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재경이 주혁과 술을 마신 건 충동적인 이유였다. 그의 처지가 자신의 처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 사람이 잘해 주니?”
술을 따라 주면서 주혁이 물었다. 주혁이 은화와 헤어졌으니까, 이젠 재경이 고통받을 차례만 남아 보였다.
아닌가? 애초에 원치 않는 결혼이었을 테니, 더 빨리 이혼할 수 있어서 좋으려나. 그럼, 다 잘된 셈인데. 은화를 생각하면 마음이 욱신거렸다.
“네.”
눈물이 고인 재경을 보면서 주혁이 손을 뻗었다. 큼직한 그의 손이 재경의 머리 위로 척 올라갔다.
예전엔 재경이 자신의 손길에 위로를 받고는 했었는데, 오늘은 그다지 위로가 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녀의 차가워진 눈빛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사람, 너무 믿지 마. 이용당하다가 버림받는 건 너무 아프잖아.”
꼴 좋다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야 하는데 우습게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재경을 바라본 주혁은 자신이 조금 더 경험이 많은 사람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남자는 남자가 더 잘 알아.”
재경은 그렇게 잘 알면서 제겐 왜 그렇게 못되게 군 것인지 주혁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속은 그렇게 시끄럽기만 한데. 입술은 잘 떨어지지 않았다.
“버림받은 사람들끼리 뭉쳐 볼래?”
…그건 싫었다. 도결이 자신을 이용한다고 해도 그건 그의 마음이었다.
자신도 그와 결혼해서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으니 적어도 한 번 배신한 적 있는 주혁보단 도결이 더 나은 것 아닌가?
“재경아, 권력이 다 이런 거야. 인생을 구원할 것처럼 굴지만, 결국 나락으로 보내는 게 권력이거든.”
그의 말은 더 이어질 수 없었다. 그녀가 툭 하고 쓰러진 탓에 아무 말도 더 할 수가 없었다.
“근데, 너 어디 사냐?”
취한 주혁이 중얼거리며, 재경의 스마트폰을 잡았다. 고도결 부회장이라고 쓰여 있는 번호를 눌렀다. 주혁은 도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저 한서일보 경제부 부장 김주혁입니다.”
일부러 재경의 전화로 전화를 건 주혁은 도결의 대답을 기다렸다.
“재경이가 많이 취해서 연락드렸습니다. 혹시 기다리고 계셨을까 봐.”
그는 그러고도 조금 더 도결을 기다려야만 했다.
[문자로 주소 부탁합니다.]
* * *
주혁은 당연히 고도결 부회장이 자신의 비서 팀이나 경호원을 보낼 줄 알았다. 그러나 급하게 나타난 사람은 편안한 복장을 한 그였다.
“안녕하세요? 김주혁입니다. 우린 구면인가요?”
그의 심기를 거스르면서 주혁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손을 내밀었다.
“사례는 다음에 꼭 하죠.”
도결이 잠든 재경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대답하자, 주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당신 같은 재벌들은 원래 다 그렇게 이기적입니까?”
뜬금없이 튀어나온 주혁의 질문에는 자격지심과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 도결이 대답도 하기 전에 주혁이 다시금 언성을 높였다.
“이런 식으로 달려오면, 안 되지 않나요?”
물론 그런 주혁을 바라보는 도결의 눈빛에도 경계나 짜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신들 비즈니스에 아무것도 모르는 재경이가 휩쓸리는데, 가엽진 않으시냐고요.”
지금까지 침묵하던 도결이 미간을 구기며 조용히 재경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었다.
“김 부장님 눈엔 재경 씨가 가엽습니까?”
“네. 가엽게 보입니다. 왜 재경이가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하는 건지. 솔직히 잘 모르겠네요.”
그러자 도결이 피식 웃었다.
“그게 김주혁 씨 진심인 건 확실합니까?”
“…네. 재경이는 나처럼 안 되게 할 거예요.”
만취한 주혁은 선을 넘었지만, 도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싸늘하게 내려 볼 뿐이었다.
차라리 욕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면, 재경에 대한 도결의 마음을 알 수 있을 텐데. 이 상황이 답답하기만 한 주혁이었다.
도결은 잠시 재경을 바라보다가 주혁에게 대답했다.
“그래요. 김 부장이 정 원한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해 봐요.”
“…재경이가 제게 안 올 것 같습니까?”
