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도결은 저를 찾아온 은화를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윤기 나는 머리칼과 백옥 같은 피부를 가진 은화는 누가 보아도 상류층 자제처럼 보였다. 애초에 그가 만났어야 할 여자는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날 재경이 나타난 것이 몹시 다행이라 여겨졌다. 관리를 받은 티가 나지 않은 날것 느낌의 재경이 좋았다. 제 눈치를 살피며 인터뷰를 하려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할 지경이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안부차 인사를 꺼낸 은화가 조용히 국화차를 한 모금 마셨다.
보통의 사내들처럼 도결이 제게 잘 보이려 할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이미 경험해 보았으니. 은화도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렇다고 은화가 그에게 잘 보일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은화 역시 그에게 딴 마음은 없었으므로.
천천히 잔에서 입술을 떼는 그녀를 보면서 도결이 고개를 까딱였다.
“그 뒤로 처음 뵙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그 역시 오만함이 깃든 태도였다. 전혀 관심 없다는 것을 이렇게 은근히 보여 주고 있었다. 은화는 코웃음을 치며 찻잔을 탁자 테이블 위에 올렸다.
“아마도 그렇겠죠? 그동안은 저희가 만날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까요.”
은화는 이 문제를 도결에게 떠넘길 참이었다. 애초에 유부남인 그가 자신과 엮인단 사실이 이상하지 않은가. 진짜 결혼이든, 가짜 결혼이든. 그녀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었다.
결혼이라면, 자식으로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치가 떨렸다. 짐승도 아니고, 고작 자식을 갖겠다고 정략 결혼하는 건 싫었다.
“지금은 만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가 서늘한 표정으로 은화의 말을 지적했다. 조금도 여지를 주지 않는 도결을 보면서 은화가 입술을 깨물었다. 자존심이 상한 탓이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찾아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은화는 짧게 그를 쏘아보았는데, 그 눈빛에는 할 말이 많다는 신호가 담겨 있었다.
비스듬히 고개를 꺾은 도결이 오만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어떤 이유로든 오해를 만들고 싶지 않단 뜻입니다. 불편하게 들렸으면, 미안합니다.”
이번 일로 사교계에서 뒷말이 돌 수도 있다는 것은 은화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권력에 짓눌려서 원치 않는 결혼을 하고 싶진 않았다.
“오해 사는 게 두려우신가 봐요?”
“내가 지금 두려워서 하는 말 같습니까?”
그가 은화의 질문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먼저 숙이고 나타난 은화의 자존심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평소라면 진즉에 일어났을 테지만, 오늘은 물러설 수 없었다. 뒤에는 절벽이 있고 앞에는 서늘한 이 남자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절벽보단 사람을 설득하는 편이 더 쉽겠지. 은화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했다.
“혹시 제가 여기 온 이유를 전혀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은 아니시죠?”
진성그룹이라면, 이미 산업 스파이가 왔다 간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은화는 그가 벌써 대책을 준비한 게 아닐까 하고 겁이 났다.
“수수께끼를 하고 싶은 거면, 다른 사람을 찾아봐요. 한가하게 앉아서 노닥거릴 시간 없으니까.”
그가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곧 일어날 것 같은 그의 태도에 은화가 마른침을 삼켰다.
애초에 그는 은화가 찾아온 이유에 대해선 전혀 관심 없었다. 이참에 은화와의 관계가 더 진전되지 않도록 못을 박을 목적이었다.
은화의 생사가 직접적으로 관련된 문제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은화 차장에게 눈곱만큼도 호감이 없었고, 그녀가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겪든 그의 관심 밖의 일이었다.
“곧 점심시간이 끝나 가는데 할 말은 그게 답니까?”
도결이 그만 일어나겠다는 뜻을 밝히자, 그 제스처를 충분히 알아들은 은화는 수치심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고도결 부회장님은 여전하시네요? 이런 식으로 대놓고 사람 무안 주는 거, 나쁜 습관인데.”
은화도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도결이 잘나 봐야, 제 사람이 아니었고. 그가 아니더라도 그녀는 충분히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제안하러 온 거니까, 앉아서 더 시간 내주세요.”
뻔뻔한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 도결이 피식 웃었다.
“무슨 제안을 이런 곳에서 합니까?”
“이런 곳에서 보자고 한 건 제가 아니라, 고 부회장님이시죠. 어제 진성그룹 연구팀에 있는 직원이 한서일보 본사로 직접 찾아왔어요. 알고 계세요?”
도결이 조용히 침묵을 유지하자, 은화가 입술을 삐쭉였다.
“설마, 벌써 다 준비가 끝난 건가요?”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종이 신문으로 정보를 알던 시대는 알 수 있는 정보가 한정적이었지만, 현대는 빠르게 정보를 볼 수 있었다. 검색창 한 번만 이용하면, 세상 모든 지식이 와르르 쏟아져 나오는 시대였으니까.
어디 그뿐인가? 사람들은 제 일상을 SNS를 통해 전부 공개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기업 역시 투명성을 과시하지 않고서 살아남기 힘들었다. 그런 의미로 언론은 대기업에 있어서 필수로 얻어야 하는 도구가 된 셈이었다.
“전혀 몰랐습니다.”
그가 산업 스파이의 존재를 모르고 있단 사실에 놀란 건 도리어 은화였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요?”
사실 은화가 부친의 이야기를 들었을 땐 조금 뉘앙스가 이상했다. 마치 어떤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는 느낌.
“직원들을 전부 감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근데 한은화 차장은 할 일이 없으신가 봅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면.”
