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어제 일이 충격적이긴 한 모양이었다. 대놓고 험담을 하던 기자들이 슬금슬금 재경의 눈치를 보는 것을 보면 그랬다.
“차 기자님, 커피 마실래요? 아이스 아메리카노인데.”
언젠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보더니, 오늘은 누구보다 상냥한 모습이었다. 딱히 그들을 혐오하는 건 아니지만, 마음의 상처가 쉽게 아무는 건 아니었다.
“감사하지만, 오전에 커피를 마셔서요.”
그러곤 메일함을 열었더니, 더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보도 자료를 안 주고 연락까지 받지 않던 진성그룹 직원이 자필로 쓴 사죄의 편지를 사진으로 찍어서 메일로 보내왔다.
‘이렇게까지 사과할 필요는 없는데.’
심지어 새로운 담당이라는 직원은 보도 기사 자료가 아닌 발제 기사를 써도 될 만큼 큰 줄기의 자료를 넘겨주었다. 잘 부탁드린다는 메일을 확인하면서 재경이 이마를 잡았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사람들 입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건 조금 견디면 사라지는 일이지만 이렇게 메일을 받는 건 결이 달랐다.
여태 혼자서 만들어 온 커리어를 이런 식으로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물론 도결도 이런 방향을 원한 건 아니었겠지만.
한참 보도 기사를 쓰다가, 시간이 12시가 되었을 때였다. 오늘은 도결에게서 별다른 연락이 없어서 점심 식사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참이었다.
재경은 오늘따라 아쿠아리움에 있는 물고기를 구경하듯 저를 바라보는 기자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차 기자님.”
그때 다른 기자의 목소리에 재경이 노트북에서 시선을 뗐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도결이 슬쩍 손을 흔들었다.
“같이 식사하자고 하시는데요? 근데, 싸우셨어요? 왜 전화로 안 하시고.”
낯선 기자의 물음에 재경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가방을 쥐고 일어섰다.
* * *
점심시간에 찾아온 도결을 보고 놀란 재경은 물끄러미 그를 보았다. 평소처럼 부회장실에서 식사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끌고 온 곳은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었다. 생각지 못한 분위기에 머쓱해서 꼼지락거리는 재경이었다.
“오늘은 왜 레스토랑이에요?”
슬쩍 묻자, 그가 거리를 좁히며 재경을 바라보았다.
“듣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도결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낮게 대답하자, 그녀의 몸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내가 고도결 씨를 좋아하는 게 확실하긴 하구나.’
별것 아닌데도 도결을 보면 심장이 멋대로 쿵쿵쿵 뛰었다. 평소였다면 근무 중에 이런 식사는 부담스럽다고 거절했을 텐데. 오늘은 도결과 함께 온 근사한 레스토랑 분위기가 썩 마음에 들었다.
“아까 아침에 했던 말.”
사실 아침에는 그가 일부러 자신을 피하는 줄 알았다. 혹시나 제 마음을 벌써 눈치채고 피하는 건 아닌가 하고 걱정까지 했는데. 그런 시간이 무색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도결의 눈빛은 다정하기만 했다.
“아침에 했던 말이라니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했잖습니까.”
아침에 그 말을 뱉은 재경은 쑥스러워서 그의 시선을 피하고 있는데, 재경을 피해서 달아났던 도결은 집요하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혼이 빨려 나갈 것 같은 기분이라 재경이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네. 그게 왜요?”
“혹시 좋아한다는 그 사람이 접니까?”
재경은 물을 가득 채운 컵을 쥔 것처럼 온몸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혹시라도 그녀가 도결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대답하면, 당장에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 올 것만 같았다.
사실 그가 이렇게 직접 물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터라 재경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짝사랑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는데. 재경은 어째 이번에도 좋아하는 마음을 먼저 고백하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왜, 왜 그런 말을 해요?”
그녀는 괜히 말을 돌리려고 따지듯 물었는데, 마치 재경의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단숨에 대답했다.
“제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저 자신밖에 없어서요.”
“예?”
재경이 당황해서 고개를 기울이자, 준비된 아이스크림이 재경의 앞으로 놓였다. 새하얀 아이스크림 위에 꽂힌 반지를 보면서 재경이 눈을 깜빡였다.
“마음은 제대로 표현해야 할 것 같아서요.”
“표현하다니요?”
“정식으로 말하고 싶어서요. 좋아합니다. 차재경 씨를 좋아하고 있어요.”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도결의 고백에 재경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핑 돌았다. 아침에 제 고백을 서툴게 피하던 그의 모습에서 많은 것을 상상했던 재경이었다. 그 모든 서운함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끝이 보이는 사랑은 죽어도 싫었는데, 결국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더 재 볼 것 없이 도결을 사랑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기억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나도, 많이 좋아하고 있어요.”
재경은 얼마 만에 이렇게 활짝 웃어 보는 건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당장 세상이 반으로 쪼개진다고 해도 억울할 것 같지 않은 기분이었다.
* * *
백 비서는 심각한 표정으로 도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회장실에 끌려간 이유가 단순히 웨딩 사진 때문인 줄 알았는데,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인터넷에 누가 계약서를 올렸더군. 부회장 결혼으로 주목을 많이 받았는데. 이번 결혼식이 전부 계약이란 걸 알면, 주가 하락은 더 심각해지겠지.”
안 그래도 이번 신제품 유출 문제로 주가 하락을 막지 못한 상태였다. 준비 중인 신기술을 추가해서 론칭할 것인지, 지금 있는 신제품을 더 빠르게 론칭할지를 두고 논의 중에 있었다.
여기서 계약 결혼 문제까지 터지면, 론칭은 더 뒤로 밀릴 것이 분명했다.
