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수술실 앞에서 고 회장은 재경과 나란히 앉았다. 강철 같았던 고 회장도 비난을 감당하는 게 어려웠다고 고백하며 운을 띄웠다.
고 회장 역시 어린 시절에 도결처럼 줄곧 후계자로만 자라 왔다고 밝혔다.
재벌로 태어나면 다이아몬드 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것이라고 농담하는 것은 종종 들었지만. 그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노력이 요구된다는 점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나 역시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내 아들도 그렇게 살길 바란 것이지.”
누가 들어도 후회하는 목소리였다. 재경은 분위기를 조금 더 밝게 해 보고자 애써 웃음을 보였다.
“요즘 말로 ‘라떼는’이네요?”
“허, 참.”
재경은 물끄러미 고 회장을 바라보다가 이내 자신이 알게 된 사실을 알려 주기로 마음먹었다. 실은 방법이 좀 억지스러웠던 거지, 그의 부친이 도결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아버님 예상이 맞으세요.”
“무슨 뜻이야?”
놀라며 묻는 고 회장을 보면서 재경이 눈을 깜빡였다.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놀란 건진 알 수 없었지만, 일부러 질문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추측되는 건 두 가지였는데, 갑자기 아버님이라고 한 부분에 당황한 걸 수도 있고, 예상이란 단어를 예측 못 해서 어리둥절한 건지도 몰랐다.
하여튼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어머님도 도결 씨가 일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하셨거든요. 아마 제가 아니었더라면, 아버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정해진 길을 갔을 거예요. 도결 씨는.”
그렇게 말하는 재경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그게 좀 신경 쓰였는지. 고 회장이 애써 말을 돌렸다.
“흥. 그러면서 매번 나만 못된 사람을 만들었지.”
“삶은 늘 선택의 연속이잖아요. 도결 씨에게도 직접 고민하고 선택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흐음. 녀석도 그렇게 말한 게냐?”
“아니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셨으면 좋겠어요. 도결 씨가 스스로 선택할 때까지만요. 아마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재경의 말에 고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지난번에는 미안했다.”
사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사과를 내뱉는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선뜻 괜찮단 말이 나오진 않았다. 역시 사과를 받았다고 해서 스마트폰 속에 깔린 앱을 지우듯이 감정이 깔끔하게 지워지는 건 아닌 듯했다.
“감사해요. 먼저 손 내밀어 주셔서.”
재경은 괜찮다는 말을 대신해서 고 회장이 내민 화해를 고맙다고 표현했다.
“이제 늙은이는 참견하지 않을 테니까. 젊은 너희가 잘 선택하길 바라마.”
“네. 좀 더 분발해 볼게요.”
그렇게 화해를 마치자, 수술실에서 지친 의사가 나왔다. 두 사람을 향해 다가온 의사는 수술이 잘 끝났고, 회복이 끝나면 병실로 이동할 수 있다는 말을 전하며 떠났다.
* * *
정화의 수술이 무사히 끝나고 나서 느지막한 시간에 도결이 나타났다.
“백수 녀석이 빨리도 온다. 쯧.”
고 회장은 괜히 심통을 부렸고, 정화는 말을 하지 못해서 인상을 찡그린 표정으로 고 회장을 살짝 노려보았다.
“죄송합니다. 처리할 일이 있어서요.”
그의 말에 정화의 눈빛이 반짝였지만, 고 회장은 평소 자신의 부인을 잘 알고 있었기에 도결의 말을 잘라 버렸다.
“크흠. 차 대표가 고생이 많았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구나.”
고 회장의 말에 도결의 시선이 곧장 재경에게로 돌아왔다.
“힘들면 좀 들어가서 쉬지 그랬어요.”
“에이. 아버님이 오해하신 거예요. 급한 일은 잘 해결했어요?”
그러자 도결이 고개를 끄떡였다. 며칠 전 도결은 정화의 수술 날짜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했었다.
정화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간 정화의 자리를 노렸던 강 이사가 주주총회를 열었다는 소식이었다.
“일하고 바로 온 것 같은데. 도결 씨야말로 좀 쉬는 게 어때요?”
나름대로 일을 잘 해결하고 온 듯했지만, 녹초가 된 그를 바라보는 게 영 불편한 재경이었다.
“계속 재경 씨가 있었잖아요. 난 괜찮으니까, 재경 씨가 집에 다녀와요.”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면서 고 회장이 헛기침했다.
“크흠. 내가 있을 테니까 둘 다 그만 들어가 봐라.”
“회장님이요?”
도결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묻자, 고 회장이 눈을 크게 떴다.
“뭐? 너는 되고 나는 안 될 이유가 따로 있냐?”
“물론이죠. 심신에 안정이 필요하신 상태인데. 어떻게 회장님을 두고 갑니까?”
그의 차가운 반응에 재경이 서둘러 손을 잡았다. 말이나 행동이 쌀쌀맞아서 걱정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부부 사이에 낄 필요는 없었다.
“도결 씨, 피곤하니까. 그만 돌아가요. 우리.”
정화도 괜찮다는 듯 조용히 손짓했다.
* * *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그가 재경의 얼굴을 살폈다. 병실에 간호사들이 자주 찾아왔고, 전문 간병인도 있어서 많이 힘든 건 없었다. 게다가 수술 전까지 정화는 쌩쌩했기 때문에 재미있게 떠들며 웃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정화가 수술실에 간 뒤로 계속 마음이 불안해졌다. 이제 막 한 가족이 될 것 같았는데 정화가 떠나 버리면 어쩌나 하고 불안하고 무서웠다.
