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60)

<53화>

“권준우 씨는 회사를 무척 아끼는 것 같았어요.”

“위에서 시킨 일은 아니고요?”

도결이 종일 권준우 이야기를 하는 재경이 얄미워서 일부러 차가운 소리를 내뱉었다. 

재경은 된장 깻잎장아찌를 한 장 들고선 미간을 구겼다. 잠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제 앞에 있는 도결이 얼마나 질투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바보처럼 또 권준우를 떠올리고 있었다.

“진짜 이럴 겁니까? 종일 인터뷰 이야기만 하고.”

그가 서운해하자, 재경이 민망한 듯 빠르게 깻잎을 입속에 쏙 넣었다. 입안에 있는 음식을 오물오물 씹을 때만 빼곤 계속 인터뷰 이야기를 하는 재경이었다.

“권준우 씨는 진심으로 회사를 아꼈을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퇴근 후에도 인터뷰 요청을 하러 다녔겠죠.”

그러자 도결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그녀를 보았다.

“이제 한서일보는 퇴사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네. 이번 인터뷰만 끝나면 퇴사할 거예요.”

머뭇거리는 재경을 보면서 그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다른 남자 이야기를 종일 하는 재경이 얄밉기는 했지만, 그래도 풀이 죽어 있는 모습을 보는 것보단 신이 나서 제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훨씬 더 보기 좋았다. 

즐거워서 반짝이는 재경의 눈망울을 바라보는 것이 이토록 기쁨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지금 보니까 더욱 확실해졌다. 도결의 세상은 오직 차재경이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은 있습니까?”

“그건 모르죠. 미래를 어떻게 장담해요.”

꼬리를 내리는 재경을 보면서 그가 미간을 구겼다.

“좋아서 죽겠단 얼굴로 종일 인터뷰 이야기만 하면서. 진짜 관둘 수 있겠어요?”

“생각해 볼 거예요.”

재경은 그의 말에 담담하게 반응했다. 생각했던 것처럼 고민하지 않는 재경을 보면서 그는 김이 샌 탄산음료처럼 미적지근해졌다.

“무슨 생각이요?”

“나도 돌아오는 길에 무진장 생각해 봤거든요. 근데 이게 좀 쉽지 않더라고요.”

“어떻게 복잡한데요?”

“더는 남의 상처를 후벼 파는 기자가 되고 싶지 않거든요.”

도결은 이번 일로 재경이 겪었을 고통을 떠올렸다. 항상 도마 위에 올라오는 건 공인이었다. 대중은 자신들이 모르는 개인의 이야기엔 딱히 관심 없기 때문이었다. 

좋은 이슈도 있지만, 좋지 않은 이슈들도 수두룩했다. 남들이 하는 걸 개인이 의지로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었고, 결국 회사 안에서 재경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들이 원하는 기사를 써야만 했다.

“그래서 결국 좋아하는 일을 포기하겠단 거예요?”

“근데 오늘 느낀 건 좀 다른 거였어요. 내가 진짜 좋아했던 건 기자라는 직업이 아니라, 인터뷰였던 것 같거든요.”

재경의 말에 도결이 고개를 까딱였다.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재경의 첫인상도 지금과 같았다. 인터뷰하는 내내 활기찼던 재경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잡지사를 시작해 보면 어때요?”

그의 제안에 놀란 재경이 토끼 눈을 떴다.

“사업을 하라고요? 취업이 아니라?”

“네.”

“에이, 내가 무슨 수로 그런 걸 해요. 너무 거창해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재경을 보면서 도결이 한숨을 쉬었다.

“나도 계속 백수로 있는 게 껄끄러워서 그래요. 투자하고 싶어요. 미래가 창창한 차 기자님한테.”

재경은 당혹스러움에 말문이 막혔지만, 나쁘지 않은 것 같단 생각도 들었다. 예전처럼 종이책만 보던 시절이라면, 1인 잡지사가 말도 안 될 일이었지만, 지금은 세상이 많이 바뀌었으니까. 해 볼 만하지 않을까 싶었다.

