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도결이 운전하는 차 안은 고요했다. 그가 서툴게 재경의 눈치를 살피며 음악을 좋아하냐고 물었지만, 재경은 그냥 조용히 가고 싶다고 대답했다.
“이번 일로 많이 바쁜 것 같던데. 어쩐 일로 왔어요?”
정적을 깨고 입을 연 재경 덕분에 굳어 있던 그의 얼굴이 조금 환해졌다.
“걱정돼서요.”
“너무 안 어울리는 대답 아니에요? 항상 회사가 먼저인 사람이면서.”
재경이 황당하다는 듯 웃으며 창문을 내리자, 그의 미간이 구겨졌다. 자신이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지만, 그래도 이게 진심이었다.
“차재경 씨는 왜 거기 있었어요?”
도결의 물음에 재경이 창문을 닫고 가만히 정면을 응시했다.
“고도결 씨도 내가 선배를 못 잊어서 거기 간 것 같아요?”
여전히 직설적인 재경의 질문에 그가 이도 저도 못 하고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제 마음은 그녀가 그런 남자에게 돌아간 게 아니기를 바랐지만, 처음부터 그 남자 때문에 제게 하룻밤을 제안한 재경인 걸 알기에 얼른 아니라는 말을 뱉을 수가 없었다.
“…….”
대답하지 못하는 도결을 보면서 재경이 피식 웃었다.
“대기업 후계자란 사람이 왜 그렇게 정직해요? 표정으로 말하네.”
“재경 씨 앞에 서면 나도 모르게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요.”
“네?”
“난 처음부터 의견이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어요. 개인적인 감정으로 어떤 일을 선택할 필요도 결정할 이유도 없었다고 봐야 옳겠죠.”
도결은 남보다 더 월등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가지고 살았으며, 인간관계를 맺을 때도 회사의 이득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정했다. 재경은 그런 도결을 해방시킨 유일한 사람이었다.
“크흠. 난 너무 오래 짝사랑을 했어요. 선배는 항상 다른 곳을 보고 있었고, 난 항상 선배 뒤에서 기다렸어요. 오늘은 제발 뒤를 돌아봐 주길 기대하면서.”
도결은 핸들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못했다. 혹시라도 재경이 그에게 돌아가고 싶단 말을 하고야 말까 봐. 그게 두려워서 비겁하게 피하고 있었다.
“…….”
그런 그의 마음은 상관없다는 듯 재경이 창가에 머리를 기대며 중얼거렸다.
“선배를 못 잊어서 가는 게 아니에요. 오랜 시간 혼자 견뎌 내야 하는 시간이 많았단 말을 하고 싶었어요. 혼자서 견뎌 내는 시간이 전부 저곳에 있어서 나는 힘이 들 때면, 저곳이 생각나요.”
재경의 서글픈 목소리가 왜 이렇게 그의 마음을 간질이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의 슬픔이 기쁨이 되어선 안 된다는 걸 아는데, 알면서도 자꾸 제게 기회가 주어졌단 사실이 흥분될 뿐이었다.
* * *
한편, 한서일보 한 사장실에서는 난리가 났다.
점잖던 한 사장이 분노를 못 참고 사무실에 있는 물건들을 전부 깨고 부수는 바람에 소란스러웠다. 이런 와중에도 한은화만큼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있었다.
“넌 도대체 뭐가 그렇게 다 잘났어?”
유리 파편을 차갑게 응시하는 한은화 차장을 보면서 한 사장은 결국 손까지 올리고야 말았다.
짝!
뺨이 돌아간 은화는 독기가 그득한 눈빛을 하고선 제 부친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한 사장은 저를 부라리며 노려보는 딸에게 정이 떨어졌다는 듯 자리에 앉았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고 부회장이랑 결혼해.”
“전에도 말했잖아요. 결혼은 싫습니다.”
“왜? 김 부장인가 뭔가 하는 그 새끼 때문에 그래?”
그 말에 은화가 코웃음을 쳤다. 당치도 않은 말을 하니, 우스울 뿐이라는 듯 당당했다.
“내가 한번 권력이 뭔지 보여 줘? 그 새끼를 얼마나 짓밟아 놓으면 정신 차릴래?”
“한 사장님, 그거 너무 안일한 생각이세요.”
“하, 설마 지금 내가 잘못 짚었단 거냐?”
“아뇨. 그 사람이랑 사귄 거 맞아요. 헤어진 것도 맞고. 근데 그게 꼭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하세요?”
은화는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욕심이 많았고 승부욕도 강했다. 가질 수 없으면 망가뜨려서라도 가져야 하는 성격이었는데, 그게 보통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인형 같은 게 아니었다.
커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들이 있는 집안에선 흔히 가업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기 마련인데, 여자인 은화가 빈틈을 보이지 않으니 사내놈들이 맥을 못 추고 다들 기가 빠졌다.
“어차피 누나가 이어 가게 될 것 녜요. 저는 그냥 지분이나 주세요.”
“경영이요? 은화 성격 모르세요?”
두 아들놈이 치를 떠는 만큼, 은화를 치워 버려야 했다. 더 큰물에서 놀면 될 것을 왜 하필 이 한서일보에 목을 매는 건지.
“그냥 가지고 놀았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못 믿겠으면, 당장 그 사람 목에 칼을 대고 다시 물어보세요. 난 딱히 감흥 없으니까.”
한 사장은 기다렸다는 듯, 얼마 전 주혁과 만난 은화의 사진을 툭 내밀었다. 이래도 발뺌할 거냐는 눈으로 은화를 보자, 그녀가 재밌어 죽겠단 얼굴로 사진을 집어 들었다.
