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몇 분 뒤에 나타난 고 회장은 지팡이부터 집어 던졌다. 그러자 굳은 표정으로 몸을 숙인 정화가 지팡이를 쥐어 들고선 고 회장에게 내밀었다.
“한 번만 더 이렇게 내던지면, 이 집에 한 발도 못 붙일 줄 알아요.”
“시끄러워! 자식 교육을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저런 버러지 같은 행동을 하게 해!”
“저기요. 고 회장님? 지금 내 앞에서 내 자식한테 버러지 같다고 했어요?”
도결은 제 편을 드는 모친을 보고 마음이 이상해졌다. 그간 모친이 저와 부친의 사이에 끼어들 때 방해가 된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오늘에서야 제 모친이 끼어들었던 이유를 깨닫고 있었다. 그동안 저를 후계자로만 보는 부친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회사가 장난이야? 만만해? 임원 회의에서 사직서를 내? 감히?”
백 비서다운 결정이었다. 확실하게 상대를 물어 버리는 행동. 저를 닮은 구석이 마음에 드는 비서였다.
그의 모친은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드는지 깔깔거리며 웃었다. 머리 쓰는 게 제법 영리해서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안 그랬으면, 사직서를 받아 주긴 했을 거고요?”
눈물까지 흘리며 웃던 정화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식었다. 고 회장이 파르르 떨며 분노해서 소리 질렀다.
“당신은 빠져! 지금 이 자식이 한 행동 때문에 회사에 난리가 났으니까! 이대로면 복직하기 힘들다고!”
거칠게 소리를 지르면 당연히 정화가 겁을 먹을 줄 안 모양이었다. 그러나 정화는 제법 강단 있는 표정으로 제 남편을 바라보았다.
“내 자식 앞날에 언제부터 그렇게 신경을 쓰셨다고. 이런 식으로 소리 지르고, 인격 모독할 생각이면 앞으로 도결이 인생에 신경 쓰지 말아요. 지금부터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뭐? 뻔질나게 밖으로 나가는 당신이 어떻게 알아서 할 건데?”
“우리 호텔에도 후계자가 필요한 참이었거든요. 내 아들이 와서 일 좀 도우면 정말 감사한 일이죠. 그간 나도 너무 힘들었어.”
그 순간 도결이 고개를 저었다.
“싫습니다. 누구의 후계자로 사는 건 이젠 하고 싶지 않아요. 제 할 일은 제가 알아서 찾아보겠습니다. 제 인생이니까. 앞으로는 무엇이든 제가 선택하고 싶어요.”
* * *
재경의 동네에 직접 차를 끌고 온 그는 아파트 단지 안에서 헤맸다. 당장 재경을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그간 비서와 운전기사의 도움으로 생활했던 탓에 길을 찾기가 어려웠다.
“차재경 씨?”
그나마 다행인 건, 멀리서 걸어오는 재경의 형태를 한눈에 알아봤단 사실이었다.
한 손에는 아이스크림을 쥐고, 다른 손에는 장바구니를 들고 오는 재경과 그녀의 모친이 보였다.
재경의 모습은 편한 운동복 차림이었고 그녀의 모친은 갖춰 입은 모습이었다. 상반되는 모습이었지만, 얼굴은 쏙 닮아서 누가 보아도 모녀 사이였다.
“안녕하세요. 장모님.”
그가 빠르게 다가가 고개를 숙이자, 재경의 모친이 당혹스러운 눈길로 도결을 보았다. 그러면서 어쩔 줄 몰라서 쭈뼛대는 제 딸을 슬쩍 보았다. 여전히 퉁퉁 부은 눈을 보니 제 딸의 마음도 완전히 다 뜨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이고! 고 서방. 바쁜데 여기까지 왔어.”
그래서 괜히 더 살갑게 도결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잡았다. 아무리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하는 자식이라고 하지만, 원숭이도 나무 위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 법이지 않은가.
