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60)

<42화>

부회장실. 퇴근 시간이 다가오는 오후였지만, 도결은 퇴근할 수 없었다. 

산업 스파이가 신제품을 신문사에 넘기는 바람에 회사가 곤란해졌다. 그 덕에 어떻게 하면 빠르게 수습을 할 수 있을지 회의하느라 정신없었다.

백 비서가 관련 서류를 가져오겠다고 잠깐 나간 사이에 도결은 다시 재경의 얼굴을 떠올렸다. 오늘따라 유난히 얼굴이 붉었는데, 혹시 어디가 아픈 건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까, 오늘은 유난히 날 좀 피하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얼굴도 좀 붉어지는 것 같고. 화가 난 건가?’

도결은 식사하다가 갑자기 후다닥 사라진 재경을 떠올리자 괜히 신경이 쓰였다. 생각해 보면, 아침부터 재경이 좀 이상했다.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건가?’

한 번도 남의 처지를 생각해 본 적 없던 그가 이상하게 재경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아무리 떠올려도 마땅히 생각나는 실수가 없었다.

‘혹시 내가 빠트린 게 있는 건 아닐까?’

깊은 고민에 빠진 도결을 보면서 돌아온 백 비서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잔뜩 쌓인 서류를 힐끗 보는 눈빛에는 불안함을 넘어서 초조함이 깃들어 있었다.

“저, 부회장님?”

겨우 한 번 불렀을 뿐인데.

“백 비서, 차재경 씨가 요즘 날 좀 피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예? 아까, 여기서 함께 점심 식사까지 하셨는데요.”

진짜 신혼부부 흉내라도 내려는 건지, 도결은 틈만 나면 재경에 대해서 물었다. 백 비서는 난처한 표정으로 서류를 툭툭 두드렸다. 서류로 시선을 돌리기 위함이었지만, 역시나 실패였다. 도결은 한번 떠오른 궁금증이 있으면 끝장을 보고야 말았다.

‘지금은 그게 최악이란 거지. 후.’

백 비서는 지금까지 도결의 최고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그 부분이 제 앞을 가로막고 있단 생각을 했다. 

한번 마음먹은 것은 끝까지 해내야 하는 부회장이었다. 막는 것보단 빨리 해결해 버리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단 생각이 스쳤다.

“안 그래도 직원들 사이에서 말이 많아 그런 것이겠지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으음. 이번 연구팀에 산업 스파이 문제 말입니다. 그 문제로 다들 사모님을 피하는 눈치더라고요.”

그 순간 도결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   *   *

다음 날 오전.

재경은 자신의 상황이 얼마나 별로인지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산업 스파이로 묶여 덩달아 욕을 먹는 바람에 기자들 사이에서도 재경을 달갑게 보는 사람이 없었다.

“오늘 보도 자료 받으셨어요?”

다른 사람들은 보도 기사를 쓰느라 바쁜데, 재경에겐 메일로 왔어야 할 보도 자료가 없었다. 일단 지난번 자료를 뒤적여서 글을 써 놓기는 했는데.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타 신문사는 전부 다 쓰는 보도기사를 혼자만 못 쓰면 한서일보가 곤란해졌다.

“아, 못 받았어요?”

“네. 혹시 제 메일로 보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제 메일 주소는 Cha….”

“미안한데. 그건 좀 힘들 것 같아요.”

“예? 왜요?”

슬쩍 주변 눈치를 살핀 기자가 곤란하단 듯이 구겨진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재경을 훑는 눈빛에는 약간의 경멸이 함께였는데, 재경은 도무지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스러웠다.

“눈치가 없는 거예요? 아님, 원래 그렇게 낯이 두꺼워요?”

“보도 자료 좀 부탁했다고 사람을 너무 함부로 깎아내리는 거 아닌가요?”

재경이 지지 않고 반박하자, 주변이 순식간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남들이 하는 말들은 다 부질없다고 생각하는 재경이지만, 그건 사적으로나 그런 것이었다. 회사를 대표해서 이 자리에 있는 재경은 이대로 물러서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대단하네요. 그런 의지. 아, 그 정도 의지는 있어야 산업 스파이 짓도 하려나요?”

“무슨 이상한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그쪽과 전혀 무관해요. 개인적인 친분을 쌓았던 건 사실이지만, 그 어떤 기사도 쓰지 않았습니다.”

재경은 당당했는데, 그녀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들의 시선에는 마치 가시가 돋쳐 있는 것만 같았다.

‘이러다간 온몸에 가시가 박힌 기분이 들겠어.’

자신만 당당하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란 걸 재경도 잘 알았다. 한두 살 먹은 애가 아니니까,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알고 싶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도움 빌리긴 싫었는데.’

재경은 결국 무리에서 버려진 늙은 사자처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고야 말았다.

*   *   *

진성그룹 부회장 비서 팀.

백 비서는 갑자기 나타난 재경을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재경이 먼저 이런 식으로 자신을 찾아온 일은 처음이라서 저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서 실장인 그가 일어나자, 주변에 있던 모든 비서가 덩달아 일어나서 재경에게 인사를 했다.

