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60)

<35화>

새벽 6시.

“으음.”

뒤척이던 재경이 화들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멀끔하게 입은 잠옷을 보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언제 갈아입은 거지?”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재경이 고개를 돌려 창문을 보았다. 남색 하늘을 보면서 그녀가 침대 위에서 내려왔다.

“어으. 머리 아파.”

문고리를 돌리며 나갔을 땐, 도결이 머그잔을 들고 서 있었다. 

“잘 잤어요?”

회사에선 빈틈없는 정장 차림으로 있었다면, 집안에서의 그는 편안한 실내복을 입고 있었다. 맨투맨 상의와 일자바지, 편안한 차림이 분명한데 이상하게 금방 잡지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분위기 있었다.

“네. 근데 여긴 어쩐 일이에요?”

재경이 아무도 없는 복도를 둘러보면서 물었다. 

“술을 많이 마신 것 같아서요.”

“그래서요?”

힐끗. 재경은 시선을 그가 쥐고 있는 머그잔에 두었다. 

“꿀물이 속에 좋대요. 안으로 좀 들어가도 될까요?”

그의 질문에 재경이 어색하게 문을 열었다. 재경이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가자, 그가 느릿하게 따라 걸어왔다.

방 안에 단둘이 있단 사실에 묘한 기분을 느낀 재경이 서둘러 도결에게 말을 걸었다.

“아, 저 어제는 어떻게 들어왔어요?”

“안겨서 왔어요.”

무심하게 대답하는 도결을 보면서 재경의 눈이 커졌다. 

그냥 아무렇게나 꺼낸 말이었다. 설마 그가 자신의 귀가를 기억하고 있을 줄 모르고 꺼낸 말인데.

“누구한테요?”

생각도 못 한 그의 대답에 재경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미간을 살짝 구겼다.

“특별히 기대하는 사람이라도 있었나 봐요.”

혹시라도 만취해서 주혁을 부른 건 아닐까 해서 물은 말이긴 했다. 

‘그렇게 티가 났나?’

머쓱해진 재경이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괜히 눈을 피하고 싶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런 표정으로 날 피하면.” 

그가 한 걸음 다가오자, 그녀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마치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저, 지금 너무 가까워요.”

물러서려는 재경의 허리를 한 손에 움켜잡은 도결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나 너무 서운한데.”

“서운하다니요? 설마, 고도결 씨가…?”

말을 잇지 못하는 재경을 보면서 그가 아이처럼 맑게 미소 지었다.

“물어봤어야 했는데.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아. 다행이네요. 고도결 씨라서. 근데 어떻게 만났어요, 우리?”

안도하는 눈빛으로 묻는 재경을 보면서 도결의 입가에 따스한 미소가 걸렸다.

“정문 앞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택시 기사님이 곤란해하는 것 같아서. 멋대로 행동해서 미안해요.”

재경은 너무 놀라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다음에는 그냥 깨워 줘요. 혼자 걸을 수 있어요. 많이 무거웠죠?”

“네. 좀 무겁네요.”

그의 말에 재경이 경악하며 눈을 끔뻑였다. 도결은 재경의 손에 부드럽게 머그잔을 넘겼다.

“재경 씨 말고, 이 머그잔이 무겁다고요.”

얼떨결에 컵을 받은 재경이 저를 빤히 보는 그의 시선에 못 이겨 꿀물을 삼켰다.

“앗, 뜨거워.”

그녀의 반응에 도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천천히 재경의 잔을 빼앗아 들고선 호 하며 꿀물을 식혔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요.”

도결은 마치 진짜 연인을 대하듯이 다정했다. 제대로 된 연애를 해 본 적 없는 재경은 이런 상황이 별로 익숙하지 않아서 당황스러웠다. 

“직접 할게요. 바쁠 텐데.”

편안한 그의 옷차림을 보면서 그녀가 중얼댔다. 그러자 도결이 왼쪽 손목을 들어 올리면서 손목시계로 시간을 봤다.

“그럼, 천천히 마시고 준비해서 나와요. 기다릴게요.”

*   *   *

재경은 도결과 함께 출근한 걸 들키지 않게 조심해서 다녔으나, 재경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는 백 비서 때문에 주목받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앗, 차 기자님!”

재경을 향해 밝게 인사한 사람은 영란이었다. 

“어젠 잘 들어갔어요?”

“덕분에요. 많이 취했던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영란의 물음에 재경이 고개를 한 번 크게 끄덕였다. 

“좋은 일 있었나 봐요? 표정이 밝아지신 것 같은데요?”

“아뇨. 영란 씨는 여기까지 어쩐 일이에요?”

재경의 물음에 그녀가 조용히 손목을 잡았다.

“어제 저한테 한 말 기억 안 나요?”

“취해서 다 기억이 나진 않는데….”

민망해하는 재경을 보면서 영란이 할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보조개가 움푹 파이는 미소가 예쁜 얼굴이었다.

“어제 직원들이 피하는 것 같다고 울었잖아요.”

“울었어요? 제가? 와. 술을 끊어야지, 정말.”

“저도 같이 울었으니까. 너무 그렇게 민망해하실 필요 없어요.”

“그래서 여기 온 진짜 이유는 뭐예요? 오늘도 술 마시잔 이야기는 아닐 테고?”

재경의 물음에 영란이 눈을 깜빡였다.

“제가 여기 계약직 직원들과는 좀 친해서요.”

“예?”

당황한 재경이 영란의 말에 눈을 끔뻑였다.

“아이, 어제 그랬잖아요. 재경 씨도 진성그룹 본사 정직원은 아니라고.”

