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60)

<57화>

그날 밤.

재경은 은화를 인터뷰하는 일에 대해 고민했다. 백 비서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이 아니라, 설득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한서일보를 통해서 자신의 인터뷰를 실어도 되는 한은화가 회사를 나온 자신을 도와줄 이유는 단 한 개도 없었다.

“이젠 어떻게 하고 싶어요?”

“으음. 잘 모르겠어요.”

머리로는 한은화 차장이 해야 좋을 듯한데, 다른 한편으로는 망설여졌다.

‘인터뷰를 통해서 매번 날 변호하는 게 맞는 건지….’

어쨌든 은화가 요즘 인기 있는 인물인 건 확실하긴 했다. 뭐가 더 좋은 선택인지 생각하다 보면 더 나은 방법이 있을 듯한데 그 선택에 대한 해답이 아직 재경에겐 없었다.

“도결 씨야말로 어떻게 하고 싶어요?”

“…….”

어쨌든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재경과 달리 그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한 걸음도 내딛으려 하지 않았다. 

계속 모르는 척했지만, 도결의 패턴을 보면 그는 계속 손을 놓고 집에서 한량처럼 보낼 수 있는 성품이 아니었다.

“뭐, 고도결 씨는 늘 알아서 잘하겠지만, 그래도 걱정이 돼서요. 나 때문에 직장도 가족도 잃은 것 같아서 매번 마음이 쓰여요.”

“가족 구성원에서 제외된 건 아니니까, 잃은 건 직장뿐이네요.”

“아, 그러시구나.”

재경이 작게 웃자, 도결도 피식 웃어넘겼다.

“직업이 백수인 남자는 싫어요?”

그녀는 선뜻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도결은 재경의 침묵에서 자신을 걱정하는 그녀의 마음을 느꼈다. 찬찬히 그를 훑는 재경의 눈빛에는 따스함이 가득했다. 보통의 사람들은 백수를 직업으로 둔 남자를 좋아했던가? 

재경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그에게 대답을 떠넘겼다.

“어떨 것 같아요?”

장난스러운 그녀의 질문에 도결이 손을 뻗었다. 잘록한 그녀의 허리를 꽉 잡은 그의 팔뚝은 근육으로 단단했다. 

재경을 자신의 다리 위로 올려서 앉힌 그가 옅은 미소를 흘렸다. 마주 보는 자세로 허리가 잡힌 재경이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아등바등했으나, 그의 품 안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차재경.”

그의 나른한 목소리가 재경의 귓속을 통해 들어와, 가슴속에 와닿았다. 재경은 움찔거리며, 그의 속삭임에 홀린 듯 집중했다.

“당신이 원하면, 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럼, 나부터 좀 놓아줘요.”

아쉽다는 듯이 그의 손에 힘이 서서히 풀렸다. 재경이 그의 탄탄한 허벅지 위에서 내려오려고 몸을 기울였는데, 어느 틈에 그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가더니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와 버렸다.

“뭐 하는 거예요?”

놀란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 도결이 씩 웃었다.

“차재경 씨는요?”

“예?”

“내가 원하면, 그 무엇도 다 해 줄 수 있어요?”

그의 물음에 재경이 고개를 돌렸다. 은은한 조명과 운치 있는 창밖 그리고 그의 매혹적인 눈빛이 그가 묻는 물음을 전부 대신 이야기하고 있는 듯했다.

“물, 물론이죠.”

“나 지금 재경 씨랑 키스하고 싶어요.”

보드라운 재경의 입술이 그의 미소 진 입술을 느릿하게 덮었다가 떨어졌다. 그러자 뱀이 똬리를 튼 것처럼 재경의 허리를 꽉 잡고 있던 그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머리를 붙들었다. 

도결의 손에 재경이 꽉 붙들렸다. 그렇게 멀어지던 재경의 입술이 순식간에 도결에게 삼켜졌다.

얼마 뒤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재경은 그가 어떤 사람이어도 상관없음을 깨달았다. 도결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행복하길 바랐지만, 그건 그의 의지였다.

“도결 씨.”

재경은 그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사람 말고, 당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러나 그녀의 말은 입술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가 조금의 여지도 남기지 않고 재경의 온몸을 샅샅이 삼켜 버린 탓이었다.

“흐읏.”

서서히 경직된 몸이 부드럽게 풀리고 있었다. 서로를 받아들이면서 눈을 감은 그때였다.

쾅쾅쾅!

“큰일 났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들을 방해한 적 없던 집안 사용인이 문을 두드리며 요란스럽게 그들을 불렀다. 

도결이 아쉽다는 듯 재경에게 한 번 더 입을 맞춘 뒤 그녀를 풀어 주었다. 재경이 실크 잠옷을 정리하자, 그가 성큼성큼 문 앞으로 다가가 활짝 문을 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니까?”

“본, 본가에 계신 김 대표님이 쓰러지셨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진성병원으로 이동하셨는데.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달달 떠는 사용인을 보면서 재경이 빠르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   *   *

재경과 도결이 부랴부랴 병원에 도착하자, 정화는 꾸물거리며 침대 위에서 일어났다. 야윈 얼굴은 그녀가 제 몸을 얼마나 신경 쓰지 못하고 일했는지 짐작하게 했다.

“왔니?”

“일어나지 마세요. 의사 말로는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니까.”

도결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재경이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급하게 달려온 차 안에서 도결은 많이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아무리 사이가 어색하다고 해도 가족은 가족이었다. 재경은 그런 그의 인간적인 모습이 새롭게 보였다. 

도착하자마자 의사를 찾아가 병명을 물었는데, 정확한 것은 검사 중이지만 일단 안정을 취해야 한단 답변만 돌아왔다.

