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처음부터 그랬다. 도결을 유혹하는 건 재경이 먼저였다. 물론 재경은 흑심 없이 순진한 마음으로 꺼냈을 테지만, 도결은 절대 순진하기만 하지 않았다.
제 품에 안겨 편하게 잠든 재경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던 도결이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럴수록 품으로 더 깊이 파고드는 재경이었다. 잠든 재경을 가만히 바라만 봐야 한다니. 곤혹스러운 밤이었다.
“흐읍.”
결국, 그는 잘 익은 딸기처럼 붉은 재경의 입술을 살짝 핥으며 향기를 음미했다. 재경의 옅은 떨림이 그의 심장을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 도결은 말캉거리는 그녀의 속살을 부드럽게 깨물어 달콤한 맛을 보고야 말았다.
“도결 씨….”
꿈틀거리며 제 이름을 부르는 재경이 사랑스러웠다. 도결은 제 품에 안긴 재경을 몇 번이고 힘주어 안았다.
“사랑해요. 재경 씨.”
잠에 취해서 안기는 재경에게 자신이 남편이라는 사실을 몇 번이고 상기시키고 싶었다. 유치하고 옹졸한 마음이 분명하지만, 부정할 마음은 없었다. 재경의 곁에 있는 것이 자신이라면,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 * *
다음 날 오전.
도결의 사무실에는 짙은 적막이 흘렀다. 찡그린 그의 표정은 평소보다 몇 배로 날카롭게 보였다. 회사 일로 정신없이 바쁜 탓도 있었지만, 지난밤에 제대로 잠을 못 잔 것도 한몫했다.
신기술을 어떻게 해서든 론칭해야 하는 상황인데, 안전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로 출시하는 건 내키지 않았다.
똑, 똑, 똑.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도결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입니까?”
“사모님 오셨는데 어떻게 할까요?”
“재경 씨가 왔다고요?”
그가 의아한 목소리로 묻자, 비서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도결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서둘러 재경을 안으로 들여보내라고 말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재경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갑자기 나타나서 곤란한 건가요?”
“아니요. 막 쉬려던 참이었어요. 뭐 좀 마실래요?”
그가 언제 예민했냐는 듯이 온화하게 미소짓자, 백 비서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재경은 슬쩍 백 비서를 보며 말했다.
“금방 일어날 거예요. 괜찮아요.”
점심시간도 아닌데 재경이 나타나자, 그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애써 표현하지 않았지만, 평소와 다른 재경의 눈빛 때문에 더욱 불안해졌다.
백 비서가 나간 뒤 재경은 마치 미술관에서 마음에 든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도결의 얼굴을 훑었다. 오래 기억하려는 듯한 그녀의 눈빛이 계속해서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무슨 일이에요?”
“으음.”
재경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천천히 시선을 거두고선 가방을 뒤적거렸다. 느릿느릿한 그녀의 행동이 오늘따라 생소하게 느껴졌다.
“여기요.”
“이게 뭐예요?”
애매하게 종이를 건네받은 도결은 누가 보아도 이혼 서류인 종이를 꽉 쥐고 표정이 굳었다. 경직된 그를 외면한 채 재경이 고개를 재빠르게 돌렸다.
“읽어 보면 알잖아요. 할 말은 다 한 것 같으니까, 그만 가 볼게요.”
말을 마친 재경은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재경을 향해 그가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지금 난 아무 말도 못 들었어요. 가고 싶으면, 끝까지 다 말하고 가요.”
“우리 계약 결혼한 사이잖아요. 오늘이든, 내일이든. 이혼이 이상한 상황도 아닌데. 너무 유별나게 굴지 말아요.”
줄곧 재경은 제 곁을 언제라도 훌쩍 떠날 것처럼 굴었다. 그도 짐작해 왔던 것이라, 지금 일어나는 일이 놀랍진 않았다. 어쩌면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고심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왜, 다 알고 있던 사실인데도 이렇게 아픈 걸까.
“난 우리가 이런 식으로 끝날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다시 한번 더 용기를 내서 재경을 잡았다. 이렇게라도 붙들고 싶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재경의 단호한 눈빛이었다.
“이혼해 줘요. 비밀이 누설되었으니까, 내가 피해받은 부분은 돈으로 줬으면 해요.”
갑작스레 변한 재경의 태도를 예상하지 못했던 도결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재경은 팔랑이는 나비처럼 잡힐 듯 말 듯한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그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 * *
재경이 떠나고 며칠이 지났다. 그의 가슴속은 하루에도 몇 번씩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 세상은 잘만 돌아갔다.
그가 이혼한 후 비즈니스 결혼을 할 거란 찌라시가 돌자, 회사의 주가는 살짝 상승하기까지 했다.
“아마, 론칭 때 선방하면 주가가 안정화되는 건 금방일 겁니다.”
백 비서는 일부러 과한 목소리로 떠들었지만, 도결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예전에는 고작 이런 일로 기뻤었던가? 새삼스럽기까지 했다.
