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그렇게 한강에서 생긴 일은 까맣게 잊히고 있었다. 적어도 재경은 그랬다.
갑자기 울리는 스마트폰에 당황한 재경이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받아 버렸다.
[나 김윤성이에요. 얼마 전에 한강에서 봤는데. 기억하죠?]
윤성의 목소리를 들은 백 비서는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져서는 도결을 보았다. 도결이 무심하게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백 비서가 입을 손으로 빠르게 가렸다.
재경은 그런 백 비서의 행동이 불편해서 슬쩍 스피커폰을 꺼 버렸다.
“네. 기억합니다. 회장님.”
[듣자 하니까, 인터뷰도 좀 하는 것 같던데. 제 이야기를 써 보는 건 어때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란 재경이 눈을 끔뻑였다.
“인터뷰를 신문사가 아니라, 잡지사와 하겠단 말씀이세요?”
[재밌잖아요. 특이한 발상.]
어느 부분이 재미있는지 이해 못 한 재경은 가만히 고개만 끄떡였다. 굴러온 복을 제 발로 찰 이유는 없었다.
“제가 그쪽으로 갈까요?”
[아뇨. 회장이라는 자리가 보기보다 안전하지 않아서요. 제가 갈게요.]
“그럼, 주소와 이메일 주소는 전화 주신 번호로 문자 보내 드리겠습니다. 사전에 꼭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미리 메일로 보내 주세요.”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난 재경이 심호흡을 했다. 백 비서를 통해 공인을 섭외하려고 했지만, 쉽진 않았다.
대기업 비서일 때는 굽신거리던 임원들이 회사를 옮겼단 소리를 듣자마자 백 비서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도결의 힘을 빌릴까 했지만, 그건 어쩐지 고 회장의 잘난 권력을 이용하는 것 같아서 내키지 않았다.
“김윤성 씨라면, 얼마 전에 회장으로 임명되신 김윤성 회장님이시죠?”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달려드는 백 비서를 보고 재경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인연이 있으셨어요? 와. 이건 진짜 운명이다.”
“큰 인연이 있었던 건 아닌데. 전에 우리가 부부 사이일 때 갔던 파티에서 봤어요.”
재경의 이야기를 들은 백 비서는 금방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도 계속 김윤성이 회장을 맡을 거란 보장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다들 눈에 불을 켜고 그녀를 끌어내리려 했다. 윤성은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을 게 뻔했다.
“선뜻 인터뷰를 맡아도 될지는 모르겠네요. 이번 문제를 자칫 잘못 건드리면,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질 수도 있으니까요.”
백 비서의 말에 재경이 고개를 돌려 도결을 보았다. 가만히 책을 덮은 그가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건 백 비서의 말이 맞아요. 가만히 두고 볼 성격들이 아니니까.”
“혹시 그래서 제게 기회가 온 건 아닐까요?”
갑작스러운 재경의 물음에 도결이 허를 찔렸다는 듯이 눈빛이 흔들렸다. 백 비서 역시 지금까지 대기업에 있던 습관을 완전히 버리지 못해서 실수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 * *
재경은 도결의 집으로 찾아온 김윤성을 기쁘게 맞이했다. 도결은 본가를 간다고 나갔고, 백 비서도 늦은 시간이라 퇴근한 뒤였다. 집 안에 사용인들이 남아 있었지만, 다들 할 일이 있어서 서재까지 들어오진 않았다.
“한강에서 대충 눈치채긴 했는데. 역시 이혼한 건 아닌가 봐요?”
“아녜요. 이혼했어요.”
재경은 에세이에서 밝혔던 것 그대로 이혼한 상태였다. 살짝 놀란 윤성이 왜 아직도 이곳에 있느냐는 눈으로 재경을 보았다.
“글에서 밝혔었는데. 첫 단추부터 잘못된 만남이었거든요. 우린.”
이런 이야기를 누군가와 나누는 건 처음이었다. 인터뷰를 하는 것은 자신을 알아가는 일과도 같았다. 겉으론 상대를 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상대를 통해서 잊고 있던 자신의 이야기들을 덩달아 발견하고는 했다.
“나랑 회장님 같은 인연이었나 보네요.”
윤성이 흥미롭다는 듯 재경을 보았다. 어떤 인터뷰는 자신의 이야기를 먼저 꺼내야 할 때가 있었다.
타인의 아픔을 들을 준비를 하려면 먼저 아픔을 드러낼 용기가 필요한 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재경이 먼저 상처를 꺼내 보여야 할 차례였다.
“오랫동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을 위해서 제 인생을 희생한 것 같았죠.”
실은 그렇게 희생한 건 없었다. 그를 도왔던 건 사실이었지만, 재경 역시 나름대로 자신의 직업에 만족했고,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성취감과 보람도 꾸준히 느끼고 있었다. 그랬던 자신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던 건, 배신감 때문이었다.
“맞아요. 돌아오는 사랑이 없을 땐, 늘 그런 기분이 들죠.”
윤성이 씁쓸하게 대답하자, 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성의 비밀을 가늠할 수 없었지만, 지금 제 아픔이 윤성을 공감하게 만들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여자에게 프러포즈하는 것을 목격했는데. 세상이 무너질 것 같더라고요. 그때 제 곁에 있던 게 하필 고도결 씨였어요.”
“세상에.”