도결은 신경 쓰였던 건지, 정화가 일어나는 것을 먼저 막아섰다. 떨떠름한 정화의 표정을 살피며 재경이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도결 씨가 많이 놀라서 말이 좀 딱딱해졌나 봐요. 어머님이 좀 이해해 주세요.”

사랑스럽게 웃는 재경을 보면서 정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별일도 아닌데. 새벽에 번거롭게 했구나.”

“번거롭지 않았어요. 운전도 기사님이 해 주셨는걸요. 따뜻한 물이라도 드릴까요?”

재경은 서둘러 가방을 내려놓고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반면 도결은 뚝딱이며 자신의 모친 앞으로 가서 차갑게 물었다.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호텔 일로 좀 무리했더니. 빈혈이 좀 있었나 봐.”

“어디가 안 좋으셨어요?”

“그냥 머리가 좀 아픈 것뿐이야. 우리 나이에 흔한 일이지. 그나저나 내일 출근을 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이런 와중에도 회사 일을 먼저 생각하는 제 모친을 보면서 도결이 미간을 구겼다.

“병실에서까지 회사 일을 하시려고요? 그래야만 속이 후련하세요?”

“아니, 내가 뭐 큰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갑자기 왜 그렇게 화를 내?”

“진짜 저를 생각하신다면 일 걱정하지 말고 쉬세요. 좀. 이러는 모습 보면 불편합니다. 저.”

휙 나가 버리는 도결을 멍하니 바라보던 정화가 재경을 올려 보며 말했다.

“재경이 넌 바쁘니까, 집에 가서 쉬어. 이렇게 돌아다니다가 네 몸도 축난다.”

“그래도 어머님이 편찮으신데, 제가 어떻게 가요?”

“정 신경 쓰이면, 저 백수 녀석이나 두고 가든지.”

도결을 백수 취급하는 정화를 보면서 재경이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퉁명스럽게 해도 두 사람 모두 서로를 아끼고 있었다.

“그래도 저 매일 어머님 찾아와도 괜찮은 거죠?”

“매일은 무슨 내일 퇴원할 거야. 출근해야지.”

*   *   *

새벽까지 씩씩했던 어머님은 다음 날 오후 갑상선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다행인 건 생존율이 높은 시기라서 수술을 하면 괜찮을 거라는 의사의 말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정화가 회사에 출근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왜 매번 일에만 집착하세요.”

“솔직하게 말하면, 내가 없으면 뒤를 맡아 줄 사람이 아직 없어.”

“잠깐 자리 비운다고, 여태 가꿔 온 호텔이 한순간에 망하기라도 할까 봐요?”

도결이 질렸다는 듯 제 모친을 쏘아보자, 재경이 빠르게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환자인 어머님을 너무 몰아세우는 것 아니냐고 한 소리 하고 싶었지만, 지금 누구보다 속상할 걸 잘 알기 때문에 참아 냈다.

“도결 씨가 가 보는 건 어때요?”

재경의 한마디에 화색이 돈 건 정화였다.

“그게 좋겠다. 내가 수술하고 회복하는 동안에만, 네가 나 대신 일 좀 맡아.”

“제가요?”

그가 황당한 눈으로 모친을 보자, 정화가 두 손을 모았다.

“내가 이렇게 애원하마. 부디 강 이사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대응만이라도 좀 잘해 줘.”

“그래요. 어머님 걱정은 말아요. 나랑 백 비서님이랑 노력해 볼게요.”

재경은 서둘러 정화의 편에 섰다. 줄곧 그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은 기분이 들었던 탓에 마음이 불편했었다. 

그는 재경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나타났지만, 그녀는 그게 마냥 기쁘기만 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 때문에 망가지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도결이 한숨을 쉬고 그렇게 하겠다고 하자, 정화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고맙다. 도결아. 정말 고마워.”

*   *   *

“근데 재경이는 매번 백 비서랑 병실로 출근해도 괜찮은 거니?”

정화는 매번 백 비서와 함께 나타나는 재경을 두고 걱정했다. 백 비서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다음 잡지에 인터뷰할 분을 모셔야 하긴 하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 그래….”

백 비서의 말에 정화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눈을 크게 뜨며 자신을 가리켰다.

“그 인터뷰 할 분으로 나는 어때?”

환자복을 입은 정화를 보면서 재경이 경악했다.

“예? 어머님이요?”

“지금은 이렇게 환자복이나 입고 있지만. 나도 나름 알 만한 사람들은 알아주는 사람이야.”

“그렇지만, 호텔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건 싫어하셨잖아요?”

“그랬었지. 근데 도결이가 나 대신 일 하고 있을 때, 다음 대표는 ‘그 녀석이다’하고 점찍어 버리면 좋을 것 같아서.”

그 말에 재경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정화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내가 너무 무례하게 말했던 거니?”

“아뇨. 저는 좋죠. 특종인 셈인데. 문제는 도결 씨 의견을 들어 봐야 할 것 같아요.”

재경의 말에 정화가 씨익 웃어 보였다.

“아마, 물 만난 물고기처럼 좋아할 거야. 그 녀석한테 가혹하게 구는 남편을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한 건 그래서였거든.”

“도결 씨가 일을 좋아했어요?”

“응. 매일매일 눈이 반짝였어. 나중에는 너무 집착하면서 일에만 몰두하기 시작했지. 그때부터 서서히 감정을 잃고 업무만 보더라고. 그때 딱 네가 나타나 줘서 다행이다 싶었지.”

정화의 말에 힘을 실을 수 있었던 건 백 비서의 긍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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