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재경은 자신의 인터뷰를 위해 도결이 있는 호텔을 찾아갔다.
도결은 현재 정식으로 대표직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위임을 받고 정화 대신 일을 도맡아서 하고 있었다. 솔직히 그가 잘하고 있는지 걱정이 되었는데, 재경은 막상 일하는 도결을 보고 나니 눈 녹듯이 걱정들이 사라졌다.
집중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신중해 보였다. 예전 일할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가 책을 펴고 공부하는 모습이었다. 호텔 쪽은 처음이라서 배워야 할 게 많아 보였다.
“도결 씨?”
준비해 온 도시락을 내려놓으며 재경이 그를 불렀다. 화들짝 놀란 도결이 재경을 보고선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바로 일어나지 않고 눈을 비볐다.
“나 안 반가워요?”
그녀가 서운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묻자, 도결이 머뭇거렸다.
“그게 아니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재경을 꽉 끌어안았다. 터질 것처럼 끌어안는 그를 밀어낸 재경이 왜 그러냐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오늘따라 다른 사람 같네. 무슨 일 있었어요?”
“보고 싶어서, 헛것이 보이는 줄 알았어요.”
“하. 싱겁긴.”
재경은 서둘러 도시락 뚜껑을 열면서 도결의 식사를 준비했다. 그는 복잡한 서류를 몇 개 집어 들더니 자리에 앉았다. 도결은 한 손으로는 서류를 읽고, 다른 손으로는 식사를 했다.
재경은 그런 도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봄날에 만개하는 꽃처럼 웃는 재경 때문에 그가 결국 손에서 서류를 내려놓았다.
“재경 씨가 그렇게 웃으면 반칙 아닙니까?”
“반칙이요? 반칙은 식사할 때 일하는 도결 씨죠. 내가 무슨 장승도 아니고.”
“서운했으면, 미안해요. 내가 아직 이 일에 서툴러서.”
그가 당황한 표정으로 재경에게 낑낑댔다. 그 모습이 재밌어서 더 놀려 줄까 하다가 그냥 마음 편하게 식사할 수 있도록 고개를 저었다.
“실은 도결 씨가 어떤가 해서 왔어요.”
“걱정해 주는 애인이 있는 기분은 이런 건가 봐요. 좋지 않은 상황인데 묘하게 설레네요.”
“어머님 수술은 이번 주에 한대요.”
“보고받았어요. 그날은 병원으로 갈게요.”
도결의 말에 재경이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오늘 온 건 내 일 때문에 왔어요.”
그가 예상치 못한 말이라는 듯 재경을 빤히 바라보았다. 조마조마한 그의 눈빛을 보면서 재경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당신 일이기도 하고요.”
“…헤어지자는 말이면.”
“그런 말 아니거든요?”
재경이 핀잔하며 그를 보자, 그가 환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무엇이든 다 말해 보라는 듯 열린 태도였다.
“말해 봐요. 무엇이든 다 들어 줄 준비가 된 것 같으니까.”
“지금 하는 일이 어떤지 궁금해서요.”
“정신없이 바쁘고 새로운 업무가 신선하게 느껴져요.”
“기분은요?”
슬쩍 물은 재경의 목소리에 도결이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까지 일에 파묻혀 있어서 기분을 느끼지 못했는데.
“업무를 처리하는데, 기분까지 있어야 해요?”
너무 그다운 대답이라 재경은 말문이 막혔다. 도무지 그의 앞에만 서면 이성적인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재경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감정을 컨트롤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일할 때는 언제나 이성적인 태도를 고수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인터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를 낸다거나, 걱정이 앞선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자면, 전부 다 버리고 나왔는데 다시 돌아가게 된 거잖아요. 이 모습이 절대 싫다는 건 아니고. 나는 그냥 도결 씨가 일할 때 좋은지를 묻는 거예요.”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그가 얼마나 일을 사랑하고 있는지 빤히 보였으니까. 그렇지만, 그가 스스로 깨닫길 바랐다.
자신이 부모님의 강요나 희생으로 일을 한다고 믿는 것과 스스로 선택해서 일을 즐기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이니까.
“…그게 왜 궁금해요?”
도결의 차가운 물음에 재경이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기분까지 덤으로 얹혀서 그의 일상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솔직하게 말해 줘요. 지금 왜 내 기분이 궁금한 건지.”
눈을 꽉 감은 재경이 소리치듯 그에게 대답했다.
“당신이 나 때문에 몰락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요!”
당황한 그가 고개를 저으며 몰락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지만, 재경은 그의 말에 반대했다.
“하산 아니고 몰락이 맞아요. 도결 씨는 스스로 내려온 게 아니라, 나 때문에 좋아하는 걸 포기한 거니까.”
서글픈 재경의 눈을 보면서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식으로 제 속을 들킨 게 부끄러웠다. 재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있는 도결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다시 돌아가도 괜찮아요. 이번엔 당신의 의지로 올라섰으니까. 이전처럼 불안하진 않을 거예요. 이건 내가 확신해.”
그가 가만히 재경의 손을 잡았다. 고맙다는 말을 손끝으로 대신하는 듯했다. 서로의 온기를 온전히 나누는 것도 꽤 오랜만이었다.
* * *
다음 날 재경은 도결의 허락을 맡고 인터뷰를 준비해서 병실에 갔다. 정화는 제 생각이 맞았다는 사실에 무척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내가 하루는 꾀를 냈지. 모든 고객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호텔의 일이지만 직원들이 다치도록 해서는 안 되니까. 위급한 상황에선 좋은 와인을 가지고 오겠다고 하라고.”