*   *   *

“첫 인터뷰 상대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투자를 받은 재경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백 비서를 고용하는 일이었다. 도결은 내심 서운해했지만, 재경은 백 비서만큼 가성비가 좋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만 봐도 그랬다. 백 비서는 가장 이성적이고 전략적인 사람이었다.

“그걸 누가 모릅니까?”

초를 치는 쪽은 언제나 도결이었다. 가만히 책을 읽는 것처럼 앉아 있다가 재경과 백 비서가 회의할 때면 슬쩍 끼어들고는 했다. 투자자를 쫓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재경과 백 비서는 그의 잔소리를 가만히 듣는 편이었다.

“생각나는 사람은 있어요?”

재경의 물음에 백 비서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결은 어쩐 일로 백 비서의 눈이 반짝이는 건지 궁금해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게 누굽니까?”

“차재경 대표님이요.”

“예? 저요?”

화들짝 놀란 그녀가 몸을 뒤로 한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인터뷰의 공식은 보통 공인인데. 자신은 마땅히 공인이라고 할 처지가 되지 못했다.

“누가 제 인터뷰를 보겠어요?”

그녀의 물음에 대답을 한 건 뜻밖에도 도결이었다.

“전에 써 보겠다고 했던 거 있잖아요. 그 왜, 나랑 이혼하면 쓰겠다고 했던 글.”

도결의 말에 재경이 관심을 보였다. 그때는 홧김에 재벌과 결혼하는 방법을 에세이로 쓰겠다고 했었는데. 

“진짜 재벌과 결혼한 썰로 에세이를 써도 괜찮아요?”

도결이 직접 그 말을 꺼낼 줄이야.

경악해야 할 사람은 도결인데, 반응하는 쪽은 백 비서였다. 놀라서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백 비서가 눈을 깜빡였다. 도결은 조용히 책으로 시선을 돌린 뒤에 대답했다.

“이번 사업에 진심이라서요.”

“아무리 그래도 고 회장님께서 싫어하실 텐데요.”

백 비서가 습관적으로 고 회장의 눈치를 보자, 도결이 찌릿 백 비서를 보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아, 나 차재경 대표님 비서였지. 참.’

자신의 위치를 다시 한번 파악한 백 비서가 상냥하게 웃었다.

“탁월한 선택 같습니다. 차 대표님. 먼저 주목을 받고 난 뒤에 인지도를 만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   *   *

한참 에세이를 준비하느라 바빴던 재경은 마지막 원고 교정을 끝내고 나서야 쉴 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도결과 공원으로 나와 산책하는 여유를 만끽하던 참이었다.

온라인으로 예약 판매를 시작한 잡지는 정말 불티나게 잘 팔렸다. 백 비서의 어마어마한 연봉을 다 해결하고도 몇 배로 남았으니, 실로 대박이었다.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됩니까, 차 대표님?”

도결은 정말 오랫동안 일을 하지 않고 쉬었다. 말이 쉬는 것이지 재경의 곁에서 여러 가지 도움을 주긴 했다. 

그래도 그가 다시 무언가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는 미련이었다.

“으음. 앞으로는 인터뷰를 좀 해 보고 싶은데요.”

“글쎄 가능할까.”

그가 편의점에 걸려 있는 종이 신문을 가리키며 웃었다.

“놀리지 말아요. 신문에 좀 났다고 뭐가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대중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이혼했다는 기사가 세상에 퍼졌음에도 그녀의 경험담은 불티가 나게 팔렸다. 

현실판 신데렐라인 셈이니까, 관심이 없을 수가 없었다. 물론 이번 이혼에 관한 이야기는 담지 않았다.

“2부는 이혼을 써 보면 어때요? 요즘 이혼율도 높으니까.”

이젠 전남편이자, 현재 애인인 그가 아무렇지 않게 이혼에 관하여 에세이를 써 보라고 제안했다. 그의 말처럼 하는 것이 대중들의 관심을 유지하는 게 맞긴 한데.

