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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49/60)

<49화>

늦은 점심에 일어난 재경은 엄마의 쉬지 않는 잔소리도 모자라 뾰족한 세모 눈에서 나오는 레이저 빔을 온몸으로 느껴야만 했다.

“너 그렇게 술 퍼마시고 다닐 거면, 다시 서울로 돌아가!”

어기적어기적 침대에서 몸을 분리한 재경이 할 수 없이 식탁 앞에 앉았다. 잘 차려진 엄마의 밥상에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떻게 넌 집에 올 때마다 잠만 자? 그래서 어디 출근은 제대로 하겠니? 해가 중천에 뜬 거면 피곤했나 보다 하는데, 저 봐. 해가 지고 있어. 몇 시간 지나면 내일이야.”

창문을 보라는 말을 하는 엄마의 손짓에 무심코 시선이 아파트 베란다를 향했다. 높은 건물 사이로 보이는 붉은색 태양은 정말 오후라는 걸 알리고 싶은 건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며칠 뒤에 서울로 다시 갈 거야. 여기서 출퇴근하려면 너무 오래 걸려.”

“누가 너 돌아가면 겁난다니? 너 이러는 거 안 보고 살면 나야말로 만세다, 만세! 만만세!” 

머쓱해진 재경은 애꿎은 머리만 긁적였다. 말하고 보니까, 다시 또 진성그룹으로 출입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생각나서 서글퍼졌다. 

진성그룹이야 워낙 큰 회사니까, 조심해서 다니면 도결과 마주칠 일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조금 더 지내다 보면, 출입처가 바뀔 테고, 자연스럽게 그와 멀어질 것이다. 

근데 그게 또 왜 이렇게 아쉽고 서운해지는 건지.

그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마음에 바위 하나가 놓인 것처럼 묵직해졌다.

정말 이대로 도결을 보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이렇게 보고 싶은데…. 

“하여튼, 우리 집은 기껏 밥을 차려 줘도 고마운 줄을 모른다니까.”

모친은 투덜거리면서 거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켰다. 채널을 돌리던 모친은 갑자기 나오는 뉴스에 움찔했다.

[앞서 관계자는 진성그룹 고도결 부회장의 이혼 소식은 사실에 가까우며 재벌가에 새로운 연인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상대 측의 적극적 구애에 따라 곧 재혼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귀띔하기도 했습니다.]

밥을 먹던 재경이 깜짝 놀라 숟가락을 놓치자, 쨍그랑 소리와 함께 숟가락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신경질적으로 전원 버튼을 누른 모친이 리모컨을 살짝 던지듯 놓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이야, 나는 우리 딸 이혼 소식을 뉴스로 보네.”

재경은 미안한 표정으로 모친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 그게… 말하려고 했는데.”

재경은 모친의 실망한 표정을 보기가 두려웠다. 이럴 줄 몰랐던 건 아닌데, 막상 닥치고 보니까 마음이 더 아팠다.

“오자마자 엄마가 계 모임에 갔었잖아. 어젠 내가 술을 마시느라 취해 있었고… 또.”

재경은 슬쩍 시선을 피하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모친은 의외로 재경을 다그치거나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그저 냉장고 앞에 서서 냉수를 꺼낸 뒤 벌컥벌컥 마실 뿐이었다. 평소에는 입을 대고 마시지 말라던 모친인데, 오늘은 혼자서 병 입구에 입을 대고 원샷을 해 버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굴어도 부모 마음은 다 거기서 거기인 모양이었다. 모친은 곧 재경의 앞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퉁퉁 부은 제 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모친은 끝내 성질을 참고 화통하게 말했다.

“야, 차재경. 너 울 거 없어. 요즘 세상에 이혼한 건 흠도 아니야. 내 친구 몇 명은 황혼 이혼하겠다고 벼르고 있더라.”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모친은 재경을 위로해 주었다. 머리채를 잡히거나 등짝 몇 대는 맞을 줄 알았는데. 모친은 가만히 손을 뻗어 재경의 뺨을 어루만졌다.

“진득한 네가 무슨 죄니. 요즘 애들이 문제지.”

“요즘 애들이라니?”

“미디어에서 그러더라? 요즘 사랑은 인스턴트다, 아니다 하면서. 근데 내가 보기엔 그것도 다 옛말이야.”

“응?”

“내 사위 봐라. 벌써 재혼한다고 뉴스에까지 나오잖냐. 요즘 사랑은 인스턴트가 아니라 LTE다. LTE. 빨라도 너무 빨라서 도저히 못 따라가겠다.”

재경은 화를 참는 모친의 얼굴을 슬쩍 살핀 뒤, 젓가락으로 김치를 집어 들었다. 잔소리가 없는 걸 보니, 재경과 싸우고 싶진 않은 모양이었다.

*   *   *

도결의 집으로 찾아온 백 비서는 이 넓은 집에서 그를 찾기가 이렇게 어려운 줄 처음 알았다. 그간 도결은 침실이나 서재를 주로 이용했기 때문에 백 비서가 그를 찾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은 침실에서도 서재에서도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여기 계셨습니까?”

넓은 저택을 무려 세 번이나 돌고 돌아서 찾은 곳은 재경이 머물던 방이었다. 어떻게 여기를 깜빡 잊었는지. 백 비서는 자신의 감도 이제 다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로 왔습니까?”

방 안은 술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기다려도 오시지 않으셔서 직접 왔습니다.”

백 비서는 술에 취해서 움직이지 못하는 도결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이렇게까지 도결이 무너진 모습은 처음이라서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조심스러웠다.

“아, 나 오늘 무단결근이지.”

