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재경은 출근 준비를 하다가 거울 앞에서 멈칫했다. 작게 생긴 붉은색 뾰루지가 오늘따라 신경이 쓰였다.
‘언제부터 이런 게 신경 쓰였지?’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었다.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운 어젯밤부터, 아니 그전부터 계속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도결이 은화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뒤로 계속 이랬다.
“아아. 차재경, 너 설마 이 자리를 욕심내는 건 아니지? 안 돼. 절대 안 돼. 애초에 고도결 씨랑 난 티끌만큼도 관련 없는 사람들이잖아.”
혼잣말로 자신의 마음을 막아 보지만,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계속해서 도결의 잘생긴 얼굴이 머릿속에서 둥둥 떠오를 뿐이었다.
이럴 땐 인간의 마음이 스마트폰이면 좋을 텐데. 어플을 깔고 지우듯 감정도 조절할 수 있을 테니까. 다시 또 간절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좋아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라면 더욱더.
“혼자서 앓는 사랑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아.”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빤히 보던 재경은 손을 동그랗게 말아 쥐었다.
똑, 똑, 똑.
노크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문가에 서 있는 도결이 보였다. 부드럽게 웃는 그의 얼굴은 심장이 멋대로 뛸 만큼 아름다웠다.
‘어떻게 이른 아침에도 얼굴이 붓지 않지?’
재경은 서둘러 자신의 얼굴에 난 뾰루지를 가리면서 인사를 건넸다.
“일찍 준비했네요?”
“네. 재경 씨는….”
그가 왼쪽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피식 웃으면서 재경을 바라보았다.
“조금 늦었네요?”
“아, 미안해요.”
재경이 서둘러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눈치도 없이 그가 재경의 손목을 확 낚아챘다. 뾰루지를 가리고 있던 재경의 손이 툭 얼굴에서 떨어지자, 도결의 눈빛이 뒤늦게 흔들렸다.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에요?”
화들짝 놀란 재경이 그를 핀잔하자, 도결이 아무 말도 못 하고 넋을 놓았다. 그 순간 재경은 사춘기 소녀처럼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무래도 좀 이상했다.
‘진짜, 내가 이 남자를 신경 쓰고 있는 건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면서 재경이 미간을 찌푸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도결이 자신의 얼굴을 검지로 툭툭 두드렸다.
재경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있었다. 너무 잘 알 것 같아서 신경질이 났다. 도결이 만진 턱은 재경의 뾰루지가 생긴 자리였다.
“얼굴에 뭐가 생겼네요?”
“기어이 내 얼굴에 뾰루지를 봐야 속이 시원한가 봐요?”
툴툴거리는 재경을 보면서 그가 해파리처럼 흐물거리며 웃었다. 그러나 왜 그렇게 웃느냐는 듯한 재경의 눈빛에 금세 기가 죽었다. 살살 눈치를 살피는 표정까지 매력적인 얼굴이었다.
“혹시 내가 멋대로 봐서 화났어요?”
그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재경이 눈을 크게 떴다.
“누, 누가 그렇대요?”
말로는 아니라고 부정하면서 재경의 걸음에는 힘이 실렸다. 마치 화가 난 사람처럼 쿵쾅쿵쾅 걷는 재경을 보면서 그가 슬쩍 웃었다.
* * *
기다리지 않는 시간은 항상 빨리 찾아왔다. 오늘은 도결과 같이하는 점심시간을 피하고 싶었다. 어떤 꾀를 써서라도 피하고 싶었지만, 재경은 함께 먹잔 도결의 문자를 거절하지 못하고 부회장실까지 올라오고야 말았다.
“…오늘은 연어네요. 연어 좋아해요?”
잘생긴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떨리는데, 도결은 이상하리만큼 재경에게 다정했다.
처음에는 그가 모두에게 친절한 사람이라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비서 팀을 대할 때나, 다른 직원들을 대할 때 도결은 웃음기조차 없는 표정이었다. 도리어 딱딱하고 사무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아 보였다.
그런데 왜 나한테는…?
“무슨 생각 해요?”
“아, 네. 좋아해요. 연어.”
