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60)

<43화>

재경은 요즘 평범하게 복도를 지나가는 것도 불편했다. 사람들의 시선 때문이었다. 삼삼오오 모여 떠드는 소리에 자꾸 예민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피해 의식이려나.’

어쨌든 곤혹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비상계단을 내려가던 재경은 1층 아래에 모여 있는 청소 팀 직원들을 발견했다. 안 그래도 소문이 나기 전부터 재경을 피해 다니던 직원들이었다.

‘혼자 있을 만한 곳이 없구나. 후.’

태연하게 지나쳐 갈 생각이었는데, 아래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으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기사 봤어요? 여태 회사에 산업 스파이가 있었던 모양이던데.”

“봤지. 난 지인들한테 전화도 몇 통이나 받았어. 지금 여기저기서 난리라던데.”

“그래서 그 산업 스파이가 누구래요?”

“아, 왜. 그 연구실에 계약직으로 있던 사람.”

연구팀에 있던 영란이 한 짓은 용서될 만한 일이 아니었다. 백 비서가 따로 프린트해 준 보도 자료를 보면, 진성그룹 법무팀에서 영란에게 소송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진성그룹의 피해액이 상당한 것 같았다.

“거, 같이 다니던 기자 있잖아. 한서일보 기자. 거기서 썼다더라고….”

“뻔뻔해도 유분수지.”

“어우, 난 소름 끼쳐. 며칠 전에 나한테 뭐 알아낼 것 없나 친근한 척 굴더니. 이럴 줄 알았어.”

재경은 억울했다. 그들에게 산업 스파이짓을 한 적 없었다.

“자기한테도 그랬어? 나한테도 그랬는데.”

떠들어 대던 사람들이 계단에서 내려오는 재경을 힐끗 보고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들의 침묵은 재경이 그들을 지나칠 때까지만이었다.

“저 사람이지?”

“응. 맞어. 저 사람.”

재경이 다시 고개를 돌려 그들을 보자, 서로 시치미를 뚝 떼며 모르는 척하기 바빴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드는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그런 기사 써서 얻을 게 뭐가 있다고 스파이를 도와요?’하고 따지고 싶은데, 믿어 줄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 같아서 입술을 닫았다.

“…….”

침묵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신중한 침묵이 있듯 교활한 침묵도 있는 법이었다. 

신중한 침묵이 상대를 존중하기 위함이라면, 교활한 침묵은 상대를 기만 또는 당혹스럽게 할 의향이 있는 태도였다. 재경이 하는 이 침묵은 두 가지와는 의미가 달랐다.

더 나은 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침묵하는 거였다.

“혼자 다니는 걸 보니까, 벌써 소문이 다 돈 모양이지.”

*   *   *

자리로 돌아온 재경은 일단 급한 불을 껐으니까, 그것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보도 자료를 받아 온 것으로 기사는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도 믿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서운했다.

‘아니, 아무리 내가 낯선 사람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믿어 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냐?’

영란과 친하게 지내서 피해를 받은 이는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같이 밥을 먹었던 사람들은 이미 전부 찍혀서 고생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렇다고 찍힌 사람들끼리 모이자니, 그것도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한 번 찍힌 사람들끼리 계속 몰려다닐 수는 없었다. 더 의심을 받을까 봐 걱정도 되고, 서로가 의심되기도 하니까.

“그치? 진짜 뻔뻔하다.”

소곤거리는 소리가 다시 또 재경의 귀에 들어왔다.

“기사 봤지? FUK그룹 기사.”

“아, 거기 신 본부장이 여기자들한테 악명 높다고 들었어요.”

“그런데도 기사 썼으면, 뻔한 거죠. 대단한 사람이에요, 정말. 우리랑은 다르다니까요.”

재경은 그들에게서 나오는 자신의 이야기들을 전부 그만 듣고 싶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참는 것엔 다 이유가 있었다. 괜히 지금 나서 봐야 긁어 부스럼이 될 게 뻔하니까 참는 거였다.

“아, 나 아는 한서일보 기자가 그러는데. 차 기자, 익명 게시판에서도 유명했었다더라?”

“어? 그 얼마 전에 올라온 사진 말하는 거예요? 저도 들은 것 같은데.”

점차 소문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결국은 참지 못한 재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드르륵 소리와 동시에 여태 저를 두고 험담하던 기자들이 일동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당황한 재경을 두고 고개를 꾸벅 숙이는 기자들 때문에 재경도 덩달아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고도결 부회장이었다.