‘처음부터 내가 감정이라는 걸 느끼긴 했던가?’
재경이 떠난 뒤 그의 세상은 뜨거운 사막 같았다.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웠다.
“그리고 이혼 소식도 잠잠해졌습니다.”
재경이 떠나고 한결 차분해진 백 비서의 목소리에 도결이 고개를 들었다. 서류상 완전히 이혼한 것도 아닌데, 세상은 재경과 그를 금방 갈라 버렸다.
그래서인지 그의 손이 떨렸다. 이런 식으로 재경과 자신의 인연이 싹둑 끊겨 버릴까 봐 두려웠다. 영원히, 이대로 이어 붙일 수 없는 사이가 될까 봐 신경 쓰였다.
“이혼은 없을 겁니다. 누구든 이혼을 언급하면 꿈 깨라고 하세요.”
“그럼 소송이 걸릴 텐데요. 회사 이미지에도 좋지 않을 겁니다.”
백 비서는 도결의 친구가 아니었다. 회사를 위해 함께하는 직장 동료일 뿐. 도결의 기분을 생각한다면, 조금이라도 그를 달랬을 테지만. 한 개인의 인생을 위해서 비서가 된 건 아니었다.
“백 비서님은 회사 때문에 사랑하는 여자를 떠나보낼 수 있습니까?”
도결이 꽃병에 꽂혀 있는 꽃을 보면서 물었다. 누구보다 이성적인 백 비서는 곧장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저는 평범한 회사원이잖습니까? 제 결혼이 회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백 비서님이 나라는 가정을 한다면요?”
“저는 회사보단 제 인생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내게 인사할 때, 앞으로 진성그룹에 뼈를 묻겠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뼈를 묻고 싶을 만큼 애사심이 있단 거지. 진짜 묻으라고 하면, 무섭습니다. 하하하.”
얼렁뚱땅 넘기려는 백 비서가 얄미워서 도결이 인상을 썼다. 그런 도결을 보면서 백 비서가 조용히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저, 제가 오전에 회장님께 다녀왔잖습니까? 그때, 고 회장님께서 부회장님이 하루라도 빨리 한은화 차장님과 결혼식을 올리셨으면 한다고 하셨습니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도 아니고. 제 상황은 전혀 신경 안 쓰신다고 하시던가요?”
그가 까칠하게 묻자, 백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이나 동정심은 어디에도 쓸 곳이 없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이건 제 의견은 아니고요.”
“감정을 멋대로 통제할 수 있는 인간도 있다고 하던가요?”
“사업가에게 필요한 건 감정이 아니라 이성이라고 하셨습니다.”
“백 비서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다수를 위해서 단 한 사람이 희생해야 한다고 믿어요?”
백 비서는 퍽 난감했다. 비서로서 보자면, 도결이 회사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무척 당연했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그가 괴로워하는 걸 목격한 사람으로서는 당연하게 보이진 않았다. 그래서 이 상황이 굉장히 안타까웠다.
그도 후계자이기 전에 한 사람인데. 한 번쯤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지 않나? 그래서 자신만이라도 도결의 말에 긍정해 주고 싶었다.
“아니요. 저는 반대입니다.”
다짐이라도 한 듯한 눈빛으로 백 비서가 도결을 보면서 대답했다. 자신의 의무는 회사에 이득이 되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 역할인데, 어쩐지 그런 선택만이 꼭 진성그룹을 위하는 길은 아닌 것 같았다.
애초에 진성그룹은 수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회사였다. ‘이타심이 있는 회사’가 슬로건 아니었던가?
“어째서요?”
“부 회장님도 사람이니까요. 선택할 자유가 있으시지요. 다만 선뜻 사랑을 선택하라고는 못 하겠습니다.”
“왜요? 우리가 이뤄질 수 없을 것 같습니까?”
“아니요. 회장님께서 차재경 기자님을 선택하면, 회사를 포기하라는 말씀까지 하셨거든요. 부회장님께서는 사랑을 선택하면 잃을 게 많아 보입니다.”
도결이 움찔하자, 백 비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작게 웃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도결에게는 행복한 결말이라고 믿는 백 비서였다. 애초에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 살아온 부회장이 사랑을 선택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 답은 뻔했다. 그는 절대 회사를 포기할 수 없다.
“뭐, 사랑을 버린다고 해서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으십니다. 애사심도 사랑 아닙니까? 지금까지 후계자로 자라 오신 부회장님께서 사랑 때문에 회사를 버리지 못하는 건 당연합니다.”
처음부터 회사만 보고 자란 그가 회사를 버린다는 것은 지난 삶을 전부 부정하는 일과 같았다. 그 누구도 상상해 본 적 없는 결말이기도 했다.
도결 역시 진성그룹이 곧 자신의 미래라고 여겼다. 그래서 이 상황이 조금 얼떨떨했다.
“괜찮으십니까?”
“혼란스러워요.”