처음은 계약이니, 어쩌니 하고 시작했어도 지금은 그런 것과 상관없어 보였다. 적어도 그 마음은 모를 수가 없었다. 제 자식이니까.
“엄마, 고 서방은 무슨. 우리 이혼했어. 알잖아? 어제 뉴스에 나온 거.”
재경이 민망하단 말투로 제 모친을 나무랐다. 선을 긋는 재경의 행동이 서운했는지 도결의 시선이 재경을 향했다.
재경은 눈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지 끝까지 시선을 피한 채로 서 있었다. 그런 재경을 애처롭게 보는 도결을 보면서 모친이 피식 웃었다.
“아, 맞다. 나도 참. 내 나이가 되면, 금방 깜빡깜빡해. 그래, 전 사위. 여긴 어쩐 일이래?”
“전 사위는 또 무슨 괴상한 말이야.”
당황한 재경이 제 모친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도결과의 만남을 어떻게든 짧게 끝내려고 노력했다.
이대로라면, 아무리 울어도 도결이 제 딸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슬쩍 도결에게로 눈짓을 하는 모친이었다.
“우리 지금 장 보고 오는 길인데. 점심 전이면 안에서 먹고 갈래?”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장모님.”
그가 넙죽 장바구니를 들며 웃었다. 도결이 이렇게 넉살 좋은 사람이었던가 싶은 재경이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러자 도결이 재경의 시선을 기다렸다는 듯 재경을 보며 활짝 웃었다.
“오랜만에 보니까, 보기 좋네.”
재경의 모친은 슬그머니 걸음을 늦췄다. 덕분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앞서 걷게 되었는데, 재경은 그게 신경 쓰이는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딴청 피우는 제 모친을 보곤 고개를 돌려 도결을 보았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에요?”
“보고 싶어서요.”
“회사는 어쩌고 평일 대낮에 여길 왔어요.”
“그만뒀어요. 차재경 씨 보고 싶어서.”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그가 하면 진짜처럼 들렸다. 재경은 할 말을 잃고, 입을 닫았다. 어떤 바보가 대기업 경영권을 버리고 백수가 되나 싶어서. 더는 물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 * *
재경은 이 껄끄러운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난감했는데, 저만 빼고 두 사람은 화기애애했다.
재경의 모친은 두 사람이 이혼한 사실을 정말 잊은 건지, 아무렇지 않게 생선 살을 발라 도결의 밥 위로 올려 주고 있었다.
“엄마, 제발.”
그녀가 그만하라는 듯 말하자, 도결은 보란 듯이 밥을 먹으면서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장모님.”
어쩐지 장모님이라고 부르는 호칭에 더욱 힘을 실은 것 같기도 했다. 재경의 모친은 그의 얼굴을 보며 까르륵 웃었다.
“재경이 넌 좋겠다. 드라마를 볼 필요가 없었겠네. 어쩜 이렇게 잘생겼을까? 아니, 사우나에서 언니들이 잘생긴 남편이랑 살면 부부 싸움하다가도 화가 풀린다고 하더니만, 그 말이 딱 맞네. 맞아. 전 사위를 봐도 이렇게 마음이 녹네. 녹아.”
“그만해, 엄마. 어제 이혼했다고 다 말했잖아.”
그러자 금방 차가워진 표정으로 재경의 모친이 눈썹을 일렁였다.
“그래, TV 없었으면 난 어쩔 뻔했니? 내 딸 이혼 소식도 결혼 소식도 전부 TV가 말해 주더라.”
뼈가 있는 말에 도결이 머뭇거리며 숟가락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니, 자네가 뭘 죄송해? 이혼하면 남인데. 잘못은 내 자식이 했지. 안 그래, 차재경?”
재경도 덩달아 고개를 숙이자, 모친은 식탁 위에 놓인 컵을 쥐고 물을 삼켰다.
“그래. 요즘은 이혼도 연애만큼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빠르게 한다더라. 뭐, 재혼도 다르지 않겠지. 하여간 젊은이들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어. 다 늙은 내 죄지.”