“무슨 일 생기신 줄 알았습니다. 부회장님이 술에 취해서 무단결근이라니. 보고도 믿기지 않네요. 차라리 땅이 솟구치고 있단 말을 믿는 게 더 빠르겠습니다.”

그러자 도결이 느릿하게 두 손으로 눈을 비볐다.

“지금 내 세상이 그래요.”

“부회장님?”

붉게 충혈된 도결은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벅저벅 걷는 그의 발걸음은 위태롭게만 보였다. 도대체 고아하고 완벽했던 그가 왜 이렇게 무너져 내린 건지 모를 일이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이렇게 비참할 수 없을 것 같고, 바다가 갈라져도 이토록 두렵지 않을 것 같아요. 여기가 찢어질 것처럼 아픈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네요.”

“아니, 무단결근을 하시고 그런 말씀을 하시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부회장님?”

“백 비서가 그랬잖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하려면 회사에서 물러나라고.”

“그건 제가 한 말이 아니라… 회장님께서… 하아.”

결국은 제가 전하지 말아야 할 말을 전해서 이 꼴이 난 모양이었다. 백 비서는 짜증스러운 마음에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양주 병을 들었다. 그러고는 남은 양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온몸이 독한 양주를 거부하면서 속이 뜨거워졌다.

“뭐 하는 겁니까? 근무 시간일 텐데.”

도결이 마지막 이성을 잡고 묻자, 백 비서가 쓴웃음을 지었다.

“모시던 상사가 회사를 그만두시겠다는데, 제가 술이 안 당기겠습니까?”

백 비서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라 도결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한숨을 쉬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는데, 백 비서가 다시 한번 양주를 입속에 털어 넣었다. 완전히 취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천천히 마셔요. 안주도 없이 누가 그렇게 무식하게 마십니까?”

“부회장님은 배가 부르셨습니다. 배부른 돼지세요.”

“돼지?”

도결이 황당한 눈으로 백 비서를 보았다.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 술을 퍼부어 마셨는데, 어쩐지 백 비서와 대화를 하면 할수록 정신이 또렷해지는 기분이었다.

“하늘이 갈라지고, 땅이 무너져요? 바다가 솟구친다고 했던가. 하여튼 그 기분은 제가 느끼고 있습니다. 부회장님은 모르세요. 그 기분을.”

늘 들어 왔던 말이라 기분 상할 일이 아니었다. 주어진 게 많았던 그의 삶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백 비서가 도결에게 배부른 돼지라고 욕해도 기꺼이 욕을 먹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런 기분을 잘 아는 모양입니다? 백 비서님은.”

“아뇨! 이제 백 비서라고 부르지 마세요! 어차피 오늘부로 제가 모실 상사는 어디에도 없잖습니까! 저야말로 제 자리가 지구 핵으로 꺼졌으니, 술이 당깁니다. 예.”

직장을 잃을 백 비서에 대해선 생각 못 했던 터라 허를 찔린 도결이 말문이 막힌 채로 제 비서를 보았다. 지금 와서 보니, 제 생각이 너무 짧았던 것도 같고.

“제가 그간 얼마나 진심을 다했는 줄 아십니까?”

버럭 성질을 내는 백 비서를 보면서 도결이 머뭇거렸다.

“백 비서는 내가 함께하자고 하면 선뜻 날 따라나설 수 있습니까?”

“아니요.”

도결은 금방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씁쓸하게 웃었다. 진성그룹의 후계자가 아닌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의 가문이 주는 명성과 부가 아니면, 그는 세상에 썩 필요하지 않은 인간이었다.

그때 안경을 고쳐 쓴 백 비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연봉이 지금보다 오르면.”

“연봉?”

“예. 연봉을 올려 주시면 따라가겠습니다.”

백 비서의 말에 도결이 황당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전 재산을 줘도 싫다는 뜻인 줄 알았는데, 고작 연봉 몇 푼 더 올려 달라고 제안하는 백 비서가 귀엽게 보였다.

“부회장님처럼 평생 먹고살 걱정 없는 분들은 이 회사를 떠나도 큰 문제가 아닐 테지만, 저는 진성그룹에서 나오면 인생 루저가 되거든요. 연봉 협상에서 지금보다 더 주시면 따라가겠습니다.”

눈빛을 반짝이는 백 비서를 보면서 도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올려 줄 의향이 있었다. 제법 손발이 잘 맞았고, 그를 진성그룹 후계자로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사랑을 선택하셨으면, 사직서 주십시오. 제가 내일 회장님께 전해 드리겠습니다.”

단호한 백 비서의 목소리에 그가 피식 웃었다.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제 미래에 한 줄기의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   *   *

다음 날 오전부터 본가에 끌려 온 건 사직서 때문이었다. 당연히 가장 먼저 나타날 줄 알았던 고 회장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도결의 모친이 나와서 그를 맞이했다. 언제나처럼 서늘한 눈매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너 오늘 회사에서 잘렸다며?”

“제가 나왔습니다.”

“부회장, 아니지. 이젠 백수구나. 뭐라고 불러야 하나?”

“출근, 안 하셨습니까?”

“재경이가 그렇게 간 뒤로 마음이 안 좋아서. 나한테 마지막이라고 인사하러 왔는데 선뜻 잡질 못했어. 둘이 합의된 일인 줄 알고.”

모친의 말에 당황한 그가 고개를 돌렸다. 재경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그 사람이 찾아왔었습니까?”

“그래. 비록 계약 관계였지만. 우리 사이는 고부 사이지 않냐고 하는데. 어쩜 애가 볼수록 마음에 들어. 부회장, 아니. 네 생각은 어때? 그 아이 여전히 마음에 없니?”

“있습니다. 그래서 사직서 제출했어요. 회장님, 아니. 아버지께서 재결합하려거든 회사를 포기하라 하셔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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