기계적으로 대답하는 재경을 보면서 도결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재경의 닫힌 도시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재경은 도결이 자신에게만 유독 친절하단 생각이 들자, 기분이 찝찝해졌다. 슬쩍 도결의 잔잔한 표정을 살핀 재경이 조용히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혹시 어디 아파요? 얼굴이 붉어졌는데.”
도결의 물음에 화들짝 놀란 재경은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가는 것 같다며 허둥지둥 말을 돌렸다.
평소보다 허둥대는 재경은 누가 보아도 이상했다. 도결은 그런 재경이 의아하다고 생각했지만 별다른 질문 없이 조용히 젓가락을 들었다.
한참 말없이 밥을 먹던 도결이 자신을 힐끗힐끗 바라보는 재경을 향해 물었다.
“제 얼굴에 뭐 묻었습니까?”
도결의 농담 같은 질문에도 재경의 반응이 이상했다. 재경은 눈을 느릿하게 몇 번 끔뻑이더니 놀라서 뒤로 엉덩이를 뺐다.
“네? 아뇨.”
질문에 대답하고 난 후, 재경은 민망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불편해하는 거 들켰나?’
아니야. 오늘 아침에 출근할 때부터 지금까지 그를 힐끔거렸으니까, 저렇게 물어보는 게 퍽 이상한 것도 아니지. 진정하자, 차재경. 다른 주제로 바꾸면 되잖아.
“아, 맞다. 어제, 고 회장님 집에서 말이에요….”
“본가에 손님이 있어서 좀 불편했죠? 미안해요.”
그가 빠르게 사과를 하는 바람에 재경은 말문이 막혀 입을 닫았다. 서운한 감정이 다시 또 밀려드는 것 같았다. 애초에 모르는 것도 아니었는데.
재벌들은 결혼을 단순히 사랑만으로 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오죽하면 재벌들이 연애결혼을 하면 기사는 물론 방송에서도 특집으로 다루곤 했다. 여태 기자로 지내온 재경이 이런 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결혼이 비즈니스인 세상에서 재혼을 안 할 수는 없겠지.
“혹시 같이 밥 먹는 거, 불편해요?”
그의 표정이 평소랑 좀 달랐다. 어쩐지 그도 재경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런 기분은 주혁을 좋아하기 시작했을 때 느꼈던 것들이었다. 자꾸만 선배가 신경 쓰였고, 선배도 혹시 신경 쓰여서 이런 행동을 한 게 아닐까 고민하곤 했었는데….
안 돼, 차재경. 상대는 곧 나랑 이혼할 남자라고!
“조금 불편한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럼, 말해 줄 수 있어요? 왜 나랑 같이 식사하는 게 불편한 건지.”
“사실은 지난번에 두 분이 카페에서 만난 걸 봤어요.”
“두 분이요?”
“요 앞에 회사 근처에 있는 호텔 말이에요. 거기에서 한은화 씨랑 있는 걸 봤다고요.”
재경의 말에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어진 그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이며 기억났단 표정을 지었다.
재경은 대수롭지 않은 척 젓가락으로 달걀말이 초밥을 집었지만, 내심 속으로는 그의 대답이 궁금했다.
“뭐, 금방 재혼하실 거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투로 말했지만, 재경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신경 쓰여서 묻는 말이었다.
“한은화 차장과 재혼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 일로 만났어요.”
그는 재경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순간 왜 한 차장이 싫은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재경은 자신이 질문하기엔 선을 넘는 부분인 것 같아서 우물쭈물했다.
“그게, 뭐 저랑 상관있나요. 전부 이혼한 뒤에 생길 일들인데요. 혹시라도 이런 질문들이 도를 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 미리….”
“아니요. 질문해 줘서 오히려 고마워요.”
이게 고마울 일인가? 어정쩡하게 젓가락을 쥔 재경에게 도결이 제 초밥을 건네주면서 웃었다. 진심으로 기쁘단 표정이라서 곤란해졌다.
재경은 다시 또 혼자만의 착각으로 누군가에 대한 마음이 커질 것 같아서, 두려워졌다.
왜 매번 짝사랑일까?
도결의 친절함은 단순한 것일 텐데, 재경의 심장은 멋대로 뛰고 있었다.
얼마 후면 남이 될 도결이었다. 지금처럼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상처받는 건 또 그녀 자신일 게 분명했다.
