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60)

<39화>

재경은 도결과 은화가 만나는 모습을 본 이후로 정신이 없었다. 애초에 도결은 자신의 남자가 아니었다. 1년 후면 헤어질 사이인데. 어째서 이렇게 가슴이 욱신거리는 건지. 

주혁을 남몰래 혼자 좋아할 때도 이렇게 아프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땐,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었으니까. 도결을 떠올릴 때면,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바뀌었다.

‘설마, 내가 고도결 씨를 좋아하나?’

그녀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금사빠 같은 건 재경과 어울리지 않았다. 

사람을 좋아할 때, 천천히 깊이 빠져드는 타입의 사람이 재경이었다. 도결과 만난 지 고작 몇 개월밖에 안 됐는데. 

‘내가 아무리 주혁 선배한테 실망했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 사람이 줏대가 있지. 어떻게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단숨에 사랑에 빠져.’ 

그러면서 약 봉투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재경 씨? 괜찮아요?”

연구실 문 앞에 나온 영란이 그녀를 걱정하면서 물어 왔다. 

“아? 네. 저, 그게. 이거.”

재경이 허둥지둥 약 봉투를 내밀었다. 얼떨결에 꼬깃꼬깃한 종이봉투를 받은 영란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살폈다.

“혹시 무슨 일 있었어요? 재경 씨,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걱정하는 영란의 표정은 어딘가 초조해 보였다. 재경은 서둘러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웃어 보였다.

“아, 전 안 아파요. 딱히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 것치고는 안색이 너무 안 좋은데요?”

“뭐, 별일 아니었어요. 그냥 오는 길에 뭘 좀 봐서….”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재경의 가슴은 답답해졌다. 정말 자신이 말한 것처럼 별일 아닌 일인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

“아. 그랬구나.”

영란은 더 말을 걸지 않았다. 덕분에 어색함만 남은 상황이 되어 버렸다. 

가만히 서 있던 재경은 곧 연구실에 오면 안 된단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전, 이제 그만 가 볼게요. 백 비서님이 연구실엔 기자들이 들락날락하면 안 된다고 해서요.”

서두르는 재경을 보면서 영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 고마워요. 생각도 못 했는데….”

재경은 문득 영란과 눈이 마주치고 걸음을 멈췄다. 원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안색이 어두운 영란을 보니, 대화가 좀 필요해 보였다.

“근데요. 영란 씨, 혹시 이직하세요?”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재경 때문에 화들짝 놀란 영란이 그간 숨기고 있던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아무래도 곧 그렇게 될 것 같아요. 좋은 회사와 연결이 되었거든요.”

많이 고민하던 영란이 좋은 길을 찾은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약간의 찝찝함이 남아 있었지만, 이건 자신의 뒤숭숭한 마음 탓이라고 여겼다.

*   *   *

도결과 함께 차를 탄 재경의 표정은 어두웠다. 평소라면 조금 덜 신경 쓰였을 그가 오늘따라 굉장히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디 아파요?”

그가 걱정스럽게 묻는 목소리에 재경이 고개를 돌려 잘생긴 얼굴을 응시했다. 

누가 봐도 홀릴 수밖에 없는 외모였다. 비스듬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모습은 아찔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뇨. 전혀 아프지 않아요.”

“그래요? 그럼, 무슨 일 있었어요?”

친근하게 물어 오는 도결이 낯설게 느껴지는 재경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언제나 다정하고 친절하니까. 

‘한은화 차장에게만 특별히 다정한 것도 아니었을 테지.’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일부러 그가 다정한 사람이라 최면을 걸어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했는데, 우습게도 그가 세상 모든 여자에게 다정한 모습을 상상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전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러는 고도결 씨는 오늘 누구랑 점심 먹었어요?”

긴장해서 그런지, 목소리가 갈라졌다. 부끄러워서 고개를 돌리려는데, 그가 재경의 얼굴을 부드럽게 붙들었다. 

“이대로 좀 있어도 될까요?”

눈을 마주친 그가 나른하게 물어 왔다. 화들짝 놀란 재경이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만 끔뻑였다.

“갑자기요?”

“종일 보고 싶었어요.”

그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서 애가 타는 재경이었다. 그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면서 저를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했다. 대놓고 물어보기는 조심스러웠고, 은근히 묻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랬어요?”

“조금만 더 이렇게 있어 줘요.”

결국 재경은 그의 부탁대로 몇 분 더 그를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관계는 아니었지만, 부부 사이였고. 진짜 연인은 아니었지만, 퍽 다정한 거리였다. 

별다른 타격을 주지 않을 것 같았던 모든 상황이 재경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복잡하게 꼬인 실처럼 그가 어렵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   *   *

며칠 뒤 재경은 자신이 왜 영란을 만나면서 찝찝한 기분을 느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백 비서가 건넨 서류에는 신제품에 관련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문제는 영란이 한서일보를 통해 기사를 작성시켰단 것이었다.

“김영란 연구원이 한서일보를 통해 이런 기사를 요구했단 증거인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재경은 백 비서가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의도를 파악하려고 애를 썼다. 영란과 자신이 그간 친하게 지냈단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지금 절 의심하는 건가요?”

“당연하지요.”

눈 한 번을 깜빡이지 않고 대답하는 백 비서 때문에 재경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백 비서와 나름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전부 재경만의 오해였던 모양이었다.

“그럼, 제가 이 기사를 썼다고 생각하세요?”

재경의 물음에 백 비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김영란 씨와 접촉한 한서일보 기자는 차재경 기자님뿐인데 것 같은데, 틀렸나요?”

