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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51/60)

<51화>

“이제 오직 차재경, 당신만이 내 세상 같아요.”

차분한 그의 목소리는 오늘따라 소프트아이스크림보다 더 달콤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도결이 재경의 마음을 멋대로 휘젓고 있었다.

‘흔들리지 말자, 차재경. 지금 흔들리면, 처음 한 실수를 반복하는 거야.’

분명 도결을 사랑하고 있지만, 그와의 재혼은 마음만 앞선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이미 전 국민 앞에서 가짜 결혼을 했다고 발표한 셈인데. 다 찢어진 색종이를 그럴듯하게 붙인다고 새것이 될 순 없는 법이었다.

“거짓말.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고도결 씨 세상이에요.”

“제가 어떻게 하면 믿어 줄래요?”

분명 식탁 앞에서 밥을 먹다가 할 말은 아닌데…. 

이상하게 도결이 하는 이 모든 것들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평범한 그녀의 본가에서 꺼낸 말임에도 어느 근사한 장소에서 하는 말만큼 신뢰감을 주고 있었다. 마치 일반 카메라와 필터를 씌운 카메라의 차이처럼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게 느껴진달까.

“가진 게 그렇게나 많으면서 아무것도 없는 내가 당신의 세상이라고요?”

재경은 누군가를 좋아할 때마다, 항상 초라하고 작아지는 기분을 느꼈다. 이건 좋아하는 상대가 책에 나오는 엄청난 위인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마음이었다. 

평범한 남자를 짝사랑할 때도 이랬던 자신이었으니까. 대한민국을 쥐고 흔들 수 있는 고도결이란 남자 앞에서는 더욱더 작아지는 게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우리가 같은 세상에서 살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

“지금 제게 필요한 건.”

그가 남들처럼 기회주의자이거나 이기적인 나쁜 남자였다면, 재경은 그를 조금 더 욕심낼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못된 남자를 벌주는 마음으로 조금 더 곁에 머물 수 있었을 텐데. 그러면 적어도 서로를 욕하면서 한평생 살아갈 수는 있었을 테니까. 

차마 그에게 고 회장을 설득하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가족인 고 회장을 버리고 자신에게 올 수 있느냐는 말은 더욱더 못 하겠고. 

도결은 모든 것을 다 갖춰 놓고 마음까지 따뜻하고 다정했다. 이토록 순수한 남자 곁에 조금 더 머무르겠다고 해도 괜찮은 걸까? 

“오직 당신뿐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가슴이 쿵쾅거린다. 주책맞게 뛰어서 그의 귀에도 들릴까 봐 조마조마해지는 재경이었다. 못 이기는 척 도결에게 안기고 싶은데, 그러면 안 될 것 같단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설마, 고도결 씨는 사랑만으로 모든 걸 다 이겨 낼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재경은 이성을 겨우 잡고 그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처음을 속였기 때문에 대중들은 두 번째 결혼을 진심으로 믿어 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것도 겁이 났다. 이미 한 번 끝난 사이니까. 추문이 전보다 더 심할지도 몰랐다.

“사람들이 왈가왈부하는 일을 일일이 신경 쓰고 살 수는 없어요.”

도결은 자신이 살아온 세상은 원래부터 완전히 인정받지 못하는 곳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재경이 살아온 세상은 적어도 노력하면 인정해 주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가 하는 말이 와닿지 않았다.

“나는요. 내 인생을 남에게 맡기고 싶지 않아요.”

“…….”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고 해서 내가 타인에게 휘둘려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세상 사람들이 내게 하는 욕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단 뜻이에요.”

누군가 재경에게 쓸데없는 아집이라고 욕을 해도 할 수 없었다. 재경은 자신의 진가를 이런 식으로 매도당하고 싶지 않았다. 

흔히 말하는, 팔자 한번 고치겠다고 돈 많은 남자를 물어서 결혼했다는 싸구려 소문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단 뜻이었다.

“미안해요. 당신 아픔은 헤아리지도 못했으면서, 내 감정만 중요하다고 우기는 어린아이처럼 굴어서.”

도결은 제 감정을 뒤로하고선 빠르게 사과했다. 이번에도 자신을 몰아세우지 않고 여유롭게 기다려 주는 도결이 좋았다. 재경은 그를 차분하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도결 씨 탓이 아니에요. 내가 주제도 모르고 당신을 사랑하게 된 거니까….”

“그래도.”

재경이 어떤 말로 거절해도 도결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이 전부 욕을 하면 자신이 다 막아 주고 싶었고, 재경이 이렇게 아파하면 곁에서 위로가 되고 싶었다. 이런 마음이 이기적이라고 해도 할 수 없었다. 

지금 그에게 재경은 하늘이자 땅이고 바다이자 남은 인생이었다.

“재경 씨를 놓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미안합니다. 당신에게 힘든 길이 될 걸 알면서도 같이 가자고 버텨서.”

“진짜 같이 가고 싶은 거예요?”

재경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묻자 그가 일어나서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네. 회사도 전부 그만두고 와서 진짜 백수예요. 내 세상에는 정말 차재경, 당신밖에 없어요.”

그의 말에 재경이 미간을 찡그리다가 끝내 웃고 말았다.

“마음에 드네요. 백수 남자 친구.”

“남자 친구요?”

“네. 보통은 사랑을 확인하면 결혼부터 하지 않아요. 연애부터 하지.”