“부회장님이 여기까진 어쩐 일이세요?”

기자 중에 가장 연차가 높은 기자가 먼저 나서서 도결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특별한 기삿거리가 있나 해서 눈을 반짝이는 모습이었다. 재경은 껄끄러운 눈으로 도결을 본 뒤 자리에 앉았다.

한마디 하려고 했는데, 왜 하필 이때 들어와서는.

“다름이 아니라, 회사 안에 이상한 소문이 퍼지는 것 같아서 왔습니다.”

“아이고! 괜찮습니다. 전부 신제품 유출 기사 때문에 그런 거죠. 뭐.”

그렇게 말하면서 기자는 재경을 찌릿 노려보았다. 재경은 어이가 없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지만, 참기로 했다. 도결 앞에서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런데 고작 그런 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

다른 기자들이 슬쩍 도결에게 말을 붙였다. 출입처에서 보도 자료를 모든 출입 기자에게 공평하게 보내 주긴 하지만, 결국 어떤 정보를 섞어 기사를 써 이슈를 만드느냐는 기자 개인의 역량에 달린 일이었다. 

다들 도결에게 잘 보이려고 한마디씩 건네는 와중에 재경만 조용히 제 노트북을 바라보고 있었다.

“개인적인 일로 왔습니다.”

소문에 관한 말을 꺼냈던 것치고는 굉장히 의외의 말이었다. 다들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인데, 재경만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설마 내가 짐작하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

“아니, 부회장님께서 개인적으로 오실 일이 뭐가 있으시다고요?”

“그동안 부인께서 워낙 자제해 달라고 부탁을 해서 말을 못 했었는데.”

“부, 부인이요? 사모님?”

기자들이 당혹스러운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기야 갑자기 나타난 부회장이 부인을 찾으니, 얼마나 황당할까. 

재경은 서둘러 노트북을 정리하고 가방을 챙겼다. 그러곤 그가 더 말을 꺼내기 전에 도결을 노려보았다.

“크흠. 저는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재경이 도둑고양이처럼 달아나려 하자, 다른 기자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제가 또 곤란하게 한 건가요? 차 기자님?”

도결은 그런 재경을 보면서 눈웃음을 보였다.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도결의 눈빛에 재경이 머뭇거렸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기자들이 어색하게 재경에게 말을 건넸다.

“차 기자, 거, 너무하네. 그래도 진성그룹 부회장님이 와 계신데 갑자기 퇴근이라니. 예의는 차렸으면 좋겠어.”

“그러게요.”

도결의 눈치를 본 다른 기자들이 재경에게 쓴소리를 하자, 표정이 굳은 도결이 나서서 손을 흔들며 막아섰다.

“괜찮습니다. 제가 또 못 참고 나서서 난처해진 모양입니다.”

“예?”

당황하는 기자들을 보면서 그가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결의 손이 자연스럽게 재경의 어깨에 닿았는데, 이는 명백히 사람들 앞에서 재경이 그의 부인이라는 사실을 밝히려는 의도처럼 보였다.

“고도결 씨.”

당황한 재경이 서둘러 그를 막아 보았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도결이 말하기 전에 그들의 뒤에 선 백 비서가 먼저 말을 꺼냈다.

“사모님. 모시러 왔습니다.”

다들 이 황당한 상황에 입이 벌어졌다. 모두 부회장님의 사모님이 왜 여기 있느냐는 표정이었다. 

산업 스파이랑 한 팀을 먹었다가 잘릴 줄 알았던 차 기자가 사모님이었다니, 놀랄 만도 했다.

“아니, 이게 다 무슨 소리예요?”

놀란 기자가 다른 기자에게 묻자, 듣고 있던 백 비서가 태연하게 재경을 두 손으로 공손히 가리키며 말했다.

“차재경 기자님은 얼마 전 고도결 부회장님과 결혼식을 올리신 분입니다. 사모님이시죠.”

그러자 지금까지 재경을 경멸했던 기자 한 명이 앞서 나와선 못 믿겠다는 눈으로 백 비서 앞을 가로막았다. 팔짱을 낀 모습은 아까와 똑같았다.

“믿을 수가 없겠는데요? 재벌가 사모님이 뭐가 아쉬워서 산업 스파이랑 붙어먹어요?”

“그러니까 전부 거짓 소문이지요.”