도결은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 온 인생이 거친 파도 앞에 놓인 모래성처럼 느껴졌다. 이 상황이 엄청난 충격을 줌과 동시에 후련한 감정을 남겼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아득한 것을 위해서 지금까지 제 모든 권리를 포기했었다는 게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제 것이라고 믿었던 모래성이 파도에 쓸려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사랑을 선택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 *
진성그룹에서 나온 재경은 그대로 신혼집에 가서 작은 짐을 쌌다. 집 안에 있는 사용인들은 재경을 적극적으로 말리지는 못하고 재경의 주변에서 서성거렸다.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안 되냐는 말을 꺼내며 한 번 더 설득하려 했지만, 완강한 재경을 이길 수는 없었다.
짐이라고 해 봐야 얼마 되진 않았다. 재경은 여행 가방 정도 되는 가방을 쥐고서 곧장 본가로 떠났다.
한서일보에는 연차를 냈다. 주혁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조금 더 오래 있다 오라는 말을 꺼냈다. 덕분에 편하게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면, 항상 보람을 느끼곤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일이 잘 풀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결과 헤어지는 이 시간이 너무 빠르고 간단해서 어쩐지 서러울 지경이었다.
“어쩐 일이야? 네가 집을 다 내려오고.”
재경의 모친은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 곧 울 것 같은 딸의 얼굴을 한 번 보고는 아무렇지 않게 뒤를 돌아 집 안으로 들어섰다.
“오랜만에 보면, 반가운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냐?”
“야, 나도 일정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야. 멋대로 찾아오면 반기고 싶어도 못 반기지. 냉장고에 장조림 해 뒀어. 이따가 배고프면 꺼내 먹어.”
약속이 있던 모친은 머리에 말린 롤을 빼면서 재경의 저녁을 걱정했다. 격하게 환영하는 건 아니어도 위로 정도는 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모친이 생각보다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자, 어쩐지 서운함이 밀려들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같이 저녁 안 먹어?”
“계 모임 있어서 나가 봐야 해. 너 미자 이모 알지? 오늘 걔 생일이거든.”
“다녀오세요. 난 좀 자야겠다. 졸려.”
재경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 모친의 표정이 굳었다. 세상 사람들이 전부 제 딸의 결혼 문제로 떠들어 대는데 자신까지 딸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좀 너무했나?”
괜히 마음이 무거워져서 재경의 방문을 열어 보았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재경이 침대에 엎드려 오열하는 모습이 보였다.
제 앞가림 잘하고 살아서 다 키운 줄 알았는데, 여전히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같은 구석이 있다는 걸 뒤늦게서야 깨닫는 모친이었다.
살짝 문을 닫은 재경의 모친은 일부러 큰 소리로 재경에게 말했다.
“엄마, 늦으니까. 오랜만에 친구 만나서 저녁이라도 사 먹든지! 식탁에 오만 원 두고 간다!”
* * *
재경은 엄마가 준 돈 오만 원을 들고서 동네 치킨집에서 혼자 치킨을 먹었다. 맥주를 시켜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니까 알딸딸하게 취기가 올라왔다. 집으로 돌아가는데, 평생 살았던 제 고향이 낯설게 느껴졌다.
‘원래 이렇게 외롭고 슬픈 동네였나?’
도결과는 그 어떤 추억도 없는 곳인데, 이상하게 도결의 얼굴이 떠올라서 짜증이 났다.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을 본 다음에도 이랬다. 시험이 끝나면 마냥 기쁠 줄 알았는데,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주저앉아서 펑펑 울었었다.
그와 만나고 이별하는 지금 이 순간이 그때와 닮아 있었다. 오랜 짝사랑 상대였던 주혁을 잊을 수 있어서 기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주저앉아서 도결을 못 잊고 우는 꼴이라니.
처음에는 도결이 닿을 수 없는 상대라서 마음에 들었다. 영원히 비밀로 간직할 수 있는 하룻밤이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점차 좋아지면서 평생 노력해도 닿을 수 없는 상대라는 게 싫어졌다. 차라리 계약대로 이혼하고 나면 속이 편할 것 같았는데. 막상 이런 상황이 오니까, 편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가 더 보고 싶어서 죽을 것만 같았다.
“여기쯤인가.”
벚꽃이 피고 지는 나무 아래에서 재경은 쭈그리고 앉았다.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이겨 내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좋아하는데. 흐윽. 이제 좀 알 것 같았는데.”
얼마나 울었는지 알 수 없었다. 정수리로 툭 하고 빗방울이 떨어지고 나서야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보고 싶었던 그 사람이 재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도결 씨?”
우산을 쥐고 선 그가 재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해요.”
그 순간 재경은 자신이 헛것에 대고 이야기한다고 생각했다. 술에 취하면 원래 보고 싶은 사람이 나타나고는 하니까.
“…….”
“꼭 해 주고 싶었던 말인데 이런 상황에서 하는 건 반칙이니까….”
재경은 앞으로도 끝까지 숨겨야 하는 이 말을 허공에 대고라도 뱉을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