그렇게 말한 재경이 천천히 그의 허리 위로 팔을 감쌌다. 앞으로 며칠은 눈물만 흘릴 줄 알았는데…. 그를 끌어안고 나니, 그의 심장도 크게 뛰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상하게 기운이 펄펄 끓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를 뜨겁게 사랑하고 있었고, 그 역시 재경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간 애지중지하며 쌓아 온 모든 커리어를 잃게 되어도 어쩔 수 없을 만큼 서로를 원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내게 와 줘서.”

그의 긴 입맞춤이 몇 개월 전 계약서에 찍은 도장보다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는 걸 재경도 느낄 수 있었다.

*   *   *

도결과 재경은 그 후로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재경의 모친이 분위기가 좋아진 두 사람을 적극적으로 떠밀며 재경의 가방을 부랴부랴 싸 준 덕분이었다.

“참 신기하네요. 절대 안 덮일 줄 알았는데.”

휴대전화를 쥔 재경이 중얼거렸다. 도결은 몸을 기울여 재경이 보고 있는 화면을 보았다. 

절대 사그라들 것 같지 않았던 두 사람의 문제가 너무 쉽게 묻히고 있었다. 대중의 관심이 거품처럼 꺼졌다기보다 다른 쪽으로 쏠린 탓이었다.

“그래서 싫어요? 사람들의 관심이 사라져서?”

그가 재경을 놀리듯 물었다. 도결이 경영권을 포기하겠다는 기사를 재경에게 맡긴 덕분에 재경은 또 한 번 특종을 쓸 수 있었다. 

한서일보에서 재경이 쓴 기사의 노출을 허락하지 않을 줄 알았지만, 의외로 한은화 차장이 격하게 반겨서 잘 해결할 수 있었다.

“좋아요. 타인의 기억에서 잊혀지는 건 정말 짜릿하네요. 이대로 우리끼리 영원히 행복하면 좋겠어요.”

“악은 악으로 덮고, 논란은 논란으로 덮는 법이니까요.”

도결은 백수 생활을 꽤 바쁘게 보냈다. 당연히 조금 쉴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활자 중독이었다. 

도결은 매일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가 읽는 책들은 죄다 경영이라든가 경제, 무역, IT 따위의 어렵고 따분한 것들이었다. 재경은 가만히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마 이번 경영권 포기 문제도 금방 사그라들 거예요. 다른 논란이 터져서.”

“설마 논란이라는 게 이분 때문이에요?”

재경이 손가락을 모니터에 가져다 대자, 도결이 고개를 들었다. 모니터 안에 보이는 여자는 언젠가 재경도 본 적이 있는 낯익은 얼굴이었다.

“맞아요. 그 많은 후계자를 제치고 회장 자리에 올라서 최근에 논란이 많아요.”

그는 논란이 되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전문 경영인이 회사를 맡는 것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재경은 고개를 기울였다.

“이게 왜 논란이 되는 걸까요?”

“자식들은 믿기 어렵겠죠. 꼬장꼬장했던 회장님이셨거든요. 당연히 혈연 중심으로 경영권을 넘길 거라고 예상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남에게 경영권을 넘길 거라고 누가 예상했겠어요.”

도결은 강 건너 불을 구경하는 사람처럼 초연하게 대답했다. 재경은 슬쩍 그의 눈치를 살피면서 침을 삼켰다. 혹시라도 그가 경영권을 포기한 것에 대해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이는 건 아닌가 해서 살펴보는 것이었다.

“내 눈치 살필 것 없어요. 태어나서 내가 처음으로 한 선택이 차재경 씨라서 뿌듯하니까.”

그는 재경의 걱정을 뻔히 다 안다는 듯이 잘라 말했지만, 재경의 마음은 썩 좋지 못했다. 

평생 한길만 보고 살아온 사람인데.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쉽게 그만둬도 괜찮을까 싶었다.

“처음이라서 하는 실수도 있잖아요. 혹시라도 그 선택이 후회되면요.”

책을 펴 들었던 그가 갑자기 탁 소리를 내며 책을 덮고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차재경 씨는 내가 진성그룹 후계자라서 좋아했어요?”

화를 내는 듯한 그를 보면서 재경이 입꼬리를 올렸다.

“으음.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왜 몰라요? 솔직하게 말해 줘요.”

“내가 그렇다고 하면 어쩌려고요?”

재경이 동그란 눈을 가늘게 뜨고선 그를 보았다. 도결에게 선택지는 더 없어 보였는데, 의외로 그의 눈빛은 총기로 반짝였다. 

혹시 다른 수가 있어서 안도하는 건가 싶었지만, 재경은 끝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미 제 발로 나온 도결이 갑자기 돌아가긴 힘들어 보인 탓이었다. 

그러자 그가 조심스럽게 재경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당신이 내 곁에 머물러 준다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어요.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봐요. 내가 전부 가져다줄게.”

“산신령도 도끼는 하나만 가져다주거든요? 게다가 쇠도끼를 고른 나무꾼만 행복하다고요.”

욕심낼 필요가 없단 말을 돌려 하는 재경이었다. 그런 재경을 보면서 그가 배시시 웃어 보였다.

“내 세상은 차재경이니까. 당신이 꿈꾸는 세상에 나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의 뻔뻔한 태도에 재경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웃어 버렸다.

“저기, 밖에 손님이 오셨는데. 어떻게 할까요?”

사용인의 질문에 도결이 의아한 눈으로 재경을 보았다. 재경이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백 비서님이요! 오늘 들르신다고 하셨거든요.”

“백 비서가요?”

그는 둘만의 시간을 비집고 나타난 백 비서를 떨떠름하게 여기는 듯했다. 재경은 서둘러 사용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도 좀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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