인터뷰하는 내내 정화는 즐거워 보였다. 지금까지 자신이 한 일 중 가장 잘한 것은 자신의 일을 포기하지 않은 점이라고 했다.
물론 생트집도 잡히고 욕도 많이 먹었으며, 때때로 아이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었다는 것도 숨김없이 밝혔다.
특히 도결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할 때면 눈시울이 유난히 붉어지고는 했다. 재경은 그런 정화의 인간적인 모습들이 좋았다.
김 대표님으로 우아하게 재경을 맞이했던 모습보단, 자신의 손을 잡고 평범한 일상을 이야기하며 웃는 정화의 모습이 더 가슴에 와닿았다.
“저도 나중에 어머님처럼 되고 싶어요.”
갑작스러운 재경의 말에 정화가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도결이랑 싸우는 거 아니니?”
“네에?”
“그 녀석이 날 좀 싫어했니. 얼마나 차가운지. 운동회 가서 말도 못 붙여 보고 왔었다니까.”
“운동회요?”
정화는 그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매번 시간에 늦어 아들의 미움을 사기 일쑤였지만 나름대로 잊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왔다고….
“차라리 그때 솔직히 밝혀 보시지 그러셨어요.”
“어디 감정 호소가 먹히는 애여야지. 어릴 때부터 저렇게 인간미 없이 딱딱했어. 나는 가끔 내가 AI 로봇을 낳은 거면 어쩌나 걱정했을 정도야.”
두 여자가 깔깔거리고 웃었지만, 백 비서는 웃지 않았다. 그녀들만큼 그와 가까이 지냈던 백 비서가 무심한 표정으로 있자, 재경이 고개를 기울였다.
“백 비서님은 어땠어요? 고도결 씨?”
상하 관계처럼 보이지만, 하는 태도는 친한 친구 사이처럼 구는 두 사람이었다. 백 비서는 좀 다르게 생각하나 싶어서 물었더니.
“연애하실 때도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거리시더라고요. 참, 아이큐만 높으신 분이시죠.”
그렇게 병실 안은 깔깔거리는 소리로 화목해졌다.
* * *
정화의 인터뷰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재벌가에 입성한 사모님은 평범한 주부들과 다르게 살 줄 알았는데, 그 환상을 와장창 깨 버린 이야기니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정화는 요리와 청소, 운전하지 않아도 되는 점은 유일하게 남들보다 큰 혜택이었다고 했다. 이외에 생각보다 소소한 정화의 삶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이딴 인터뷰는 왜 한 거야?”
잡지를 프린트해서 제본까지 떠 온 고 회장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옷을 정리하던 재경이 물끄러미 고 회장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너희 어머니는 어디 가고 혼자야?”
죽어도 재경을 인정하지 않을 것처럼 굴던 고 회장이 재경에게 정화를 ‘너희 어머니’라 호칭했다. 당황한 재경이 머뭇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수술 중이세요. 짐 정리 좀 하라고 하셔서 하고 있었어요.”
“하. 미련하긴. 수술 끝난다고 바로 퇴원하는 줄 아는 모양이지?”
“아뇨. 제가 혼자서 수술실 앞을 지킬까 봐. 걱정하신 모양이에요. 짐 정리 끝나고 천천히 내려오라고 하셔서. 정리하고 있었어요.”
재경의 말에 고 회장이 미간을 구겼다. 수술 날짜를 따로 말하지 않았음에도 찾아온 걸 보면, 계속 보고를 받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려가자.”
“네?”
“너희 어머니가 혼자 있지 말라고 했다며. 짐은 싸서 뭐 해? 어차피 회복하는 동안 병실 생활해야 하는데. 같이 가서 있자고. 쯧.”
고 회장이 휙 나가 버리자, 병실에 우두커니 남은 재경이 눈을 깜빡였다.
* * *
수술실 앞에서 재경은 두 손을 깍지끼고 눈을 감았다. 평소에 종교가 없었지만, 어머님의 수술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너는 내가 밉지도 않으냐?”
고 회장의 물음에 재경이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네?”
“도결이 녀석과 연애하는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걸 내가 모르는 줄 알아?”
반박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에 가까우니까. 부친이 반대하는 걸 뻔히 아는데, 그를 더 곤혹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정작 도결은 거리낌 없었으나, 재경은 그가 가족들과 연을 끊게 되는 게 내키지 않았다.
“대답이 없는 걸 보니까, 사실인 모양이구나.”
“미워요. 제게 돈 가방을 던지신 그날부터 쭉 불편했어요.”
서운한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재경을 보면서 고 회장이 껄껄 웃었다. 다들 자신의 앞에서 감정을 숨기려고 난리인데, 재경은 지금까지 한 번도 고 회장 앞에서 감정을 숨긴 적 없었다. 그게 익숙하지 않아서, 재경이 더 껄끄러웠다.
“나도 네가 좀 불편했다. 내 아들과 어울리지 않아 보였거든.”
“…….”
“지금 생각해 보니까, 넌 김 대표를 많이 닮았어.”
정화를 닮았다고 말하는 고 회장의 말에 재경이 고개를 기울였다. 자신이 볼 땐 정화는 기품 있고 우아했다. 완벽하게 살아온 정화와 힘들게 버틴 자신이 어디가 닮았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김 대표도 유일하게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