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제 모친의 긴 한숨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는 도결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모친은 그에게 그다지 어머니의 역할을 많이 해 주지 못했다. 부친만큼 바빴기 때문에, 그의 어린 시절에 부모님은 줄곧 부재중이었다.
“그럼, 뭐라고 불러 드릴까요?”
차갑게 물은 도결은 이내 미간을 찡그렸다. 지금 와서 많은 것을 바꾸려고 하는 모친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이미 충분히 혼란스러운 상황인데, 모친까지 관계를 바꾸려고 하니 피곤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렇지만 상처받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모친을 바란 건 아니었다.
“나라고 모정이 없었겠니?”
“그래서요.”
마치 모친은 그에게서 어머니라고 불러 달라고 하는 듯했다.
‘어머니?’
한 번도 익숙하게 불러 본 적 없었던 말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부모님은 온전히 그를 위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회사와 사회에서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언제나 넘쳤다.
대외적인 자리에서 그의 부모님은 고도결의 부모님이 아닌 회장님이라든가 대표님이라든가 하는 호칭으로 불렸다.
“어머니란 호칭도 있고….”
“지금 와서 모정을 보여 주고 싶으신 겁니까?”
늦었다는 의미를 담은 도결의 말에 정화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실은 오래전부터 도결과의 관계를 바로잡고 싶었던 정화였다. 그러나 매번 고 회장이 도결의 앞을 가로막아서 기회를 얻기 힘들었다.
빈틈을 보이지 않는 도결은 남편이 바라는 이상적인 후계자로 자라나 있었다. 저를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아들에게 정화는 그 어떤 호소도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달라….’
남편에게 반항하고 있는 도결은 제 의지로 새로운 선택을 시작했다. 우습게도 스스로 나아가는 도결에게서 처음으로 엄마가 필요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번 계기로 정화는 제 아들과 조금 더 가까워질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너도 이젠 다 큰 성인이니까, 알 것 아니야. 선택에는 언제나 책임감이라는 의무가 따라오잖니. 나는 내 일을 선택하면서 단 한 번도 부끄럽지 않았어.”
“하시고 싶은 말이 어머니이길 포기했다는 건가요?”
“아니, 내가 널 낳은 순간부터 난 네 어머니였어.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건 변하지 않는 진실이잖니.”
정화는 지금까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 적 없었다. 스스로 선택해서 얻은 불행을 애꿎은 자식 탓하며 사는 것은 너무 멋이 없지 않은가. 불행하다면, 그건 전부 자신의 선택 때문이었다.
“물론 어릴 때부터 뭐든 척척 잘 해내는 널 보면서 은근히 손을 놓은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 그런데 오늘 보니까, 내 아들도 혼자 할 수 없는 게 있는 것 같고.”
“무슨 뜻이에요?”
“이제라도 어머니 노릇을 해 보겠단 거야. 널 지지하고 있다는 뜻이지.”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지금 와서 일부러 어머니 노릇 하실 필요 없으세요. 대표님 말씀처럼 제겐 언제나 어머니셨으니까.”
큰소리 없이 자신을 인정해 주는 도결을 보면서 당황한 정화가 주춤했다. 그 순간 도결이 짤막한 미소를 보였다.
“화가 나서 치졸하게 대표님이라고 불러 왔던 게 아니란 뜻이에요. 제겐 두 분이 똑같이 자랑스러워서 그렇게 부른 거예요. 어머니께서 어머니라는 호칭이 더 편하시면 앞으로는 어머니라고 부를게요.”
눈시울이 금방 붉어지는 모친을 보면서 덤덤한 표정으로 그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고맙구나.”
“…저도요.”
무엇이든 혼자서 해결하려고 애를 쓰는 재경을 통해서 깨달았다. 자신의 분노는 절대 타인에게서 해결할 수 없다는 걸.
후계자가 되기 위해 억압받았던 지난 삶도 결국 그의 선택이었다. 그걸 인정하고 내려놓은 뒤엔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가 재경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평생 모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게 분명했다.