“짝사랑을 끊어 내고 싶어서, 고도결 씨를 이용했어요. 아주 치졸하고 옹졸한 생각이었죠.”
재경은 제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더는 부끄럽지 않았다.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면 죄를 지은 범인이 되어 평생 고개를 들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딱히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한 번 더 같은 실수를 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과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 먼저 생겼다.
“재밌네요. 흥미로워요. 그 잘난 고도결 부회장이 평범한 여자한테 이용당했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요?”
“그러니까요.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해요. 그때 도결 씨는 제가 우는 걸 봤거든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제 플러팅에 넘어와 줬어요.”
“그렇다면, 그건 차 대표가 한 플러팅이 아니에요. 상대가 먼저 차 대표 머리 꼭대기에 있었던 셈인 거죠.”
새로운 관점에 놀란 재경이 숨을 죽였다. 지금까지 그를 이용한 나쁜 여자가 자신이라고 생각했는데. 윤성의 말을 들어 보니, 쌍방 합의일지도 몰랐다.
“그게 그렇게 놀라워요? 매번 사람을 참 재미있게 해 주네요. 차 대표님은.”
“제가 김윤성 회장님의 인연인 모양이죠. 뭐.”
시원하게 웃는 재경을 보면서 윤성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예상했던 것과 달라서 좀 흥미로웠어요.”
“뭐 진짜 살인을 했냐, 안 했냐 하는 질문을 받을 줄 아셨나요?”
순한 표정으로 태평하게 웃으며 말했지만, 재경의 머리도 보통은 아니었다. 이미 신문사에서 오랜 시간 구를 만큼 굴렀던 사회인이었다.
인터뷰 전 김윤성 회장에 대해서 조사하는 건 당연했다. 허를 찌르고 들어오는 재경을 보고선 김 회장이 ‘허’ 하고 웃음소리를 냈다.
“그래요. 그런 질문을 들을 줄 알았어요.”
“그건 너무 아마추어 같은 생각이세요. 제 직업이 경찰도 아니고.”
“경찰 조사에선 무혐의로 끝났어요. 한 번만 더 신고하면 무고죄로 고소하겠다고 으름장까지 놨죠.”
윤성의 말에 재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그다지 놀랍거나 두렵진 않았다. 사회부에 있을 땐 이보다 더 힘들고 고통스러운 인터뷰들도 서슴없이 해 왔던 재경이었다.
“하고 싶은 만큼만 이야기하세요. 부담될 만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렇게 하고 싶어서 신문사를 나왔다. 재경은 계약 결혼 사실이 세상에 알려질 때, 자신의 존엄성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모두에게 알 권리가 있지만, 당사자에게는 자신을 보호해야 할 자기 본능이 있었다.
“나중에 나 때문에 크게 논란이 될 수도 있는데. 상관없어요?”
“네. 저는 김윤성 회장님이 인터뷰하고 싶다고 하실 때, 다른 쪽을 상상했어요.”
“다른 쪽?”
재경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김윤성은 다룰 만한 이야기가 많은 인물이었다.
권력 분쟁으로 그들만의 리그 안에선 그녀가 왜 회장이 되어야 했는가가 문제겠지만. 그것 외에도 김윤성은 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예를 들면 회장님은 개천에서 용이 난 케이스잖아요. 평범한 대한민국 회사원이 회장이 되기까지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만 담아도 충분히 재미있죠.”
“그게 이슈가 될 수 있을까요?”
김 회장의 말에 재경이 고개를 기울였다.
“대한민국 상위 몇 퍼센트의 인구가 경제를 쥐고 흔든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진실이 있어요.”
“진실이라….”
“그들은 대중이 될 수 없어요. 이것만큼은 진실이니까, 절 믿어도 괜찮아요.”
재경의 확고한 미소에 김윤성이 놀라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은 못 해 봤다. 다들 자신을 살인자로 오해하며 비난하기 바빴고 그 시선을 감당하는 것이 지독히도 곤혹스러웠다. 그런 윤성에게 재경의 시선은 참신하다 못해 희망찼다.
“그러니까, 대중이 관심 있는 이야기를 해서 그들의 입맛에 맞춰 보잔 거죠?”
“네. 유리 천장을 뚫고 올라선 것만으로도 이미 승리하신 거잖아요? 영웅담을 들려주세요. 세상 모두가 배가 아플 만큼 멋있는 영웅담 말이에요.”
그렇게 윤성은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었다. 재경은 윤성에게서 놀라운 이야기들을 들었고, 그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했다.
* * *
늦은 밤.
도결은 오랜만에 본가로 향했다. 혼자 나타난 도결을 보면서 그의 모친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던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재경과 함께 나타나는 줄 알고 기대를 한 모양이었지만, 도결은 애써 외면했다.
“같이 오지 그랬어. 요즘 어디를 가나 재경이 이야기뿐이던데.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이혼한 사이인데 가족 모임에 참석하라고 하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요.”
“그건 또 그렇네. 이렇게 다시 만날 거면서 왜 이혼까지 한 거야?”
“원래 그런 사람이에요. 매사 혼자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거든요.”
그의 말에 모친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래, 나도 그런 사람이니까. 딱히 할 말은 없어.”
“대표님도 혼자 해결하셨어요?”
“너도 이젠 그 대표님 소리 좀 그만할 수 없니?”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모친을 보자, 그녀가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