“이렇게 거창하게 인사하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재경이 떨떠름하게 대답하자, 백 비서가 슬쩍 뒤에 있는 직원들을 보고선 빠르게 흩어지라고 손짓했다. 

허둥지둥 자리를 피하는 비서들을 보면서 재경은 다시 한번 불청객이 된 기분을 느꼈다.

“부회장님은 안에 계십니다.”

“아, 지금은 백 비서님께 부탁드릴 게 있어서 왔어요.”

은근한 따돌림도 아니고 대놓고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데, 이런 모습을 도결에게 보여 주기가 너무 부끄러웠다.

“저한테요?”

눈에 띄게 당황하는 백 비서를 보면서 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 있는 백 비서라면, 믿을 수 있었다. 적어도 그녀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오늘 보도 자료를 못 받아서요.”

“아, 보도 자료를… 예? 보도 자료를 못 받으셨습니까?”

놀란 백 비서는 제 목소리가 너무 컸다고 생각했는지 얼른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시선은 부회장실 문에 고정되어 있었는데, 아무래도 고도결 부회장 귀에 들어갈까 봐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도움을 청할 곳이 백 비서님밖에 없어서요.”

머쓱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는 재경의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재경이 화들짝 놀라서 뒤를 돌자, 도결이 굳은 표정으로 재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갑자기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별일 아니에요. 그쵸?”

서둘러 도와 달란 눈으로 백 비서를 보자, 얼떨결에 백 비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료가 필요하다고 하시네요. 마침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

“그럼, 그 자료 나한테 먼저 가져와요.”

“예?”

놀란 백 비서의 눈이 커졌다. 물론 재경도 놀랐지만, 백 비서만큼은 아니었다. 도결을 바라본 백 비서는 하얗게 질린 낯으로 달달 손을 떨었다.

“백 비서가 마침 보여 줄 수 있는 자료가 무엇인지, 좀 봐야겠는데.”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결국 재경이 스스로 밝힐 수밖에 없었다.

“보도 자료를 못 받아서 부탁드렸어요. 일 때문에.”

재경은 수치심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도결은 눈치도 없이 그런 재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아무런 말 없이 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재경이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럼, 믿고 갈게요. 바로 보내 주세요.”

재경은 서둘러 도망치듯 비서실을 나왔다. 일반 회사원들이 쓰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문이 열리자 기다리던 직원들이 재경을 보고 움찔했다. 다들 기피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아무도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자, 재경이 내릴 층이 아님에도 기꺼이 내렸다.

‘벌레가 된 기분이네.’

재경은 비상계단 문을 열면서 미간을 찡그렸다.

*   *   *

부회장실.

도결은 업무용 서류를 보다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툭툭 두드렸다. 도무지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살면서 이토록 일에 집중이 안 되는 건 또 처음이었다.

그의 예민해진 태도에 불안을 감지한 백 비서가 슬쩍 앞으로 다가왔다.

“사모님 일은 잘 처리했습니다.”

“보도 자료 누락은 고의입니까? 실수입니까?”

도결의 질문에 백 비서는 대답을 못 했다. 실수가 맞지만, 지금은 어떻게 대답해도 그의 심경이 나아질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업무상 흔히 일어나는 실수 아니겠습니까? 특별한 일은….”

“이게 어떻게 특별한 일이 아닙니까?”

짜증 난 도결은 애써 언성을 높이지 않으려고 참고 있었다. 백 비서는 그런 도결을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보통 업무처리 과정에서 누락은 흔한 실수입니다.”

“그러니까 왜 하필 차재경 씨 자료만 누락된 거냐고 묻는 겁니다.”

백 비서는 지금으로서는 딱히 혀가 길어서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고 달아나듯 싹둑 원인을 잘라 냈다.

“바로 담당 직원 교체하겠습니다.”

“그 정도로 해결이 될 것 같습니까?”

그가 묻는 말에 백 비서가 입을 다물었다. 해결이 안 된다는 건 백 비서도 잘 알았다. 사회생활이라는 게 원래 어디든 비슷했다. 한 번 찍히면, 빠져나오기가 힘들었다. 

이 경우는 빨리 오해를 풀거나 아니면, 다음 타깃이 생기거나 해야 하는데, 역사상 진성그룹 내부에서 이런 일이 생긴 건 처음이라 다음 타깃이 생기긴 힘들어 보였다.

“그렇지만, 부회장님께서 직접 나설 만한 사항은 아닙니다.”

백 비서는 도결이 직접 해결하려 할까 봐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도결은 그 정도는 알고 있다는 눈으로 백 비서를 바라보았다.

“누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하자, 백 비서가 머뭇거리면서 대답했다.

“그냥 부회장님 눈빛만 보면 걱정이 절로 들어서요.”

“좋네요. 백 비서님이 내 걱정을 다 해 주시고.”

그렇게 말하는 도결의 표정은 여전히 심상치 않아 보였다. 백 비서는 침을 한번 꿀꺽하고 설마 별일이야 있겠어 하고 넘겼다. 그게 지금 상황에선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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