이미 계획했던 그대로 정략혼인을 했을 테고, 평생 자신이 선택하지 못한 삶이 잘못되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 채로 감정이 메말라 갔을 테지.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갔을 게 뻔했다.
“앞으로 내가 널 위해 무엇을 해 주면 좋겠니?”
모친의 물음에 도결이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재경을 만난 지금은 예전과 완전히 달랐다. 모친의 선택을 존중할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의 미래를 위한 선택에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저 제 인생을 존중해 주시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앞으로도 남은 삶은 제가 스스로 선택할 생각이에요.”
재경의 사업이 자리를 잡은 뒤에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 생각이었다. 누군가의 후계자가 아닌, 스스로의 브랜드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 * *
한편 재경은 윤성을 인터뷰하는 중이었다.
“돌아가신 회장님과 난 사랑하는 사이였어요.”
죽은 회장과 사랑했던 사이라고 밝힌 윤성의 눈가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부인이 죽고 홀로 살아온 회장이 김윤성을 사랑했단 사실은 문제가 될 게 전혀 없었다.
그런데 왜 두 사람은 재혼하지 않았을까?
“묻고 싶은 게 많은 얼굴이네요.”
“이쪽으로는 전혀 생각해 본 적 없어서 좀 놀라긴 했어요.”
솔직한 재경의 대답에 윤성이 눈썹을 짤막하게 일렁였다. 재경은 어쩐지 자신과 윤성에게는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 연인 사이였나요?”
“으음.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니까. 벌써 20년은 더 흘렀네요.”
잔잔한 목소리로 윤성은 자신이 겪은 세상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알려 주었다. 의외로 사람들은 사랑이나 정의 따위에 관심이 없고, 오롯이 논리에 맞는 이익에만 관심을 보였다고 했다. 재경은 일부 그녀의 말이 맞다고 동의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한다고 밝혀도 믿어 주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죠.”
“그래서 그날도 그런 일을 겪으셨군요.”
“맞아요. 회장님이 날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사람들은 그게 사랑이 아니라고 왜곡했어요. 그때 알았죠. 내 사랑을 인정받기 위해선 내가 능력이 있어야 하는구나.”
“성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사랑이었단 건가요?”
“아니요. 사랑을 인정받고 싶어서 쓸데없는 곳에 집착해 왔다고 말하는 거예요.”
예상치 못한 대답해 놀란 재경이 눈을 끔뻑이자, 윤성이 무미건조하게 웃었다.
“회장님이 돌아가실 적에 그러더라고요. 그렇게 회장이 되고 싶으냐고. 자신은 무엇을 줘도 아깝지 않으니까. 저더러 가지라고요.”
씁쓸하게 말하는 윤성을 보면서 재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결국, 돌아가신 회장님께 사랑을 제대로 보여 주지 못해서 아쉬운 거죠?”
“맞아요. 그분은 내 사랑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셨어요. 내 잘난 자격지심 때문에 온전히 행복할 수 없었거든요.”
인터뷰가 끝난 뒤 재경은 선뜻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의 평화롭던 세상으로 거대한 암석 하나가 순식간에 충돌한 것만 같았다.
‘나 역시 그 사람에게 자격지심을 느끼고 있었던 건 아닐까.’
“개천에서 용이 되려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죠? 난 그냥 죽도록 일만 했어요. 내 모든 행복은 먼 미래에 있다는 자기 최면 같은 걸 걸고서. 그 사람과 동등해지면 그때 진짜 사랑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죠. 다시 생각해도 참 미련했네요.”
지금까지 재경도 윤성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자신이 그와 사랑하기 위해선 무언가를 일궈 내야만 한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도결에게 걸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고 오인했다.
* * *
재경은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서둘렀다. 도결이 있는 본가에 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조급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확실히 깨달았다. 그녀는 도결이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 역시 언제나 재경이 먼저인 사람이었다. 고 회장을 만나는 게 아직 껄끄러울 테니, 본가에 같이 갈 필요 없다고 못을 박을 만큼 그녀를 위했다.
그러나 재경은 두 사람의 만남을 솔직하게 밝히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피하고 도망치는 건 한 번으로 족했다. 이젠 똑바로 마주칠 생각이었다.