이를 아득바득 가는 주혁을 보면서 도결의 눈이 가늘어졌다.
“글쎄요. 난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원하는 것을 놓쳐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네요.”
“하아. 재수 없는 새끼.”
“나 같은 재벌들은 원래 다 이렇게 재수가 없어요. 사례는 내일 하죠. 그럼, 이만.”
그가 재경을 부드럽게 양손에 끌어안고 성큼성큼 가게 안을 빠져나갔다.
* * *
재경은 다음 날 아침 깨질 것 같은 머리를 움켜잡고 일어났다.
해는 중천에 떴고, 지각이란 사실에 화들짝 놀라서 나왔는데 도결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저 어떻게 들어왔어요?”
놀란 토끼 눈으로 묻는 재경을 보면서 그가 태연하게 꿀물을 내밀었다.
“천천히 마셔요. 뜨거우니까.”
“회사 안 갔어요?”
재경은 저를 바라보고 있는 도결을 힐끗 보면서 불안한 듯 물었다.
신제품에 사용된 기술이 전국으로 노출된 이 상황에서 그가 너무 태연하니까 미안해진 탓이었다.
“출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겨서요.”
“무슨 일인데요?”
뜨거운 꿀물을 호호 불면서 묻자, 그가 망설이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본가에서 부르시네요. 식사하자고.”
그 순간 재경은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산업 스파이로 오해하는 고 회장이 이번 일을 그냥 넘기지 않을 것 같았다.
* * *
겁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달달 떠는 재경을 위로하듯 그가 손을 부드럽게 꽉 움켜잡았다.
“그냥 식사하는 자리예요. 그렇게 겁먹을 것 없어요.”
백 비서가 했던 말이 떠오른 재경이 그의 손을 놓으며 작게 물었다.
“고도결 씨도 제가 산업 스파이라고 생각하죠?”
“아니요. 그런 생각 한 적 없어요.”
“그런데 왜 본가로 왔어요? 노력하면 회사에서 해결할 수도 있었을 텐데.”
재경의 말에 그가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한 눈으로 재경을 바라보던 그가 낮게 속삭였다.
“나 지금 차재경 씨 이용하려고 왔어요. 미리 사과할게요.”
“네?”
“산업 스파이 건은 제 불찰이에요. 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부족했어요.”
“그건 누가 봐도 경쟁사에서 시도한 일로 보였는데요?”
놀란 재경이 그를 보자, 도결이 재경을 애처롭게 바라보면서 속삭였다.
“오늘은 고 회장님과 단둘이 식사하고 싶지 않아요. 밥이 전부 얹힐 것 같아서.”
“진짜 그 이유가 다예요? 날 의심해서가 아니라?”
“그럼요. 부인 뒤에 숨으려고 그래요. 점심은 좀 편하게 하고 싶어서.”
도결의 연기는 정말 잘 통했다. 재경은 약한 사람에게 약했고, 그의 작전은 너무 간단하게 먹혀 들어갔다.
그녀가 도결의 커다란 손을 꽉 잡고선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고도결 씨는 내가 지켜 줄게요.”
* * *
“미안해요. 내가 조금 더 신경 써서 봤어야 했는데.”
본가에 들어서기 전 재경은 그에게 사과를 했다. 처음부터 영란을 정보원으로 쓰려고 한 적 없었다. 만약 그녀를 정보원으로 쓰려고 했다면, 영란이 술에 취해서 흘린 신제품 기술에 대한 것들을 진즉에 쓸 수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은 건, 순전히 도결 때문이었지만. 지금 와서 그런 말을 한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니까, 길게 변명할 이유는 없을 것 같았다.
“알고 있어요.”
간결한 그의 대답에 재경의 눈이 커졌다. 보통 이런 일에는 예민해지기 십상인데. 그는 화를 내는 구석이 없었다. 도리어 평온해 보여서 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알아요?”
“하려고 했다면, 진즉에 일이 일어났을 테니까요. 재경 씨 때문에 벌어진 일 아니니까, 너무 그렇게 고민할 필요 없어요.”
그의 이런 태도가 재경을 더욱 죄책감에 밀어 넣었다. 곤란하게 만든 것 같아서 미안해 죽겠는데, 그런 미안함도 느끼지 않게 하려는 태도라 더 부끄러워졌다.
“날 왜 이렇게까지 믿어 줘요?”
“좋아해서요.”
망설임 없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재경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힘든 건 보기가 싫네요. 이상하게.”