“언론으로 먼저 소식을 듣게 한 점은 전부 제 불찰입니다. 제가 아니었더라면, 충분히 말씀드릴 시간이 있었을 겁니다. 제가 애매하게 알려진 탓이니, 너그럽게 이해해 주세요. 어머님.”
공손한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재경의 모친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딸을 울린 건 미워 죽겠지만. 도결이 없으면 매일 온 세상이 물바다가 되도록 울어 대니, 부모 입장에서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재혼 소식은 사실인가?”
모친의 물음에 재경이 몸을 움찔했다. 전부 사실이라고 생각하자, 다시 또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모친의 표정이 차갑게 식어 가자, 도결이 품 안에서 반지를 꺼내 들고는 식탁 위에 올렸다.
“앞으로 제 인생에 재혼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꼭 하고 싶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제대로 된 결혼 생활을 꼭 하고 싶어서 실례인 줄 알면서도 왔습니다.”
재경이 너무 놀라 아무 소리도 못 하는데, 모친은 태연하게 반지 케이스를 열어 다이아몬드를 보면서 물었다.
“세상에! 이게 몇 캐럿이야? 엄청 크다! 난 이렇게 큰 다이아몬드는 처음 본다. 재경아.”
일부러 더 과장된 목소리를 냈다. 이렇게 해서라도 재경이 못 이기는 척 그를 받아 줬으면 하는 게 모친의 마음이었다.
좋아하는 건 무엇이든 쟁취하려고 노력하던 딸의 모습이 더 보기 좋았다.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모습은 마음 아파서 싫었다.
“엄마!”
재경이 부끄럽다는 듯 소리를 크게 내자, 뻔뻔하게 케이스에서 반지를 꺼낸 모친이 재경의 손가락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쓱 끼워 버렸다.
“어머, 우리 재경이 손에 딱 맞네. 어쩜, 보는 눈도 좋지.”
“나 이런 반지 필요 없어.”
“그래, 반지가 뭐가 중요하니?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중요하지. 안 그래, 전 사위?”
그러면서 재경의 모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경의 모친은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노라는 눈빛으로 도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아까 마트에 카드 두고 온 게 생각나서, 잠깐 나갔다 와야 될 것 같아. 하여튼 요즘 내가 이렇다니까.”
모친이 나간 뒤 재경은 아까보다 더 굳은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이렇게 찾아오면 불편해요.”
이런다고 해결될 일은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도결은 재경이 이렇게 완강할 거라고 예상했기에 크게 낙담하진 않았다.
“나한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회를 줘요. 후회할 일 없도록 잘할게요.”
“한은화 씨와의 재혼이 싫어서 온 거라면, 다른 사람 찾아요. 더는 이용당하고 싶지 않아요.”
“재경 씨를 사랑해서 왔어요. 너무 늦어서 오해하게 만든 거 미안해요. 당신이 바라는 멋있는 기자 생활을 내가 망쳤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아서 용기가 안 났어요.”
재경은 도결이 이토록 말이 많은 건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지나치게 계획적인 그가 본가에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놀라고 있었는데. 자신을 위해 구구절절 속에 있던 말을 전부 다 꺼내다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무례하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도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화내고 싶으면 내도 괜찮아요. 나는 재경 씨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이 방법밖엔 없었어요.”
“그래요? 그럼, 오늘 여기 와서 느낀 점은 없어요? 봐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렇게 달라요. 우리 부모님이 평생 일해서 장만한 소중한 집은 당신 침실보다 작아요. 이래도 우리가 함께할 수 있을까요?”
사랑이라는 감정 하나만으로 결혼하는 게 세상에서 가장 미련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고도결, 그 자신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어떤 사랑은 제 모든 것을 잃더라도 쟁취하도록 했다. 지금이 바로 그런 사랑이었다.
“이제 내 세상은 회사도 집도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