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그는 마치 영역 표시를 하는 맹수처럼 재경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다정한 분위기에 놀란 영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재경을 보았다. 묻고 싶은 말이 많은 눈빛이었다.
재경은 서둘러 그의 손을 치우며 영란에게 인사를 했다.
“일행이 와서 먼저 가 볼게요.”
영란도 그녀가 만나는 상대가 고도결 부회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선뜻 함께하잔 말을 꺼내지 못하는 눈치였다.
“네. 그럼 내일 봬요.”
“조심해서 가세요.”
도망치듯 사라지는 영란을 보면서 도결이 고개를 기울였다.
“진짜, 여기까진 왜 왔어요?”
혹시라도 다른 기자들이 그를 볼까 봐, 재경이 서둘러 도결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임원 엘리베이터에 출입증을 찍는 재경을 보면서 그가 피식 웃었다.
“안 쓰는 줄 알았는데.”
“아, 이거요? 안 썼어요. 지금은 엘리베이터에서 다른 사람들이랑 마주치기 싫어서 쓰는 거예요.”
“서운하네요. 재경 씨가 잘 써 줬으면 했는데.”
재경은 그가 참 사람을 잘 믿는 타입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이라면, 절대 기자에게 이런 마스터키를 만들어 주지 않을 것 같은데.
‘그래서 백 비서님이 그렇게 경계한 건가?’
따지고 보면, 진짜 부부 사이도 아닌데 그녀에게 좀 과분한 선물인 것 같았다.
* * *
재경은 그와 집에서 식사를 하는 줄 알았는데, 그가 야경이 예쁜 레스토랑을 예약해 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오늘 혹시 생일이에요?”
떨떠름한 재경의 물음에 도결이 스테이크를 썰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왜요?”
의아한 눈빛으로 묻는 도결을 보면서 재경이 침을 꿀꺽 삼켰다. 평범한 사람들은 어떤 이벤트가 있을 때나 올 법한 장소였다.
‘재벌들은 원래 이런 곳에서 식사를 자주 하는 건가?’
적응이 안 되는 재경이 머쓱한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제가 볼 땐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표정인데요. 혹시 궁금한 게 있으면 편하게 물어봐요.”
얼마든지 대답해 주겠단 미소였다. 재경은 그런 도결의 시선을 슬쩍 피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괜히 민망해서 물컵을 입에 가져다 대면서 그에게 슬쩍 물었다.
“원래 평소에도 이렇게 비싼 곳에서 식사해요?”
그러자 도결은 대답 대신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훑었다. 물을 삼키는 하얀 재경의 목을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마음에 들어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놀란 재경이 흐르는 물을 손등으로 급하게 닦으며 그를 보았다.
“쿨럭. 뭐가요?”
“우리 지금 데이트하는 중이잖아요.”
머뭇거리는 재경을 보면서 도결이 잘 썰린 스테이크가 담긴 접시를 건네주었다.
“평소에는 간단하게 먹어요. 이런 곳은 딱히 올 일 없었고.”
단호하게 잘라 말하는 그를 보면서 재경이 은근슬쩍 사심을 담아 물었다.
“이런 곳은 왜 올 일이 없었어요?”
“어차피 정략 결혼을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다들 그렇게 비즈니스 하니까.”
스테이크를 썰면서 이야기를 하는 그는 마치 영화에서 나오는 장면처럼 우아했다. 도결은 제게 시선을 떼지 못하는 재경과 눈이 마주치자, 예쁘게 싱긋 웃었다.
“차재경 씨랑 같이 오고 싶었어요. 근사한 식사, 평범한 데이트. 그런 거 전부 다 하고 싶어서. 재경 씨는 어때요?”
그의 물음에 재경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하는 말은 결국 연인처럼 데이트하자는 건데.
“데이트하자는 거죠? 근데 우리가 그래도 괜찮을까요?”
걱정스러운 재경의 물음에 도결이 미간을 구겼다.
“혹시 나랑 하는 데이트가 마음에 안 내켜요?”
“아뇨. 그게 아니라.”
재경은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몰라서 입술을 닫았다. 그는 그런 재경을 조용히 기다렸다.
“실은 우연히 들었어요. 1년 후에 만날 사람이 있다는 거….”
재경이 붉어진 눈을 들키기 싫어서 휙 시선을 돌렸다.
“탓을 하려는 건 아니고요.”
“고 회장님께 들었어요? 아니면, 대표님?”
재경에게 그런 말을 꺼낸 사람이 제 부친인지, 모친인지 묻는 질문이었다. 재경은 그런 것에 큰 의미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알았느냐가 중요한 건 아니고요. 1년 후에 결혼하실 그분께 상처가 되고 싶지 않아서 꺼낸 말이에요.”
재경은 한 입도 못 먹은 고기가 아까웠지만, 가슴이 답답해져서 도저히 식사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런 자리는 부담스러우니까 다음엔 집에서 먹었으면 좋겠어요.”
* * *
그 시간 한서일보 본사에서 한은화 차장은 화가 잔뜩 난 얼굴을 하고 사장실로 향했다.
은화의 표정을 보고 깜짝 놀란 비서가 서둘러 자리에서 나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차장님. 죄송하지만, 지금은 안으로 못 들어가십니다.”
“내가 그런 말 하면 돌아갈 줄 알았어요?”
싸늘한 은화의 표정은 어디 감히 네가 내 앞길을 막느냐는 듯했다.
불같은 은화랑 싸워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비서가 슬쩍 못 이기는 척 몸을 비켰다.
“안에 손님이 계십니다.”