“백 비서님. 지금 해당 게시글 올린 사람이 아이디를 탈퇴했다고 뜨네요.”
“사진 유포는요?”
“못 막았습니다. 게시글은 지워진 상태인데. 누가 저장이라도 했으면….”
때마침 상기된 표정으로 나타난 고도결 부회장이 보였다. 백 비서는 어두워진 표정으로 도결에게 다가갔다.
“식사는 편안하셨습니까?”
“네. 덕분에요. 근데 분위기가 왜 이래요?”
도결이 금방 상황을 판단하고 묻자, 백 비서는 얼른 제가 알고 있는 것들을 보고했다.
* * *
명성을 쌓는 시간은 오래 걸려도, 명성을 잃는 건 하루아침인 모양이었다.
여기저기에서 도결이 계약 결혼을 했단 말이 찌라시로 퍼지고 있었다. 재경이 있던 단체 메시지 방에서도 찌라시가 도는 것을 보면,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모양이었다.
“사모님, 오늘은 먼저 퇴근하셔야겠습니다.”
백 비서는 혹시 모르니까, 경호원과 함께 돌아가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재경은 고집을 피울 때가 아니란 걸 인지했고, 백 비서의 말에 따라 경호원과 함께 차에 올라탔다.
이제 막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것이 무색하게 도결은 늦은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재경은 그게 내심 아쉽게 느껴졌다. 이제 막 사랑을 확인한 연인들치고는 퍽 가혹한 신세였다.
맥주 캔을 쥐고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도결을 기다리던 재경은 밤 열두 시가 지나서야 그를 볼 수 있었다. 지친 표정으로 나타난 그는 재경을 보고 살짝 놀란 눈치였다.
“왜 안 자고 기다렸어요?”
마치 기다리지 말지 그랬냐는 듯한 물음에 재경은 입을 꽉 다물었다. 그가 준 반지는 아직 재경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데 그의 반응은 벌써 좀 달라진 듯했다.
“남편이 늦으면 부인이 기다리는 게 당연한 거 아녜요?”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늦는다고 기다려요. 내일부터는 먼저 자요.”
“왜요? 내가 기다리는 게 부담스러워요?”
재경이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고 묻자, 도결이 피곤하다는 듯 거칠게 눈을 비볐다.
“나 때문에 재경 씨까지 힘든 거 보고 싶지 않아요.”
“이게 왜 고도결 씨 때문이에요?”
의아한 목소리로 묻는 그녀를 보며 도결이 제 얼굴을 쓸었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재경은 자신을 꽉 안아 주는 그의 시원하고 달콤한 체취를 맡았다. 부드럽게 토닥이는 그의 손길에서 그가 얼마나 자신을 그리워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밥은 먹었어요?”
“아니요. 피곤해서 자고 싶어요.”
“…그래요, 그럼.”
재경이 아쉬워하는 목소리를 하자, 그가 희미하게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살짝 재경에게서 떨어져, 그녀의 이마 위에 키스했다.
“같이 잘까요?”
그의 물음에 재경의 심장이 주책맞게 요동쳤다. 오랫동안 그를 기다렸지만, 재경은 끝내 고개를 저었다.
“아뇨. 피곤하다면서요. 괜히 피해 주고 싶지 않아요.”
* * *
주혁은 찌라시가 결국 기사로 터지자 분통을 터뜨렸다. 제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원흉에게로 그 모든 분노가 쏠린 탓이었다.
“이딴 기사 하나 못 막는 주제에.”
화가 난 주혁이 화단에 핀 꽃을 한 송이 꺾어 들고 도결을 찾은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주혁의 전화를 받은 도결이 회사 앞 카페로 나왔고, 주혁은 쥐고 있던 꽃을 도결에게 던질 수 있었다.
“이게 뭡니까?”
“화단에서 꺾어 온 꽃입니다.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죠.”
도결을 무섭게 쏘아보면서 주혁이 이를 갈았다. 도결은 제게 버려지듯 던져진 꽃을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고작 이런 선물을 주려고 부른 건 아닌 것 같은데. 날 찾아온 이유가 뭡니까?”
“하. 화단에 있는 꽃이 예쁘다고 꺾으면 무슨 꼴이 나는 줄 아십니까?”
그 질문을 들은 도결은 제 앞에 볼품없이 놓인 꽃을 바라보았다. 뿌리가 잘린 꽃은 아직 싱싱한 모습으로 보였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시들게 될 거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굴 위해 하는 말입니까? 한은화 차장? 아니면….”
“당연히 차재경이지. 그 녀석이 왜 그런 미련한 선택을 했는진 모르겠지만. 난 재경이가 돌아오면 받아 줄 겁니다.”
그 순간 도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김 부장님, 경솔한 언행은 위험한 일을 만드는 법입니다.”
“하아.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계약서 하나 관리 못 해서 이 사달을 만드신 겁니까?”
도결은 가만히 주혁을 응시했다. 제 앞에 있는 이 남자가 어떤 감정으로 저를 찾아왔는지 궁금했다.
“혹시 아쉬워서 그래요? 재경 씨가 내게로 와서?”
“하아. 고작 1년뿐인 결혼 생활, 안 부럽습니다. 난 다른 사람과 결혼해도 절대 재경이와 멀어질 생각이 없었으니까.”
소름 끼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는 주혁을 보면서 도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대할 가치가 없는 분이었네요.”
“글쎄요. 재경이 인생을 멋대로 꺾어 버린 당신보단 내가 조금 더 가치 있는 사람이지 않을까요?”
그렇게 말한 주혁은 자신이 꺾어 온 꽃을 도결의 손에 억지로 쥐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