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부회장실.
갑자기 꽃을 쥐고 나타난 도결을 보면서 백 비서가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까지 꽃에 관심 없던 부회장이 꽃을 쥐고 나타난 것이 의아했다. 심지어 꽃집에서 파는 생화로 보이지도 않았다.
‘화단에서 꺾은 건가?’
눈이 마주치자, 백 비서가 조용히 물었다.
“갑자기 웬 꽃입니까?”
도결은 못마땅한 시선으로 제 손에 있는 꽃을 응시했다. 축 늘어진 모습이 정말 곧 죽어 버릴 것만 같아서 짜증스러웠다.
“꽃병 좀 가져와요.”
당황한 백 비서는 누가 보아도 비실거리는 꽃 한 송이를 보면서 눈을 깜빡였다.
“설마, 그 꽃을 넣으시려고요?”
이 무미건조한 사무실에 화사한 꽃병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단 생각을 종종 하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꽃을 들이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왜요? 백 비서님은 이 꽃이 마음에 안 들어요?”
“아,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마음에 안 들다마다. 풍성한 꽃다발도 아니고 이름 모를 꽃이었다. 언제 시들지 모르는 꽃을 위해 꽃병을 가져오라니. 부회장님답지 않은 선택이었다.
백 비서는 퍽 난감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뭐 해요? 꽃병 안 가져오고.”
도결이 강인한 기세로 지시하는 통에 백 비서는 할 수 없이 조용히 무전기를 들고 비서 팀에 연결했다. 백 비서는 밖에 있는 비서에게 작은 꽃병에 물을 담아서 들고 오라고 지시했다.
안 그래도 지금 봐야 할 서류가 산더미라 바쁜 와중이었다. 이름 모를 꽃과 꽃병 때문에 시간을 더 지체할 순 없었다.
똑똑.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결이 들어오라 지시하자, 젊은 비서가 금방 작은 유리 꽃병을 들고 나타났다. 얼마 전 신입으로 온 비서였다. 급한 대로 자신의 책상 위에 있던 꽃병을 가져온 모양이었다.
“어디에 둘까요?”
백 비서가 조용히 꽃병을 받아서 도결에게 묻자, 그가 시니컬하게 꽃을 넣었다.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가는 신입 비서를 보던 백 비서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도결을 보았다.
“괜찮으십니까?”
“만일 내가 이 꽃을 꺾지 않았다면.”
“…….”
부회장이 평소와 다르다는 건 직감하고 있었지만, 왜 이렇게 심각한 건지 알 수 없는 백 비서는 답답하기만 했다.
“이 꽃은 조금 더 오래 살다 시들었을까요?”
백 비서는 뜻 모를 질문에 고개를 삐걱거렸다. 대충 심심해서 꺾어 버린 꽃은 아닌 모양인데. 그렇다고 꽃을 꺾을 때 깊이 의미를 부여하고 꺾나?
“네. 계절이 바뀌기 전까진 그 자리에 있었을 것 같습니다.”
“계절이 바뀌면요?”
“거리에 있는 꽃이었다면, 계절에 맞게 바뀌었겠죠. 시든 꽃을 보라고 두진 않으니까요.”
도결이 가만히 꽃을 응시하며 물었다.
“그래도 다른 꽃들과 같이 있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요?”
누가 봐도 옳은 말이었다. 백 비서 역시 끼리끼리 어울려 사는 게 가장 조화롭다고 믿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나 도결의 질문은 미묘하게 찝찝했다.
‘고도결 부회장의 손에 들어온 꽃은 상황이 좀 다르지 않나?’
백 비서는 도결의 심각해진 표정을 살피고선 그에게 맞춰서 답했다.
“인간이 경쟁하듯, 그 꽃도 화단에서 나름대로 치열한 경쟁을 했을 겁니다. 경쟁에서 벗어났다는 점이 다른 꽃들보다 더 좋아진 점이겠지요. 게다가 수경 재배는 나쁘지 않은 선택입니다. 뿌리가 없어서 아쉽지만, 그 상태라면 꽃병에서도 잘 자랄 겁니다.”