“미안해요. 재경 씨 일로도 바빴을 텐데.”
도결은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이었다. 호텔이 불안정한 상태가 아니었더라면, 그가 나서서 간병을 했을 게 분명했다. 물론 쌀쌀맞은 그를 옆에 둬야 하는 정화가 도리어 불편하다고 난리를 쳤겠지만.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재경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런 소리 들으려고 한 일 아니거든요. 덕분에 어머님 인터뷰도 했고요. 시작부터 대박이 나더니 어머님 인터뷰로 정점을 찍었어요.”
실은 한은화 차장을 다음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정화의 인터뷰 덕분에 호응은 더 엄청났다.
“그래도 고마워요. 나 대신 어머니 곁에 있어 줘서.”
외동이어서 한 번도 불편한 적 없었던 도결이었다. 그런 도결에게 이번 일은 거대한 충격과 마찬가지였다. 만약 그에게 재경이 없었다면, 이번 일은 크게 상처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자신은 아픈 어머니의 말을 거역하지 못했을 터였다. 이번처럼 일을 선택했을 테고, 아픈 정화를 홀로 두었을 게 뻔했다.
자신의 빈자리를 재경이 채워 주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사하고 미안해서 어떻게 보상해야 할지 몰라 애가 탔다.
“그런 의미도 아니었어요. 고맙다, 미안하다 소리 들으려고 한 일이 아니었다고요.”
“그럼요? 내가 걱정할까 봐, 걱정했어요?”
그는 사랑을 확인하고 싶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재경은 한참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애가 탔어요.”
재경의 대답은 조금 장난스러웠던 도결의 가벼운 질문과 달리 묵직하고 강인했다. 도결은 할 말을 잃고 재경을 가만히 응시했다.
“어머님은 처음부터 내게 참 잘해 주셨거든요.”
“그래요? 나한테는 늘 차가운 분이라서 잘 모르겠는데.”
아픈 모친의 이야기가 나오자, 도결이 입을 닫았다. 수술이 잘 끝났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재경은 슬쩍 도결에게 제 잡지를 내밀었다.
“제본도 했어요?”
“네. 제가 아니라. 아버님이요.”
움찔하는 그를 보면서 재경이 쿡 그의 뺨을 눌렀다. 당황한 그가 어색하게 미소를 짓자, 재경이 얼른 읽어 보라고 고개를 들었다.
정화의 인터뷰 내용이 담백하게 담겨 있었지만, 그 안에는 그녀가 어머니로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해 왔는지 느껴졌다. 물론 부인으로서 고 회장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알 수 있었고.
“재경 씨는 정말 천직이네요.”
“네?”
생각과 다른 말을 꺼낸 도결 때문에 놀란 재경이 눈을 끔뻑였다. 어떤 부분에서 천직이라고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어서 애매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그를 보았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간 쇼윈도 부부였던 부모님이 오늘 처음으로 진짜 부부처럼 보였거든요.”
“두 분도 예전의 도결 씨랑 마찬가지였잖아요. 이미 정해진 길이 있어서 삶에서 가장 중대한 일을 스스로 선택 못 하셨으니까요. 아마 그래서 서로의 진심을 찾는 게 더 어려웠던 것 같아요.”
재경은 위로의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제가 들은 말을 잔잔히 그에게 전할 뿐이었다.
인터뷰라는 것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 주는 일이었다. 공감하기도 하고, 이해하기도 하고, 때론 의아하기도 한 일이었다.
“물론 내 천직을 알아봐 준 건 고도결 씨고요.”
“이해할 수 없었던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가 종이를 꽉 쥐고 나지막하게 고백을 했다. 재경도 고개를 까딱이며 웃었다.
“근데 아버님이 아까 저더러 뭐라고 하신 줄 아세요?”
“…또 상처가 될 말을 하셨어요?”
“아니요. 그 반대예요.”
상기된 표정으로 재경이 자랑스레 웃자, 도결이 의아하다는 듯 웃었다.
“무슨 말이었어요?”
“제가 어머님을 닮았대요.”
즐겁게 대답하는 재경을 보면서 도결이 몸을 움찔했다. 그러고는 이내 얼굴을 가리더니, 몸을 들썩이며 웃었다.
“그렇게 웃겨요?”
“아니요. 말도 안 되는 소리라서 웃은 거예요.”
“왜 말이 안 돼요? 물론 어머님이 조금 더 우아하시고 기품이 있고 사회적 지위가 더 높긴 하지만 내가 미래에 어머님만큼 멋있어질 수도 있는데….”
재경의 말에 도결이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런 게 아니라.”
“아니면요?”
속상한 눈빛으로 재경이 그를 올려다보자, 도결이 사랑스러운 눈으로 손을 들어 재경의 뺨을 부드럽게 만졌다.
“재경 씨는 소통에 능하잖아요. 저희 어머님은 아버지만큼 차가운 분이세요. 말씀을 잘 안 하신다고요.”
누가 보아도 그의 모친이 훨씬 더 멋있는데. 그는 재경이 세상에서 제일 멋지다는 듯 대답했다. 재경은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다정한 눈빛을 바라보며 웃었다.
“고도결 씨는 내가 그렇게 좋아요?”
“네, 좋아요. 좋아서 미칠 것 같아.”
그 순간 재경은 생각도 못 한 말을 제 입으로 불쑥 꺼내고 말았다.
“우리 재혼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