“아, 손님? 궁금하네요. 도대체 어떤 대단한 사람이 들어와 있길래. 나한테 이런 문자를 보낼 수 있는지.”
한 사장이 보낸 문자가 원인인 모양이었다. 비서인 그가 모를 정도면 아무래도 집안일 같은데 끼어들어서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비켜요. 직접 문 열어 줄 것 아니면.”
비서가 비키자마자, 사장실에 들어선 은화는 소파에 앉아 있는 김영란을 보면서 미간을 구겼다.
“이 촌스러운 여잔 누구예요? 아버지 새 애인?”
얄궂게 말하는 은화를 보면서 한 사장이 헛기침을 했다.
“중요한 일로 온 사람이야. 조용히 나가 있어.”
“저도 지금 중요한 일로 방문했는데. 자식보다 더 중요한 일인가 봐요?”
자리를 비키는 건 언제나 그렇듯 은화 쪽이 아니었다. 영란이 서둘러 일어나선 고개를 숙였다.
“저는 볼일이 끝나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
“잠깐, 멈춰요.”
도망치듯 빠져나가려는 영란을 불러 세운 건 은화였다.
영란을 훑는 은화의 눈빛은 예리했다. 깨진 유리 조각처럼 날카로운 은화의 눈빛에 영란이 몸을 움츠렸다.
“사장님과는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믿어 주세요.”
“알아요.”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은화의 말에 놀란 영란이 눈을 끔뻑였다.
“그럼, 왜 멈추라고….”
“어이가 없어서 멈춰 보라고 했어요. 내가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는 게.”
눈썹을 매섭게 올린 은화를 막은 건, 한 사장이었다.
“그만 가 봐도 좋아요. 넌 좀 앉아. 흥분 가라앉히고 이야기하게.”
생쥐처럼 사라지는 영란을 보면서 은화가 코끝을 찡그렸다.
“좀 조용히 평범하게 나타날 순 없는 거야? 왜 매번 이렇게 거칠게 대응하는 거니.”
“아버지 평범한 거 싫어하시잖아요.”
“뭐?”
“제가 평범하게 고분고분 말 잘 들으면, 이때다 싶어서 멋대로 휘두르시잖아요.”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
“살다 살다, 이런 막장은 또 처음 보네요.”
휴대전화가 깨질 듯이 탁상 위에 퍽 내려놓는 은화의 행동은 거칠기가 그지없었다. 휴대전화 화면에는 한 사장이 보낸 메시지가 그대로 떠 있었다.
“곧 가족이 될 사람들인데 미리 만나서 식사 정도 할 수도 있지. 너무 유별나게 굴지 마라.”
그러자 은화가 코웃음을 쳤다.
“벌써 노망나셨어요?”
“참는 것도 정도가 있다. 함부로 말하지 마.”
“지금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에요. 참는 것도 정도가 있어요. 딸한테 불륜녀가 되란 말을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하세요?”
두 사람은 서로를 잡아먹을 것처럼 으르렁댔다. 부녀지간이 아니라고 할까 봐, 화가 날 때 떨리는 귀까지 똑같았다.
“저쪽에서 너한테 함부로 못 할 거야. 감히 불륜녀라고 생각하지도 않아. 너무 기분 상해하지 마.”
한 사장은 그렇게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했지만, 벌떡 일어난 은화는 싸늘한 미소를 보일 뿐이었다.
“제 기분은요?”
싸늘해진 분위기에 당황한 한 사장이 눈을 끔뻑였다.
“뭐?”
“저 한은화예요. 절대 아버지 생각처럼 흘러가게 두지 않아요.”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문을 쾅 닫고 사라지는 은화의 뒷모습을 보면서 한 사장이 이마를 짚었다.
“저 성질머리. 쯧.”
눈을 감은 한 사장 앞에 조용히 나타난 건 밖에 있던 비서였다.
“어떻게 처리할까요?”
“내버려 둬. 고 회장도 저 성질머리를 알아야 얕보지 않겠지.”
* * *
재경은 갑작스럽게 점심 약속을 취소한 도결에게서 서운함을 느꼈다. 영란과 식사를 하겠다고 한 건 저인데, 뭔가 묘하게 기분이 찝찝했다.
“두 사람은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슬쩍 어제 일을 묻는 영란 때문에 재경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하다가 알게 된 사이요.”
“아. 난 여기서 꽤 오래 일했는데, 부회장님이랑 식사해 본 적 없었거든요.”
“진성으로 출입하기 전에 인터뷰로 우연히 알게 된 사이라서요.”
답하기 껄끄러워하는 재경의 표정을 살피면서 영란이 슬쩍 물러섰다.
“하기야. 우리도 이렇게 친해졌으니까. 비슷하겠네요.”
말끝을 흐리는 영란을 보면서 재경이 미안하단 시선을 보냈다.
“어젠 미안해요. 잘 들어갔어요?”
“뭐, 마침 볼일도 생기고 해서. 잘 갔어요.”
“일이요?”
재경이 관심을 두자, 갑자기 영란이 목을 붙잡았다.
“켁켁. 물 좀….”
물컵을 건네자, 허겁지겁 물을 마신 영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일어날게요.”
* * *
재경은 급하게 일어난 영란이 신경 쓰여서 곧장 약국에 들르려고 회사를 나왔다. 몇 건물 지나면 보이는 약국을 향해 걷고 있는데 근처 건물 1층 카페에 앉아 있는 도결이 보였다.
‘점심 약속이 여기에서 있었던 건가?’
근처에서 가장 좋은 호텔 카페였는데, 그와 마주 보고 앉아 있는 여자의 얼굴이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본 얼굴인데. 누구더라. 아! 한은화 차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