그렇게 말한 백 비서는 조용히 빛이 가장 많이 드는 자리로 꽃병을 옮겼다.
“누가 내게 그러더군요. 화단에 있는 꽃을 꺾으면 죽은 것과 다름없다고.”
“화단에선 죽은 꽃이 되겠죠. 뿌리만 남았으니까요. 하지만 꽃을 꺾지 않았다면, 특별한 꽃도 되지 못했겠죠.”
백 비서의 말에 도결이 미간을 구겼다. 누가 보아도 특별한 것 없는 꽃이었다.
“이 꽃이 특별해 보입니까?”
“네. 이보다 더 특별한 꽃이 어디 있겠습니까? 앞으로 우리 비서 팀은 부회장님의 꽃을 그 어느 꽃보다 소중하게 보살펴야 하는데요.”
백 비서의 대답을 들은 도결은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꽃을 보며 웃었다. 정답을 찾은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주혁의 말처럼 재경이 화단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와 어울리지 않는 게 당연하지만, 재경은 이미 도결의 눈에 띄었고 제 발로 화단을 버리고 다가왔다.
이젠 서로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었으니까, 일부러 멈출 필요 없었다. 오히려 더 잘된 일이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 * *
기자실에서 재경은 또 한숨을 쉬었다.
에휴. 지금 몇 번째 힐끗거리는 거야? 이럴 거면, 그냥 대놓고 물어봐 주지. 수군거리는 소리가 슬슬 짜증스러운 재경이었다.
“계약 결혼이었다는 거 봤어요?”
그 순간 재경의 몸이 움찔거렸다. 등골이 오싹해졌지만, 설마 누가 그런 비밀을 누설할 수 있었겠는가 싶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부회장님이 일반인이랑 결혼하는 게 좀 의아했지.”
다들 물 만난 물고기들처럼 활기차게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재경은 더 있다간 도결에게 곤란한 상황을 만들 것 같아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도 재경을 향해 집중되었다.
“근데 진짜 뻔뻔하지 않아요? 어떻게 살면 결혼으로 장사를 할 수 있죠?”
일부러 모두에게 들리라고 하는 말인 듯했다. 혀를 차는 소리를 들으면서 재경이 미간을 구겼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원래 호떡 뒤집듯이 바뀌는 게 당연하다고는 하지만, 이건 좀 너무 빠르다 싶었다.
‘여기서 반응하면, 지는 거야. 차재경. 일단, 모르는 척 자리를 피하는 게 유리해.’
재경이 가방을 들고 나서자, 다른 기자가 뒤통수에 대고 비아냥댔다.
“설마, 지금 도망치는 건가? 자기 이야기를 해서?”
노트북 가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기자실을 나왔다.
* * *
그녀가 향한 곳은 회장실이었다. 재경이 왔다는 말에 당황한 고 회장이 곧 점잖은 표정으로 재경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서 앉지.”
삭막한 분위기에서 재경이 할 말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오늘 기자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에 찾아보니까, 기사가 났더라고요.”
“비밀은 누설되면 안 된다고 했을 텐데.”
“저는 누설하지 않았습니다. 가족들도 알지 못해요.”
재경은 빠르게 선을 긋고 고 회장을 보았다. 고 회장은 내키지 않은 얼굴로 턱을 쓸었다.
“조용히 이혼하고 물러서.”
“역시.”
쓰게 웃는 재경을 보면서 고 회장의 눈빛이 번뜩였다. 재경은 조금도 겁먹지 않은 모습으로 꼿꼿하게 자리를 지켰다.
“회장님은 알고 계신 거죠? 누가 이 기사를 낸 건지.”
“허. 기자라서 그런가? 아주, 생사람을 잡는군.”