“내가 하고 싶은 건 이런 게 아니라는 거 알잖아요.”

재경은 그렇게 제 인생을 계속 팔아먹고 싶지 않았다.

“이젠 해명할 필요가 있지 않겠어요? 헤어진 전남편을 팔아서 먹고산다는 댓글도 있던데.”

그가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구기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재경도 본 댓글이었지만, 딱히 반박하고 싶을 만큼 재경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는 말이 아니었다.

“너무 오래 질질 끌고 싶지 않아요. 이번만큼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향해 나아가고 싶어요.”

어쨌든 이번 사업으로 사람들에게 자신과 도결의 이야기를 해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감사하긴 했다. 감사한 건 감사한 것이고, 이루고 싶은 일은 다른 것이니까.

“그럼 진짜 첫 인터뷰 대상에 대해서 고민해 볼 필요가 있겠네요.”

도결의 말에 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잡지가 그렇듯 재경이 준비한 잡지사도 한 달에 한 번씩 인터뷰를 담아서 전하고 있었다. 첫 달은 제 에세이였지만, 앞으로 인터뷰들은 타인의 인생을 담고 싶었다.

“어? 이게 누구야? 그때 그 아가씨 맞죠?”

조깅하던 여자가 갑자기 재경을 알은체하며 팔을 잡자, 도결이 차갑게 여자의 손목을 잡아서 뗐다. 여자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다.

“나 김윤성이에요. 기억하죠?”

먼저 알은척을 하는 여자를 보면서 재경이 머뭇거렸다.

“그때 그 이사님이시죠?”

재경의 질문에 윤성이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우,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회장님 소리가 익숙해진 모양이에요. 이사란 말이 되게 낯설게 느껴지네.”

“아, 뉴스에서 봤어요. 축하드려요. 지난번 파티에서 뵀었는데.”

회장의 친자식들을 밀치고 회장직까지 올라간 김윤성은 재경이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윤성은 그런 재경을 보면서 입꼬리를 올린 뒤 도결을 보았다.

“기억나요. 그때 도와줘서 고마웠어요. 안 그래도 찾아가 볼 생각이었는데.”

“저를요?”

윤성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재경이 의외라는 듯 눈을 끔뻑였다. 주머니를 뒤적이던 윤성이 탄식을 하더니 미안하단 눈으로 재경을 보았다.

“빌렸던 것 돌려주려고 늘 가지고 다녔었는데, 하필 또 없네요.”

도결이 무슨 일이냐는 듯 바라보자, 재경이 별일 아니었다는 듯 손을 저었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윤성이 두 사람을 향해 물었다.

“두 분 사이는 언론에서 들었던 것과 좀 다르네요? 이혼했다고 들었는데.”

“예?”

놀란 재경이 그의 눈치를 살피자 윤성이 괜찮다는 듯 여유롭게 웃었다.

“아, 그렇게 놀라면 내가 좀 미안해지잖아요. 저 요즘 기자들 따로 안 만나요. 틈만 나면 모함을 해서 피곤하거든요. 아차, 차 기자님은 예외로 해 드릴게요. 나 구해 준 은인이니까.”

윤성은 농담처럼 꺼낸 말이었지만, 재경은 계속해서 기자라고 믿게 두고 싶지 않았다. 허둥지둥 주머니에서 새로 만든 명함을 꺼내 윤성에게 내밀었다.

“아, 저 이제 기자 아니에요.”

“오호라. 요즘 유명하다는 그 1인 잡지사 대표님이셨구나. 이렇게 보니까, 더 반갑네요.”

“네. 반갑습니다.”

“이쪽으로 연락하면 차 대표를 다시 볼 수 있는 건가요?”

윤성의 물음에 재경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진짜 연락을 하려는 건가 싶어서 어리둥절한 눈이었다. 윤성은 싱겁게 웃으면서 명함을 주머니 안에 쏙 챙겼다.

“그럼 또 보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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