거기까지 기억난 재경이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죠.”

“그래서 끼워 주려고요. 우리 모임에.”

*   *   *

영란의 소개로 만난 건 경비직으로 일하시는 중년의 남자와 청소를 하고 있는 여성 두 분이었다.

“계약직이 전부 모인 건 아니지만. 이렇게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곤 하거든요.”

영란의 소개에 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한서일보 경제부 차재경 기자입니다.”

기자라는 말에 몸을 움찔하며 아주머니 한 분이 껄끄러워했다.

“…우린 할 말 없는데.”

“그러게. 딱히 계약직인 것에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도 이런 자리인 줄 알았으면, 안 오는 건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영란이 미안하단 눈으로 재경을 보았다. 

재경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웃으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다들 기자라고 하면 그런 오해들을 하세요.”

“오해?”

“기레기 아시죠? 특종이라면 남의 가슴에 있는 상처도 후벼 팔 것 같은 단어.”

재경의 말에 다들 말문이 막혔다. 

“꼭 그런 뜻으로 한 건 아닌데.”

“정규직이 아니라고 하면, 다들 우리가 정규직 욕심을 부리는 줄 아니까. 부담스러워서 그래요.”

재경은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았다. 어떤 사람들은 현재에 만족하고 살기도 했다. 구태여 잘 지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을 후벼 파고 싶은 마음은 재경에게도 없었다.

“저도 그래요. 보도 자료 내려오는 것으로 보도 기사는 충분해요. 발제 기사도 마찬가지고요.”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우릴 취재하려는 건 아니란 거지?”

안도하는 아주머니를 보면서 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성에 있는 기자들 대부분은 진성에 대한 안 좋은 기사는 안 써요.”

그녀의 말에 가장 놀란 반응을 보인 사람은 영란이었다. 누가 봐도 화들짝 놀라는 영란을 보면서 재경이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전부 편견인 거죠.”

“그래도 기자들은 대부분 그런 기사로 인기를 얻지 않았나?”

경비원의 말에 재경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좀 이상하지 않아요? 진성에서 저희 있으라고 사무실까지 내줄 이유는 없잖아요.” 

재경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경비원은 손을 불쑥 내밀었다.

“그간 내가 너무 미안했습니다. 이상한 취재를 해서 나를 곤란하게 만들진 않을까 하고 걱정했어요.”

경비원의 말에 재경이 괜찮다는 미소를 보였다. 그러나 모두가 그녀의 말을 믿어 주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기업을 깎아내리는 기사도 많이 있잖아요. 예전에 차 기자님이 그런 기사를 썼던 것 같은데요.”

영란의 말에 당황한 재경이 눈을 끔뻑였다. 물론 재경이라고 늘 좋은 기사만 쓰는 건 아니었다. 발제 기사라는 것이 보통 그렇듯, 특종이 될 수 있으면 쓰는 게 옳았다.

“경쟁사에 대해서 깎아내리는 기사를 쓸 때가 있긴 하죠. 보통 저도 그런 기사는 쓰긴 해요. 출입처에 피해를 주진 않으니까요.”

기자들도 사람이었다. 출입처에 크게 위협이 될 만한 기사를 먼저 터뜨리는 바보는 없었다. 공동체 생활 안에 끼어 있는 사람이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긴 쉽지 않았다.

“진짜 믿어도 되는 거예요?”

“으음.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대답하기 곤란해요. 정말 포기할 수 없는 특종이 있을 땐 저도 장담은 못 하거든요.”

지나치게 솔직한 재경의 대답에 그들이 안도하며 웃었다. 경직된 표정으로 서 있는 영란을 걱정하면서 재경이 웃음을 멈추고 물었다.

“영란 씨, 혹시 어디 아파요? 안색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아녜요. 시간이 다 된 것 같아서 그래요.”

다급하게 자리를 떠나는 영란을 보면서 다들 해야 할 일이 있다면서 흩어졌다.

*   *   *

“그러니까, 계약 만료를 앞둔 직원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다는 거로군.”

고 회장이 서류를 보면서 백 비서를 향해 물었다. 백 비서는 간결하게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되게 할 일이 없는 모양이로군.”

“그렇게 보이십니까?”

백 비서가 안도한 목소리로 묻자, 고 회장이 삐딱하게 고개를 들어 백 비서의 얼굴을 보았다.

“설마, 주제도 모르고 차재경이를 고 부회장 짝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지?”

“예? 그, 그럼요.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깨갱대며 꼬리를 내리는 백 비서를 보면서 고 회장이 코웃음을 쳤다.

“꿈이라는 둥 인생이라는 둥 하도 허풍을 떨길래 하는 말이야. 뭐, 대단한 특종을 물어 가려나 했더니 고작 비정규직. 쯧.”

혀를 차는 고 회장을 보면서, 백 비서가 의아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럼, 좋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좋아? 어디가 좋아?”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묻는 고 회장의 물음에 백 비서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회사에 위협이 되는 인물이 아니란 뜻이잖습니까. 오히려 더 나은 것 아닐까요?”

“하아. 왜 사람이 제 수준에 맞는 사람과 가까이 지내라고 하는 줄 알아?”

고 회장과 말을 할 때면 항상 거대한 산맥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모르겠습니다.”

“키우는 개한테는 인간처럼 대접하면 안 돼. 자기 수준을 모르고 감히 주인과 대등하다고 착각하잖아.” 

“…….”

“사냥개가 주인을 물면 더는 내 사냥개가 아닌 거야. 언제 헛짓할지 모르니까. 눈여겨봐. 비정규직 사람들도 잘 확인해 두고.”

“네. 회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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