“합리적인 의심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녀는 한 치도 물러날 마음이 없다는 듯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그런 재경이 여전히 눈엣가시인지 고 회장이 미간을 찡그렸다.
“뭘 믿고 항상 이렇게 당당해?”
“저는 절 믿을 뿐입니다. 회장님께서 만약 진짜 모르셨다면, 당장 누가 이런 짓을 한 건지 찾으려고 하셨겠죠. 그런데 지금 회장님 반응은 너무 무미건조하시네요.”
“고작 그런 이유로 내가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건가?”
도결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몇 개월은 더 남아 있을 줄 알았는데. 재경이 생각했던 일 년이란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을 모양이었다.
“회장님께서 제게 원하시는 건 이혼뿐인가요?”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니. 비밀 누설에 대한 부분은 내가 손해 배상해 주지.”
“그럼, 당연한 돈이니까 받겠습니다.”
재경의 대답에 고 회장이 고개를 들어 기가 찬다는 눈으로 재경을 보았다.
재경은 눈물이 고인 눈으로 입술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북받쳐 오는 감정이 있었지만, 이곳에서 터뜨리고 싶진 않았다.
“왜요? 제가 안 받을 줄 알았나요?”
“그래. 고 부회장은 자네에게 진심이었으니까. 자네도 진심이었다면….”
“진심이라서 받는 겁니다. 이렇게 받아야만, 이혼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최 비서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고 회장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최 비서가 이혼은 너무 성급한 결정이 아니냐고 물었지만, 고 회장은 의지가 확고한 눈으로 재경을 노려보았다.
탁. 재경이 사라진 회장실에서 최 비서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이혼하게 되면, 계약서를 인정하는 것밖엔 되지 않습니다. 회장님.”
“알고 있네. 그래도 이번 기회에 갈라서게 해야 해. 부회장 하는 짓이 심상치가 않아. 일 년 뒤면 아마, 이혼은 없을 걸세.”
험악한 표정으로 말하는 고 회장을 보면서, 최 비서가 조용히 수긍했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 * *
집으로 먼저 돌아온 재경은 야경이 보이는 발코니에 나와 맥주를 마셨다. 시원한 바람이 그녀의 양 뺨을 스쳤는데, 그게 너무 서러워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고백하지 말걸. 조금만 더 참아 볼걸.”
부질없는 후회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몇 번을 되새김할 뿐이었다. 도결과 헤어지는 게 너무 싫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서러웠고 금방 울화가 치밀었다.
‘내가 뭐가 그렇게 부족한데!’
술에 취하면 취할수록 다시 억울해졌다. 나름대로 사랑받으며 자랐고,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다. 증여받은 재산이 없을 뿐이지 재경도 떳떳하게 살아온 선량한 시민 중 한 사람이었다.
물론 김 부장처럼 초고속 승진까지 하면서 인정받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같이 입사한 동기 기자 중에서는 가장 먼저 단독 기사를 썼고 나름 대접받는 기자였다.
“아악! 이 불공평한 세상, 그냥 확 망해 버려라!”
재경이 벌떡 일어나 밖을 향해 버럭 소리 질렀다. 그때 재경의 어깨 위로 도톰한 담요가 툭 올라왔다. 놀란 재경이 뒤를 돌아보자, 도결이 언제 왔는지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기웃거리는 재경을 보면서 도결이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데, 어디 있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어요?”
“아.”
재경의 얼굴이 순식간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워서 수치사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도결은 태연하게 두 손을 올려 재경의 눈물을 닦아 냈다.
“기사 때문에 많이 힘들었어요?”
“…알고 있었네요?”
떫은 재경의 목소리에 그가 미안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작게 까딱였다.
“우리 일인데 어떻게 몰라요.”
재경은 저를 바라보는 도결의 다정한 눈빛에 마음이 일렁거렸다.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오늘만큼은 꼭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오늘, 같이 잘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