재경은 끝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마음을 전부 다 들어 버린 것 같았다. 좋아하는 사람을 믿고 싶은 마음. 그가 믿고 싶은 건 차재경 그녀 자체인 듯했다.
다이닝 룸에 들어선 재경은 미리 앉아 있는 한은화 차장을 보고 흠칫 놀라 도결을 보았다. 무심한 표정을 보아선 그가 이를 알고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왔으면, 앉아라.”
고 회장의 말에 도결이 성큼성큼 걸어가 재경에게 의자를 빼 주었다.
재경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 앉자, 고 회장이 미간을 구겼다.
“차 기자는 왜 데려왔냐? 여기가 어떤 자리인데.”
“왜요? 제가 볼 땐 두 분, 보기 좋은데요.”
은화가 고 회장을 향해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재경은 어색해진 분위기를 파악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으나, 도결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재경의 작은 손을 붙들고 있었다.
“뭐 하는 짓이야? 보는 눈도 있는데.”
“보기 불편하십니까? 한 차장님?”
재경은 두 사람이 카페에서 만난 걸 떠올리면서 얼굴이 붉어졌다. 제가 끼면 안 될 자리란 생각이 들자, 수치심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아뇨. 하던 이야기 계속할까요? 회장님?”
“크흠. 차 기자가 있으니, 나중에 하는 게 좋겠네.”
고 회장이 물러서자, 은화가 놀랍다는 듯이 비아냥댔다.
“설마, 며느님을 의심하시는 건 아니시죠?”
“며느님은 무슨. 산업 스파이랑 붙어먹은 여잘 가족으로 인정할 순 없지.”
“처음부터 이럴 속셈이셨나요?”
은화의 싸늘한 음성에 놀란 건, 재경이었다. 처음 화장실에서 만났을 때부터 은화가 좀 남들과 다르단 건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남다름이 진성그룹 회장에게도 예외가 없을 줄은 몰랐던 탓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한 차장님?”
놀란 재경이 은화를 말려 보지만, 수확은 없었다.
“들으셨죠? 저 한서일보 한은화 차장이에요. 우리 한서일보 기자가 산업 스파이라고 누명을 쓰는 건 못 참습니다.”
“하아.”
고 회장이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은화를 보자, 그녀가 싱긋 웃으면서 여유롭게 이야기를 이어 갔다.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한서일보가 진성그룹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이 결혼을 못 하겠단 건가?”
재경은 고개를 떨구었다. 역시 와선 안 될 자리에 온 것만 같아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참이었다.
그러나 은화는 그런 재경을 똑바로 보면서 끝까지 제 이야기를 했다.
“어머, 무슨 그런 무서운 소릴 하세요? 회장님도, 고도결 부회장님도 전부 기혼이신데. 제가 이 집에서 누구랑 결혼을 할 수 있겠어요.”
“그 부분은 내가….”
“아니요. 싫습니다. 저는 회사 직원에게 산업 스파이라는 누명까지 씌우면서 이 자리에 앉고 싶지 않아요. 이번 일은 저희 측이 잘못한 일이니까. 제가 책임지고 처리하겠습니다.”
은화의 말에 놀란 재경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보았다. 절대 남에게 조금도 양보하지 않을 것 같던 은화가 저를 향해 싱긋 미소 짓고 있었다.
“하. 나 참.”
고 회장이 화를 못 이기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은화는 곧장 재경을 보면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다시 만났네요? 사모님.”
“예?”
얼떨떨한 재경이 머뭇거리자, 은화가 서류를 꺼내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번 일은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미안하게 됐어요. 어떤 유혹에도 흔들림 없는 차재경 기자님이 우리 한서일보에 있어서 든든하기까지 하던데요.”
그녀가 내민 서류에는 영란이 재경과 무관하다는 걸 고백한 내용이 함께 있었다.
은화가 이를 믿고 저를 도와줬단 사실이 믿기지 않은 재경이 고개를 돌려 도결을 보았다.
“나도 고 회장님 대신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도결의 사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은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른들 욕심이 나날이 과해져요. 뭐든 멋대로 하려고 하시거든요. 이번 일로 피해받는 것 없게 최선을 다할게요.”
재경은 이번 일로 사과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묘하게 안도감이 생겼다.
이번 일로 피해받은 걸 생각하면 분해야 하는데, 그가 은화를 만난 일이 자신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니까 불안감이 해소되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