백 비서는 간결하게 재경의 소문을 사실무근으로 정리했다. 이는 도결이 원한 시나리오인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다시 또 도마 위에 오른 재경은 이 상황이 마냥 고맙기만 하지 않았다.

*   *   *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재경이 침묵을 유지하자, 도결이 낑낑거리는 강아지처럼 하염없이 재경을 보았다.

“화났어요?”

“…….”

“끼어들지 않겠다고 하고 끼어든 건 내가 잘못했어요.”

그가 사과를 거듭했지만, 재경은 묵묵부답이었다. 이런 상황이 답답했는지 도결이 재경의 손을 슬쩍 잡았다.

“재경 씨가 억울한 누명 때문에 힘든 건 보기 싫어서 그랬어요.”

“왜요?”

“…….”

“억울한 누명을 쓴 건 난데, 왜 고도결 씨가 보기 싫냐고요.”

그는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도결은 곧 내려앉은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좋아해서요. 차재경 씨가 곤경에 처한 걸 빤히 다 알면서 태연하게 모르는 척 외면하는 건 도저히 못 하겠어요. 난.”

도결의 말에 놀란 재경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침을 삼켰다. 잠시 뒤 온갖 잡다한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덮쳐 오기 시작했다.

‘이번엔 혼자만의 짝사랑이 아니었던 걸까? 아니, 생각하지 말자.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다고. 이런다고 우리 사이가 갑자기 달라질 것도 아닌데.’ 

이미 처음부터 끝이 정해진 계약 결혼이었다. 애초에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함께할 수 없는 사람과 하룻밤을 함께하고 싶었던 건 그녀 자신이었으니까, 억울할 것도 없었다. 

도결은 처음부터 재경이 원하는 조건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도결이 그런 사람이라는 게 서운하기만 했다.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 찰수록 점점 더 재경의 심장이 시큰거렸다. 그래서 일부러 더 그와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는 재경이었다.

“…부모 자식 사이에서도 끼지 않는 게 있다면, 그건 사회생활이에요.”

도결은 당혹스러운 눈으로 재경을 바라보았지만, 재경은 단호한 눈으로 그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간 고도결 씨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살아온 세상에선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게 당연했어요.”

“오늘 내가 재경 씨의 남편이라고 공개한 게 그렇게 싫었어요?”

그런 의미로 하는 말은 아니었다. 재경은 자신이 헤쳐 나갈 수 있는 일을 일부러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의도치 않게 그의 등 뒤로 숨은 꼴이 되어 버렸다. 

자기 몫은 알아서 챙기고 자기 일은 스스로 해내는 게 그녀가 사는 세상의 이치였다. 그러니까  쭙잖게 사모님 행세를 하며 고도결이란 이름에 의존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공개하는 건 싫었어요. 누군가 내게 남편이 누구냐고 물었다면, 약간의 망설임은 있었을 테지만, 그래도 당신이라고 말했을 거예요. 이런 걸 공개하는 게 껄끄럽다는 게 아니거든요.”

한평생 후계자로 살아온 그에게는 재경의 말이 전부 낯설었다. 같은 하늘 아래에서 같은 국적의 땅을 밟고 살았는데. 재경이 하는 말들은 도무지 그의 머리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보통의 사람들은 그에게 늘 도움받길 원했다. 그도 무조건 남을 돕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재경은 달랐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재경은 그에게 도움받는 걸 싫어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남을 돕는 것이 신물 났던 도결인데, 이번만큼은 꼭 돕고 싶었다. 

재경이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것은 성격 탓이 분명했다. 다 알면서도 도결은 불안했다. 마치 재경이 그에게 우리 사이의 거리는 딱 이만큼이라고 못을 박는 것만 같아서 짜증이 났다.

“그렇다면, 안심해요. 차재경 씨한테 이것보다 더 좋은 선택지는 없었으니까.” 

“네?”

“오늘 일은 전부 차재경 씨가 직접 선택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되잖습니까.” 

상처받은 그가 재경의 눈을 피하려는 듯이 휙 고개를 돌려 버렸다. 재경은 그의 일그러진 표정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욱신거렸다.

“이 일이 그렇게 단순히 생각만 하고 끝날 일은 아니잖아요.”

“그럼 지금이라도 가서 진실을 밝힐까요? 우리 사이가 실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차가워진 그의 목소리가 재경의 가슴을 후벼 파는 듯했다. 재경은 당장 이 대화를 끝내고 싶다는 듯이 날카롭게 대꾸했다.

“이 이야기는 그만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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