   *   *

12월 25일.

재경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도결을 보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그땐 사람들이 가득했었는데. 오늘은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까, 당시에 도결이 다음번엔 크리스마스를 피하자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작년 크리스마스엔 여기 싫다고 하지 않았어요?”

“번잡해서 싫었던 것도 같고.”

“그러고 보니까, 왜 이렇게 조용해요? 무섭게.”

“이 시간엔 사람들을 받지 말라고 했어요. 브레이크타임.”

도결의 말에 재경이 미간을 구겼다.

“그럼 우리는요?”

“우린 신메뉴를 시식하는 관계자?”

그가 피식 웃으며 재경에게 냅킨을 건넸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어서 눈이 절로 가늘어졌다.

“인터뷰할 내용은 잘 준비해 왔어요?”

“그럼요.”

늘 그렇듯 녹음기와 메모지를 꺼내는 재경이었다. 도결은 자신을 인터뷰하려고 앉은 재경을 보면서 자꾸만 실실 웃었다.

“먼저 줄 게 있어요. 눈 감아 봐요.”

도결의 말에 재경은 의아한 기색으로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빤히 인기척이 느껴지는데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눈을 감고 있는 게 부끄러워지는 재경이었다.

“눈 떠 봐요.”

뺨이 붉어진 재경이 눈을 뜨자, 그녀 앞에는 말린 꽃으로 만들어진 책갈피가 놓여 있었다. 재경은 의아한 눈으로 책갈피를 잡고 고개를 기울였다.

“이게 뭐예요? 도결 씨가 만들었어요?”

“전에 김주혁 씨가 찾아왔었어요. 당신을 놓아주라고.”

“으응? 그런 일이 있었어요? 선배도 참.”

재경이 미간을 구기며 대답하자, 도결이 가만히 재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도결은 꺾인 꽃을 쥐고 사무실에 돌아가던 순간을 잊지 못했다. 자신이 재경을 놓아주지 않으면, 그녀의 삶이 송두리째 망가져 버릴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사랑하는 사람을 아프게 만들 순 없었으니까.

“그나저나 이런 꽃도 있었어요?”

“화단의 꽃을 꺾으면 꽃이 시들어 버리니까. 당신을 꺾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겠죠. 각자 사는 곳이 다르니까.”

재경이 긍정하자, 도결이 책갈피를 보면서 웃었다.

“그래서 만들었어요. 더 소중하게 대해야 한다는 걸 매일 상기하려고.”

“네?”

“당신이 영원히 행복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달칵.

순식간에 불이 꺼졌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서울의 야경만이 빛났다. 마치 우주에 온 듯한 착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나랑 결혼해 줄래요?”

그의 물음과 동시에 두 사람이 앉은 자리에만 빛이 들어왔다. 하얀 눈사람이 쥐고 있는 핑크색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니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재경 씨는 처음부터 내게 특별했어요. 작년 크리스마스에도 당신만 보였거든요. 내가 재경 씨의 일상을 전부 특별한 날로 만들어 줄 순 없겠지만, 적어도 당신이 내게 가장 특별하다는 건 느낄 수 있도록 할게요.” 

그녀를 바라보는 도결의 눈빛은 방금 보았던 도심의 빛보다 훨씬 더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도결의 눈동자에 비친 자기 자신의 모습이 정말 특별하게 보였다. 

그에게도 전해지길 바랐다. 차재경이 얼마나 많이 고도결을 사랑하고 있는지.

“나도 약속할게요.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고도결 씨와 함께하겠다고.”

<그를 인터뷰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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