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60)

<44화>

“부회장님, 혹시 화나셨습니까?”

다음 날, 평소보다 유난히 발걸음이 빨라진 도결을 쫓아오던 백 비서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도결은 슬쩍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출근할 때 분명 함께 차를 탔는데, 재경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기다렸지만, 백 비서 뒤로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마음이 허전해졌다.

“아, 그게. 사모님은 가방을 들고 저쪽 비상계단으로 내려가셨습니다.”

“비상계단?”

“아무래도 엘리베이터는 직원들이 많이 이용하다 보니까….”

백 비서는 이런 보고를 할 때마다 도결의 눈치가 보였다. 요즘 부회장은 재경에 관한 일에 극도로 감정적이었다.

‘원래 사랑을 하면 다들 눈에 띄게 변하는 건가? 아니지. 그럼 우리 부모님은 뭐야? 죽고 못 살아서 결혼하셨으면서, 황혼 이혼이네 어쩌네 하시는데.’

“지금 보이는 것만 여덟 대인데. 탈 게 없어서 계단을 이용한단 겁니까?”

도결의 물음에 백 비서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실 보이는 것이 여덟 대인 거지, 다른 방향에도 몇 대 더 있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소문을 잠재우는 방법은 본래 그런 것인데. 백 비서는 재경이 직원들을 피해 다니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사모님께서 워낙 지혜로운 분이셔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요즘 세상은 계단으로 다니는 걸 지혜롭다고 하는 모양이죠?”

“아무래도 시선이 불편하셨을 겁니다. 그래도 자기들끼리 실컷 떠들다 보면, 지겨워서 사그라드는 게 소문이기도 하잖습니까.”

백 비서의 말에 도결이 미간을 구겼다. 제 사람이 도마 위에 올라 팔딱이는 걸 아는데,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할 수 없었다. 그게 차재경이라면 더더욱.

“됐고. 차재경 씨가 내 부인이라는 걸 사내 전체에 소문내세요.”

“예?”

도결의 말을 듣자마자 백 비서는 고 회장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절대 가만히 넘어가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상사인 도결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쉽게 그렇게 하겠단 대답이 안 나왔다.

“내가 할까요? 내가 직접 사내 게시판에 웨딩 사진이라도 올려야 속이 시원하겠어요?”

도결의 물음에 백 비서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   *   *

주혁은 먼저 자리 잡고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는 재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함께 올 땐 항상 모둠전을 시켰는데, 오늘은 연근전 하나만 달랑 있는 상차림이었다.

재경이 원래 저런 표정을 지을 줄 알았던가? 화가 난 표정으로 막걸리잔을 잡는 재경의 얼굴을 보면서 주혁이 다가가 알은척을 했다.

“네가 어쩐 일이야. 부르지 않으면 나타나질 않더니.”

“짜증 나는 일이 있는데. 갈 곳이 여기뿐이라서요.”

생각보다 멀쩡한 재경이 빈 잔을 탁 소리 내며 내려놓았다. 주혁은 늘 조심스럽게 잔을 내려놓는 재경만 봐 왔던 터라 이 모습이 낯설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누가 감히 이 성질 더러운 지렁이를 밟았을까?”

“지렁이요?”

황당해서 고개를 드는 재경을 보면서 주혁이 아이처럼 웃었다.

“이제야 날 좀 보는구나.”

“선배는 사람이 화가 났는데 놀리고 싶어요?”

“네가 화났다고 나까지 덩달아 심각해질 필요는 없잖아.”

그렇게 말하는 주혁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기운이 없고, 약간 갈라진 것을 보니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였다.

“한 차장님이 아직도 안 만나 줘요?”

불과 작년 크리스마스만 해도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재경이었다. 

주혁이 다른 사람에게 프러포즈하는 모습을 목격한 것만으로도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아팠는데. 그런 자신이 지금은 주혁에게 연애 상담을 해 주고 있었다. 

“참, 변했다. 너.”