“이 사람 참 재밌지 않아요?”
은화의 말에 사진을 다시 내려다본 한 사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애절한 김주혁과 달리 은화는 싸늘한 눈빛이었다.
“나까지 속일 필요 없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 망가지는 걸 원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사랑이요? 한 사장님, 감 많이 떨어지셨다.”
은화는 제 부친이 보는 자리에서 사진을 곧장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날 이용하려고 드는 꼴이 같잖았어요. 한 사장님이랑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더라고요.”
“똑같은 생각?”
“여자는 가업을 이어받지 못할 거란, 개 같은 생각. 난 진성그룹 회장 자리를 줘도 안 받아요. 오직 내 가업을 이어 갈 생각이거든요. 한 사장님도 그 자리에 계시니까, 제 마음 이해하시죠?”
가볍게 웃고 떠나는 한은화를 보면서 한 사장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더 늦장을 피워 봐야 좋을 게 없는 상황이었다.
‘저 고집에 고 부회장을 유혹할 것 같지는 않고. 후. 진성에서 마음 바뀌기 전에 어떻게든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해.’
* * *
오늘도 당연히 재경을 기다릴 생각이었던 도결은 자신의 방문 앞에 서 있는 재경을 보고 놀랐다. 그러면서도 괜히 태연한 척 재경에게 말을 걸었다.
“일찍 준비했네요?”
“그냥, 잠이 잘 안 와서요.”
고작 그 한마디에 도결이 무너져 내렸다.
“어디 아픈 거면, 좀 쉬는 게 어때요?”
“아, 아픈 건 아니에요. 그냥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
“소문 때문에 그래요? 아니면, 내가 어제 한 말 때문에….”
도결이 안절부절못하며 말이 많아지자, 재경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별것 없다는 듯 그의 단단한 팔을 툭 밀었다.
“어제 주혁 선배가 그러더라고요. 돌아올 수 없냐고.”
“돌아갈 생각입니까?”
딱딱해진 그의 음성은 화가 난 건지, 화를 참는 건지, 아무렇지 않게 묻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재경은 그가 신경 쓰였지만, 솔직해지고 싶었다.
“아뇨. 그 질문을 들었을 때, 딱 깨달은 게 있어서요.”
의아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도결을 향해 그녀가 작게 손짓했다. 몸을 좀 숙여 보라는 의미였다.
도결이 몸을 굽혀 재경의 입술 근처로 귀를 가져다 대자, 그녀가 피식 웃었다. 옅은 숨결과 달콤한 향기에 도결이 몸을 떨었다. 그러자 재경이 기다렸다는 듯이 작게 속삭였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좋아하는 사람이라니요?”
놀란 그의 눈이 커지자, 재경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뭘 그렇게 놀라요? 난 뭐 계속 주혁 선배만 좋아해야 되는 거에요?”
장난스러운 재경의 물음에 침을 삼킨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 너무 당혹스러워서요. 혹시 좋아한다는 사람이 제가 아는 사람이에요?”
“으음, 아무래도 아는 사람이겠죠?”
그 순간 그는 빠른 걸음으로 재경을 피해 버렸다.
“왜 그냥 가요?”
재경이 갑자기 자신을 피하는 도결을 잡고 물었지만, 그는 흔들리는 눈빛을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나서요. 오늘은 따로 갑시다.”
“네? 나 지금 출근 준비 끝났는데요?”
아차 싶었는지, 그가 서둘러 핑계를 댔다.
“오늘은 방향이 다를 것 같아서요.”
“그래요. 그럼.”
뭔가 아쉬운 표정을 짓는 재경을 보면서 도결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같이 있고 싶었던 재경인데. 오늘은 같이 있는 시간이 두려워졌다. 재경의 입술로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는 건 어떻게든 미루고만 싶었다.
* * *
회사에 출근한 도결은 계속해서 백 비서의 얼굴을 보았다. 너무 빤히 바라보는 바람에 도저히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부회장님? 혹시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서류를 내려놓으면서 백 비서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도결은 태연하게 서류를 집어 들고선 잘라 말했다.
“아닙니다.”
그렇게 대답하기 무섭게 또다시 도결의 눈은 백 비서를 향해 있었다. 부담스러워진 백 비서가 머뭇거리다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 있는 겁니까?”
어제 오후 도결의 지시대로 백 비서는 회사 게시판에 웨딩 사진을 올렸다.
회장이 그걸 보곤 백 비서를 호출했다. 백 비서는 안 그래도 예민한 상태인데 도결까지 빤히 바라보니까, 죽을 맛이었다.
“그냥 하실 말씀이 있는 거면 빨리 해 주시죠. 제가 10분 뒤에 회장님 뵈러 가야 하거든요.”
평소답지 않게 백 비서가 호소하자, 그게 통한 건지 도결이 느릿하게 질문을 해 왔다.
“제가 잘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도결의 물음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백 비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는 사람이요? 그걸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요?”
“크흠. 차재경 씨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하는데. 그게 나도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해서요.”
그 말에 백 비서가 한숨을 쉬며 이마를 꽉 잡았다.
“그건 당연히 부회장님을 두고 하신 말씀이잖아요. 그게 아니고서야 남한테 그런 말을 왜 꺼내겠어요? 도움이 안 될 텐데.”
그 뒤 백 비서는 편한 마음으로 서류를 정리했다. 도결은 백 비서의 말에 당황해서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귀만 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