어쩐지 재경은 섭섭함을 느끼고 있었다. 도결의 비서 실장인 백 비서가 그녀를 대놓고 의심하고 있다. 그렇다면, 도결도 그녀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이겠지. 

“증거 있어요? 내가 그랬단 증거 말이에요. 여기 기사를 보면, 제 이름도 아닌데.”

재경은 다른 기자의 이름을 기사 자체에서 콕 집어 가리켰다. 그러자 백 비서가 눈살을 찌푸렸다.

“한서일보에서 저희 진성그룹 출입증을 가지고 있는 기자는 차재경 기자님이 유일합니다. 인정하십니까?”

“네. 그 부분은 반박할 여지가 없어 보이네요. 그렇지만, 제가 출입증이 있다고 해서 한서일보를 이용해서 기사를 쓸 순 없어요.”

재경은 지금 보도 기사만 쓰고 있었다. 주혁의 허락이 없이는 노출도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었다.

“백 비서님, 정말 너무하시네요. 어떻게 절 의심하실 수가 있으세요?”

“제가 의심하는 게 아니라, 고 회장님께서 하시는 의심입니다. 이 기사와 서류는 전부 고 회장님께 받았습니다.” 

백 비서가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재경이 고개를 기울였다.

“전 이 사건과 무관해요.”

“어쨌든 출입 기자는 차재경 씨니까요. 이번 일은 아마 차재경 씨가 직접 책임을 지게 되실 겁니다.”

백 비서의 말이 서운하게 들린 것은 사실이었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어떤 출입처였어도 지금과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했다. 오히려 백 비서의 대응이 조금 더 친절한 걸지도 몰랐다.

퇴근하기에는 누가 보아도 이른 시간이었지만, 재경은 가방을 들었다. 산업 스파이를 도왔다는 누명을 쓰면 좋을 게 없는 바닥이라, 마음이 조급해져 있었다.

이번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을 몇 번이고 떠올려 봤지만, 결국 생각나는 사람은 단 한 사람이었다. 저를 이용하고 버린 김주혁. 결국은 또 그 사람이었다.

용기 내서 전화를 걸었을 때, 주혁은 알딸딸하게 취한 목소리였다. 당황한 재경이 다시 한번 스마트폰 화면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술 마시고 싶은 사람은 나인데. 왜 선배가 취해 있어요?”

[무슨 일이야?]

“제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수습은 안 할 거예요?”

그녀가 매달린 사람은 결국 또다시 주혁이었다. 두 번 다시 주혁에게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그 의지가 무참히 꺾였다.

*   *   *

“진짜 왔네?”

눅눅한 기름 냄새가 풍기는 전집에서 주혁이 홀로 막걸리 잔을 잡고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그런 주혁의 뒷모습을 조금 더 오래 지켜보았을 텐데. 오늘은 주혁의 뒷모습이 달갑지 않았다.

“그럼 가짜로 오겠어요? 같은 팀 직원이 산업 스파이로 몰렸는데 선배는 왜 벌써 퇴근했어요?”

가방을 내려놓은 재경은 걱정이 얽힌 목소리로 주혁을 바라보았다. 미워하는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렇다고 주혁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권력에 신물이 나서. 여기 같이 오는 거 오랜만이다. 그러지 말고 앉아.”

그녀가 찾은 곳은 작년까지 퇴근 시간이면, 주혁과 함께 오던 전집이었다. 주혁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이곳에 있다고 했다.

예전 같았으면 주혁의 말에 수만 개의 의미를 부여하느라 심장이 떨렸을 텐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마음이 착잡하게만 느껴졌다.

“술 마시고 나면요? 수습은요?”

재경의 심각한 표정을 보면서 주혁이 고개를 휙 돌려 막걸리가 담긴 잔을 내밀었다.

“마셔. 물먹은 사람들끼리 마시고 죽자.”

“이거 마시고 죽겠어요? 농약 정도는 마셔야지.”

투덜대면서 재경이 털썩 의자를 빼서 앉았다. 주혁은 그런 재경의 퉁명스러움이 낯설면서도 의외의 모습이 귀여웠다.

“사다 주든가. 지금 주면 마셔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나약한 소리 하지 말아요. 선배랑 어울리지도 않으니까. 이번 일, 선배랑 관련 없는 거죠?”

재경의 물음에 주혁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딘가 서글픈 얼굴이라, 제대로 따져 묻기 어려워지는 재경이었다.

결국 주혁과 재경은 나란히 술을 마셨다. 함께 술을 마시는 건 그때와 변함이 없는데, 기분이 미묘하게 달랐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산업 스파이로 몰려서 좋을 것 없잖아요. 선배나 나나.”

이번 일로 옷을 벗게 된다면, 그건 주혁일 가능성이 더 컸다. 그렇지만 주혁은 한은화 차장과 잘되고 있지 않았던가?

재경은 주혁의 아슬아슬한 모습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권력에 목매는 그보다는 자신이 이 사건을 짊어지고 사직서를 내야 할 판이었다.

“그만 일어나요. 더 마시면 집 못 가겠어요.”

낡은 시계와 찢어진 벽지, 기름진 눅눅한 가게 공기 그리고 비어 있는 나무 접시. 재경은 그것들을 보면서 무심하게 조언했다.

“너는 내가 밉지 않아?”

주혁의 물음에 재경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당연한 소릴 아무렇지 않게 뱉는 주혁이 짜증 나는 재경이었다. 밉지 않냐니. 어떻게 밉지 않을 수가 있을까. 

“한은화 차장님이 보면서 서운하시겠어요. 그만 일어나요.”

“헤어졌어. 그 사람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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