세상 모든 사람이 재경의 짝사랑을 몰랐어도 단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남몰래 주혁을 사랑했던 재경과 그 사랑을 남몰래 받았던 주혁. 주혁은 지금 예전의 재경을 그리워하면서 꺼낸 말이었다.

“그러게요. 참 많이 변했네요. 나.”

불과 작년만 해도 주혁이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던 재경이었다. 그래서 그날 밤, 취기를 빌려 도결을 붙잡았다. 그가 오해하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재경은 주혁에게 매달리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런 상상을 하고 보니까, 도결을 만나길 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구차한 자신을 보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었다.

“넌 내가 그립지 않았니?”

갑작스러운 주혁의 물음에 재경이 빈 잔에 막걸리를 따르며 피식 웃었다.

“그리워할 만한 추억이 있어야 그립죠.”

“난 우리가 제법 추억을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주혁이 씁쓸한 표정으로 재경을 보았다. 예전이었다면, 주혁의 이런 표정을 두고 오만가지 생각을 했었을 게 뻔했다. 주혁의 마음이라든가 기분이라든가. 멋대로 주혁을 예상하고 추측하면서 제 짝사랑에 희망을 품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주혁과 눈이 마주쳐도 몸이 달아오르지 않았고, 대화하면서 집중할 수도 없었다. 주혁과 대화하는 이 순간에도 도결을 떠올리는 것을 보면,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그래요? 난 선배랑 추억 같은 거 없는데.”

“여자들은 원래 다 그렇게 매정하니?”

뭐가 그렇게 속이 상했는지 주혁이 갑자기 재경의 잔을 빼앗아 들고는 벌컥벌컥 막걸리를 마셨다. 

그러자 잔을 빼앗긴 재경이 뺨을 때릴 기세로 번쩍 손을 올렸다. 놀란 주혁이 재경의 손을 바라보자, 재경이 소리를 질렀다.

“사장님! 여기 막걸리랑 잔 하나 추가요!”

“하.”

제 뺨을 잡은 주혁이 헛웃음을 보이자, 재경이 눈썹을 실룩거렸다.

“내가 여기 온 건 선배랑 추억이 생각나서 오는 게 아니에요.”

“그랬니.”

“네. 그냥 이곳은 제 삶의 일부였던 거예요. 지금 제가 선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제 과거를 전부 삭제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주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웃자, 재경이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

“선배가 한 차장님이랑 데이트할 때, 전 여기 있었어요. 선배가 바쁘다고 멋대로 약속을 취소할 때도 전 여기 있었고요. 제가 힘들 때 위로해 준 장소가 여기거든요.”

혼자 있는 재경이 자신을 떠올려서 여기 왔다고 생각한 주혁은 살짝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였다.

“몰랐네.”

“이럴 땐, ‘몰랐네’가 아니라 사과를 해야죠. 항상 나한테 이런 식이었어요. 선배는.”

“그래, 내가 좀 못됐다.”

주혁이 싸우기 싫다는 듯 얼버무리자, 재경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는 원래 누구에게도 의지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주혁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게 딱히 서운하지 않았었다. 그런데도 문득문득 서러울 때가 있었다. 그래서 더 짝사랑에 오기를 부렸는지도 모르겠다.

“양보하기 싫으니까, 선배가 양보해요.”

“설마, 이 전집을 양보하란 거야?”

“네. 여긴 제가 힘들 때 오던 곳이니까. 선배가 다른 장소를 찾아보세요.”

잔을 비우는 재경을 물끄러미 보던 주혁이 한숨을 쉬었다. 눈길마저 차가워진 재경을 보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재경은 주혁에게 등대 같은 사람이었다. 어두운 밤바다 같은 제 인생에 재경은 늘 불빛을 비춰 주었다. 마치 지쳐 있는 주혁에게 무너지지 말라고 위로해 주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재경이 평생 제 곁에 남아 있을 줄 알았다. 자신이 다른 사람을 만나고 결혼을 해도 재경만큼은 제 옆에 있을 줄 알았는데….

“계속 같이 쓸 순 없는 거니?”