“진성그룹이 욕심나서 온 건 아니거든요?”
도결의 심리를 찰떡같이 이해한 은화가 버럭 짜증을 냈다.
“그래서요.”
“하아, 저기요. 전 회사로 직접 찾아갔거든요? 근데 저더러 카페에서 보자고 한 건 그쪽 아닌가요?”
도결은 마치 은화가 회사에 오면 안 되는 사람처럼 대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문전 박대당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말까진 꺼내고 싶지 않았는데. 욱하니까 결국 튀어나오고 말았다.
“괜한 오해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그 점은 양해 부탁해요.”
“그러니까 더 이상하잖아요. 오해를 사기 싫으면, 남들 없는 곳에서 만나야 하지 않나요? 여긴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은화의 말에 그가 입술을 닫았다. 그러나 전혀 흔들림이 없는 눈빛이었다.
은화는 그런 도결을 가느다란 눈으로 쏘아보았다.
“아, 설마 대중의 오해를 사는 것이 싫은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오해 사는 게 싫어서 그래요?”
말을 빙빙 돌리고 있었지만, 은화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도 알고 있었다. 차재경. 도결의 부인을 두고 꺼낸 말이었다.
허를 찔린 그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은화는 그를 보면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가짜 결혼이라더니. 그건 또 아닌 모양이죠?”
“아깐 진성에 관심 없다고 하신 것 같은데.”
“고 회장님이 절 그쪽 본가로 부르셨어요.”
은화의 말에 도결이 찡그린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은화는 인조인간 같던 그의 새로운 반응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설마 그 여자 진짜 좋아해요?”
“그게 한은화 차장과 무슨 상관이죠?”
대답을 피하는 걸 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지금 부인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은화는 도결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적어도 내가 핑계는 댈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고도결 씨는 이미 지키고 싶은 가정이 있다고 말하면 되니까, 이유가 타당해지죠. 안 그래요?”
선뜻 대답하지 않는 도결을 보면서 은화가 대답을 강요하는 눈빛으로 재촉했다.
그러자 도결은 질식이라도 할 것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차갑게 대꾸했다.
“1년 후에 이혼하긴 합니다. 그렇다고 내가 차재경 씨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재혼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평범한 여자가 들었다면, 달리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은화는 이 바닥을 너무 빤히 알고 있었다. 도결이 거부해 봐야, 별다른 뾰족한 방법은 없을 거라 예상했다.
아마 저 마음을 가진 것 자체로도 이미 충분히 차재경 기자를 사랑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 정도로 끔찍하게 여기는 줄은 몰랐는데. 재밌네요. 두 사람 사이.”
실은 재미없었다. 운이 나쁘면 자신의 남편이 될지도 모르는 남자의 사랑 이야기였다. 어떤 여자도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진 않을 것 같았다.
“그만 일어납시다.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얼굴 보고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으니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문제가 아니니까. 기다려요.”
은화는 우아하게 찻잔을 들고서 그를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가 정확하게 그녀를 향하자, 은화는 그제야 본론에 들어갔다.
“아무래도 덫에 걸린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제 아버지께서 갑자기 이런 제안을 하신 거겠죠.”
“본가에 가는 일이 신경 쓰여서 온 거라면, 잘못 찾아왔습니다. 이런 식으로 만남을 갖게 되면, 앞으로도 계속 이런 일이 반복될 겁니다.”
선을 긋는 도결을 보면서 은화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그녀가 먼저 일어섰다. 도결을 잡아먹을 것처럼 강렬하게 노려본 은화가 싸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알아요. 하지만 난 다른 사람은 못 믿어요. 내가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 곤란하다고요.”
그녀가 내민 휴대전화를 보고 도결도 말문이 막혔다.
심각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는 도결을 보면서 은화가 어깨를 건성으로 올렸다가 내렸다.
“이런 나도 내 힘으로는 못 막는 게 있더라고요. 이번 결혼이 그래요. 그 여자 좋아하죠? 그럼, 나랑 손잡고 움직이는 게 좋을 거예요. 험악한 꼴 만들고 싶지 않으면.”
이건 그의 약점을 확실하게 움켜쥔 한은화가 노골적으로 건넨 제안이었다.
“당신 장단에 어울릴 생각 없어요.”
“누가 그딴 거 해 달래요? 같이 식사나 한번 해요.”
은화의 뻔뻔한 표정에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렇지 않게 나타나서 같이 식사를 하자니. 도대체 어떤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 차장님, 나 유부남입니다. 지금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인지하고는 있어요?”
불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 말을 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어요. 이 관계를 깨려면, 나도 이 방법밖엔 없으니까. 정 껄끄러우면 본가 올 때, 차재경 씨도 같이 오세요.”
도결은 은화의 말에 미간을 구겼다. 속셈이 빤히 보였다. 결국, 어른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척 연기를 하겠단 뜻이었다. 재경을 방패 삼아서.
“제안은 못 들은 것으로 하죠.”
“공짜로 해 달란 거 아니에요!”
그가 더 말하라는 듯 쳐다보자, 그녀가 머뭇거렸다.
“나도 차 기자를 도울 일이 있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라고요.”
“도울 일?”
“네. 차재경 씨가 산업 스파이와 손잡았다는 누명을 해결하는 데 힘을 보탤게요. 어때요?”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고 회장님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을 텐데요.”
“킹을 잡으려면 방법은 두 가지뿐이잖아요. 완벽하게 킹을 잡거나, 체크메이트로 기권을 받아 내거나. 킹에게 먼저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결국 내가 먼저 잡히고 말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