“뭐, 신경이 쓰여서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우리 계약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야 하니까.”
이번에는 주혁을 짝사랑했을 때와 좀 다른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전처럼 적극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의 곁에 설 자신이 없었다.
오래전 학교 선배였던 주혁을 좋아할 때는 이룰 수 있는 사랑이란 희망이 있었지만, 지금은 희망조차 없는 상대였다.
애당초 끝이 정해진 만남이지 않던가. 이룰 수 있기는커녕 일반인인 재경에게 그는 닿는 것조차 불가능한 존재였다.
‘두 번 다시 짝사랑은 싫어.’
재경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속이 좀 안 좋아서 먼저 일어날게요.”
갑작스러운 재경의 행동에 도결은 안절부절못했다.
* * *
“선배가 여긴 어쩐 일이세요?”
퇴근 시간이 되기 전, 갑작스럽게 찾아온 주혁을 보고 재경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재경을 찾아온 주혁은 많이 지쳐 보였다.
“아, 그래요.”
“진성은 처음 와 보네.”
어울리지 않게 뜸을 들이는 주혁을 보면서 재경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바람이 불어서 재경의 치마가 넘실거렸고, 주혁의 머리카락도 몇 가닥 흔들리고 있었다.
주혁은 이 순간 재경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자신의 곁에 있을 땐 보이지 않았던 재경의 장점이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하나씩 보이는 주혁이었다.
“할 말이 있는 거라면, 지금 해요. 어디 들어가서 술 마시는 건 좀 부담스러워져서요.”
“아, 그렇겠구나.”
영혼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대답에 재경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색이 안 좋은 걸 보니, 먹고 자는 것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그녀가 주혁을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전화로 묻긴 좀 조심스러워서. 직접 얼굴 보고 묻고 싶었어.”
“…무슨 질문인데요?”
“너, 이혼하니?”
재경은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이혼 안 해요. 우리.”
“한 차장이 진성그룹 본가에 다녀왔다고 하던데.”
침을 꿀꺽 삼키는 주혁은 재경의 입술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재경은 언젠가 주혁이 자신의 말에 집중해 주길 꿈꿨던 적이 있었다.
그 꿈을 이런 식으로 이루게 될 줄은 몰랐는데….
“두 사람이 재혼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못 박았어요. 고도결 씨가.”
주혁은 재경의 말에 얼굴빛이 환해졌다. 다시 한번 희망을 찾은 듯한 눈빛이었다.
재경은 방금까지 도결을 짝사랑하는 자신의 감정이 무조건 해가 될 거라 생각했었는데, 이 순간 그 생각이 뒤집혔다.
‘선배의 이런 모습을 봐도 아무렇지 않은 건 좋은 점이구나.’
* * *
주혁은 곧장 한은화 차장을 찾아갔다. 늘 그래 왔듯 한은화 차장은 주혁을 보고 굳은 표정을 지었다.
마치 모르는 남을 대하듯이 은화가 주혁의 곁을 스쳐 지나쳤다. 그 순간 주혁이 팔을 뻗어 은화를 붙들었다.
“저 여기 있는 거 안 보이세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주혁의 얼굴을 본 은화의 눈빛이 사나웠다.
“김 부장, 내 집 앞에서 이러는 거 범죄인 거 알죠?”
“범죄요?”
“집 앞에서 기다리는 건 스토킹에 해당하고, 지금 이렇게 멋대로 잡은 건 성추행이겠네요.”
조금의 여지도 남기지 않고 주혁을 밀어내는 은화였다. 주혁은 그런 은화를 한참이나 노려보다가 결국 그녀를 놓아주었다.
빠르게 지나치려는 은화의 뒤통수에 대고 주혁은 끝내 소리를 질렀다.
“고도결 부회장은 당신이랑 재혼할 마음이 없다는데. 알고 있어요?”
그러자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을 것 같았던 한은화 차장이 고개를 돌려 주혁을 보았다.
“고작 그런 시시한 이야기나 나불대려고 내 집 앞에 왔어요?”
“이미 물 건너간 비즈니스니까….”
제발 다시 돌아오란 말을 하려는데 은화가 먼저 입술을 열었다.
“김 부장, 지금 그거 굉장히 선 넘는 거야. 내 비즈니스는 내가 정해.”
또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은화가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