“선배라면 힘들 때 오는 장소를 나눠 쓸 수 있어요?” 

“예전엔 같이 왔잖아. 우리.”

그 순간 재경의 입술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그래서 더 싫어요. 선배는 한때 절 가장 아프게 한 사람이니까.”

주혁과 이곳에 왔을 때, 단 한 번도 위로를 받는 기분을 느낀 적 없었다. 오히려 불안하고 초조하기만 했지. 

재경은 이런 관계도 오늘로 종지부를 찍고 싶었다. 도결을 좋아하는 마음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오직 그녀의 짝사랑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싶었다.

“난 이제 싫어요. 선배랑 엮이는 거.”

“남편 때문에 미안해서 그러는 거라면….”

주혁의 말에 재경이 싸늘하게 주혁을 노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지금?”

“돌아올 수 없냐고 묻는 거야. 다시 날 좀 좋아해 달라고. 네가 이혼을 하든 안 하든 신경 쓰지 않을게. 그냥 예전처럼….”

“예전은 없어요.”

재경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혁이 다급하게 그녀를 붙잡았다. 

“예전처럼 하는 게 힘들면, 그냥 좋은 선후배로 지내도 괜찮아.”

늘 자신감으로 가득했던 주혁이 애원하듯 재경의 손을 붙들었다. 예전이었다면 벌써 주혁의 말에 흔들리고도 남았을 텐데, 오늘은 차갑게 손을 빼낸 그녀였다. 

재경은 지갑에서 오만 원을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렸다.

“여긴 앞으로 선배가 쓰세요. 난 이제 불편해서 못 오겠으니까.”

빠른 걸음으로 떠나는 재경을 보면서 주혁이 주먹을 꽉 쥐었다.

*   *   *

재경이 전집에서 나오자, 문 앞에 있던 도결이 고개를 돌렸다. 당황한 그의 눈은 이 모든 상황을 다 본 것 같았다. 재경은 도결을 무시하고 지나갈까 하다가 결국 먼저 말을 걸었다.

“이 허름한 전집엔 무슨 일로 왔어요? 설마 또 사람 붙였어요?”

직설적인 재경의 질문에 놀란 건지 그가 재경을 보면서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냥 생각나서 와 봤어요. 지난번에 여기 있었잖아요.”

“지난번?”

재경은 천천히 필름이 끊겼던 날을 떠올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가 여기까지 왔을 줄은 몰랐는데.

“잘됐네요. 마침 집에 가고 싶었는데. 백 비서님은 어디 있어요?”

앞서 걷는 재경을 따라 걸으면서 도결이 조용히 대답했다.

“혼자 왔습니다. 차재경 씨가 술 취한 모습,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 주기 싫어서.”

잔잔한 목소리로 대놓고 질투한다는 티를 팍팍 내는 도결이라니. 놀란 재경이 뒤를 돌아보았다. 

“고도결 씨, 지금 질투해요? 원래 이런 캐릭터 아니잖아요?”

“도대체 날 그동안 어떻게 생각한 겁니까? 난 뭐 성인군자입니까?”

“뭐 꼭 질투가 아니더라도. 이상하잖아요. 운전은 기사님이 해야 하고, 일정은 비서님이 짜 줘야 하는 분이 여기까지 혼자 왔다고 하니까.”

“그러게요. 나 이런 사람이 아닌데. 자꾸 변하게 만드네요, 차재경 씨가. 타요.”

순식간에 그녀를 지나쳐서 자동차 앞에 선 도결이 조수석 문을 열었다. 재경은 그런 도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변한 모습이 나쁘지는 않네요. 오히려 좀 인간적인 것 같달까요.”

그렇게 답한 뒤 냉큼 차 안으로 사라지는 재경을 보고 그가 미간을 구겼다.

‘그래서 변한 게 좋단 거야? 싫단 거야?’

재경의 한마디에 놀아나는 자신이 싫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심장이 뛰었다. 단둘이 차에 타는 게 뭐 그렇게 특별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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