“오셨습니까? 작은 사모님.”
본가에 있는 사용인들은 전부 도결의 모친 쪽 사람들이었다. 정화가 재경을 며느리로 인정하고 있으니, 사용인들도 그녀에게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안녕하셨어요? 식사는 끝났나요?”
시간을 확인하며 묻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용인들이 그녀를 다이닝 룸으로 안내했다.
“그래서 앞으로도 그렇게 집 안에서만 처박혀 생활할 거냐?”
고 회장의 호통 소리는 살짝 먼 거리에서도 또렷하게 들렸다. 그러나 화난 고 회장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모님. 작은 사모님 오셨습니다.”
사용인의 목소리에 고 회장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재경이 슬쩍 모습을 보이자, 놀란 정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급하게 달려온 재경을 본 도결의 표정은 의외로 침착했다.
“오늘은 못 보는 줄 알았는데.”
반가워하는 정화의 목소리에 재경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재경을 못마땅하게 올려다본 고 회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기가 어디라고 나타나?”
“당신이야말로 어디다 소리를 질러요? 새아기 놀라게.”
“새아기? 이혼한 며느리가 언제부터 새아기가 된 거야?”
분위기가 매우 험악해졌다. 정화는 제 남편은 전혀 신경 쓰지 말라는 표정으로 재경을 달랬다.
“식사 전이면 앉아서 같이 먹자. 도결이 옆에 앉으면 어때?”
재경을 다정하게 대하는 정화를 보면서 고 회장이 미간을 구겼다. 속을 알 수 없다는 듯이 일부러 혀를 차도 소용없었다. 정화는 오랫동안 재경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결이 제 옆의 의자를 빼 주자, 재경이 조용히 가서 앉았다.
“일부러 올 필요 없었는데요.”
어른스럽지 못한 고 회장의 행동이 부끄러웠는지, 도결이 재경에게 민망하다는 듯 속삭였다. 재경은 머뭇거리다가 그에게 가까이 얼굴을 붙이며 말했다.
“혹시 내가 이 자리에 온 거 불편해요?”
“아니요. 난 괜찮은데. 재경 씨한테 부담될 것 같아서요.”
이 자리가 부담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렇다고 계속 피할 수는 없었다. 그래 봐야 서로에게 더 깊은 상처로 남을 테니까.
“크흠.”
도결과 재경이 속닥이는 모습을 보고 고 회장이 인기척을 냈다. 요즘은 도무지 자신이 알던 아들이 아닌 것만 같았다.
“회사에는 언제 돌아올 참이냐?”
“아직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조금 더 고민한 뒤에 말씀드릴게요.”
“두 사람 결혼식은?”
정화의 물음에 도결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연애부터 해 볼 생각이에요. 진지하게 만나면서 서로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려고 합니다.”
“충분히 살아 봐서 알지 않아?”
이런저런 일로 회사가 혼란스러울 때 한 번에 해결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아서 꺼낸 말이었다. 그러나 고 회장은 굳은 표정으로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었다.
“크흠. 난 두 눈에 흙이 들어가도 허락 못 한다.”
“그럼, 이혼해요. 당신 빼고 우리끼리 하면 되니까.”
그간 이혼의 ‘이’ 자도 꺼낸 적 없던 정화가 강하게 말하자, 고 회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를 갈았다.
“당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네. 죽어서도 반대를 하겠다는데. 무슨 뾰족한 수 있어요? 헤어지고 새 남편 구해서 식을 다시 올려야지.”
“미쳤어. 당신도 고도결 저놈도 전부 귀신에 홀린 게 분명해!”
화가 나서 소리 지른 고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성큼성큼 다이닝 룸을 빠져나갔다.
재경은 미안한 눈으로 정화를 바라보았다. 끝까지 제 편을 들어 주는 정화에게 고마워서 눈이 뜨거워졌다.
“난 항상 네 편이니까. 기죽을 것 없어, 재경아.”
정화의 온화한 목소리는 불안했던 재경의 마음을 사르륵 녹여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