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그래서 회장님께서 사모님의 일과를 전부 보고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백 비서는 고 회장과 있었던 일을 고도결 부회장에게 전부 보고했다.
“그래서 하겠단 겁니까?”
예전이었다면, 딱히 보고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요즘의 고도결 부회장은 가끔 비이성적인 선택을 하고 있으므로 괜한 문제가 생기기 전에 미리 보고하는 것이었다.
“네. 해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내가 안 된다고 지시해도?”
예상했던 것보다 더 차갑게 반응하는 제 상사 때문에 백 비서는 곤란해졌다.
아무래도 제 상사에게 차재경 기자는 가짜 부인이 아닌 것 같았다. 진짜 부부보다 더 진짜 같은 느낌. 정작 본인들은 인지 못 하는 것 같지만….
“어차피 고도결 부회장님도 비슷한 보고를 지시하셨으니까. 큰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난 그 지시를 거두려던 참인데요.”
그러자 백 비서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언짢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제가 거절할 상황은 아니라서요.”
도결이 탁상 위를 툭툭 두드렸다.
그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진 않았지만, 회사 생활이 의리로 될 것도 아니었다.
“기분 상하셨습니까?”
당연한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백 비서를 보면서 도결이 미간을 구겼다.
백 비서는 대답이 없는 도결을 보면서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상황이 마음에 안 드시면, 하루라도 빨리 회장님이 되시면 됩니다. 저는 부회장님을 모시는 비서 실장이긴 하지만, 고 회장님의 지시로 부회장님의 비서 실장이 된 사람이라서요.”
그러니까 백 비서는 지금 고 회장 라인을 타고 있으니, 거절할 수 없단 말을 돌려 하는 중이었다.
도결은 손가락을 까딱이며 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래서 나한테 이렇게 통보하는 이유는 뭡니까?”
어차피 회장실 비서 팀이 전부 보고하고 있을 게 뻔한데, 왜 자신의 비서 팀까지 재경을 감시해서 보고하란 건지. 그는 지금 그 점을 묻고 있는 것이었다.
눈치 빠른 백 비서가 얼른 대답했다.
“의심 아니겠습니까?”
“누구를 의심한단 겁니까?”
도결이 미간을 찌푸리자, 백 비서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진성그룹에서 고 회장님이 모르는 일이 있을 것 같으십니까? 전부 다 알고 계십니다. 저보다 발 빠르게 보고하는 비서 팀이 있으니까요.”
그는 백 비서의 말을 차분하게 듣고 있었다.
회장님이 이런 식으로 제게 관심 두는 건 딱 질색인 도결이었다.
“그래서 내가 차재경 씨를 의심하라고 시킨 일이다. 이겁니까?”
조심스럽게 고개를 까딱이는 백 비서를 보면서 도결이 나지막하게 중얼댔다.
“약속은 또 못 지키게 되었군.”
“예?”
“아닙니다. 그래서 백 비서님이 내게 원하는 건 뭡니까? 이렇게 보고하는 이유가 있을 텐데요.”
회장님께 보고하게 될 내용을 미리 확인하란 건지, 아니면 확인하지 말란 것인지를 묻는 것이었다.
“왜 대답이 없습니까?”
백 비서는 굳은 표정으로 도결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지금까지 결정은 늘 부회장님께서 하셨잖습니까. 진짜, 제 의도가 궁금하셔서 묻는 건가요?”
도결은 제 찝찝한 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몸이 굳었다. 재경의 일에 참견하고 싶었다.
하지만 약속을 어기면 안 된다는 사실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재경과의 약속만 없었다면, 도결은 이 보고서를 먼저 보려고 했다. 그러나 재경에게 약속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번 보고는 전부 확인하지 않겠습니다.”
재경이 실망하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또 예상 밖의 대답을 하는 도결을 보면서 백 비서가 반쯤 포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걸 몰라요?”
“부회장님에 대해서 제법 알고 있는 게 많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일로 더 확실해졌습니다. 저는 부회장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아쉬움인지 서운함인지 모를 표정이 백 비서의 얼굴로 그늘졌다.
도결은 그런 백 비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까딱였다.
“나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왜 이러는 건지.”
힘없이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가는 백 비서를 보면서 도결이 주먹을 쥐었다.
* * *
영란의 퇴근 시간에 맞춰 재경은 그녀와 평범한 맥주 가게에 들렀다. 삼삼오오 모인 가게 안은 제법 소리가 컸다.
“여기 괜찮아요?”
재경이 습관처럼 물었다. 장소는 인터뷰하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정보원을 보호하는 게 기자의 의무이기도 했기에 영란에게 물었다.
“아, 뭐. 네. 괜찮네요.”
통나무처럼 딱딱하게 굳은 영란을 보면서 재경이 부드럽게 웃었다.
따끈따끈하게 나온 치킨을 영란의 앞으로 밀어 주면서 재경이 맥주병을 들었다.
“술 좀 하세요?”
“네. 오늘 나와 주셔서 감사해요.”
소심해 보이는 영란은 어깨도 많이 위축된 모습이었다.
빈 잔에 술을 따라 주었을 때, 영란은 살짝 시선을 피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아녜요. 사실 저도 진성그룹에 아는 사람이 없어서 곤란하던 참이었거든요.”
“아. 여기 사람들이 좀 그래요. 처음에는 곁을 잘 안 내주죠.”
영란이 처음보단 조금 펴진 표정으로 대답하며 빈 잔을 내려놓았다.
“목마르셨나 봐요.”
“예?”
“원샷을 하셔서.”
재경이 작게 웃자, 영란의 얼굴이 붉어졌다. 영란은 그 뒤로도 술을 쭉쭉 들이켰다. 그 모습은 마치 술을 마시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어보고 싶다고 했던 말, 실은 물어보고 싶었던 게 아니죠?”
재경의 물음에 영란이 몸을 움찔했다. 초조해 보이는 눈동자로 영란이 아니라며 부인했다.
“진짜, 궁금한 게 있어서 그랬어요.”
“어떤 게 궁금하셨을까요?”
달달 떠는 영란의 다리를 슬쩍 본 재경이 부드럽게 웃었다.
“진성그룹의 경쟁사에 대해서요.”
“아. 경쟁사.”
재경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성그룹을 출입처로 둔 이상 진성에 관심을 안 둘 수가 없었다. 애초에 보도 기사 자체가 출입 회사가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해 주는 것이니, 회사에 대한 관심이 없으면 기사를 쓰기 어려웠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느 회사가 더 미래가 창창할까요?”
영란의 질문에 재경이 잔을 들었다. 참 당혹스러웠다. 전이라면 그 어떤 선입견도 없이 대답해 주었을 텐데. 이 순간 도결의 얼굴이 왜 떠오르는 건지.
“기사로 아무리 봐도 모르겠더라고요. 어느 회사의 미래가 더 창창한지….”
재경은 술을 몇 번 더 마신 뒤 영란을 보았다.
“혹시 김영란 씨는 정규직이 아닌가요?”
“네?”
영란은 화들짝 놀라서 재경을 바라보았다. 재경은 가볍게 웃으며 편하게 대답했다.
“귀신처럼 맞히죠?”
“…뭐. 제가 계약직처럼 생긴 모양이지요.”
“딱히, 그런 느낌은 없었어요. 회사에 있으면 다 같은 회사원인데. 그런 생김이 어디 있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재경은 천천히 영란을 살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과 옷깃을 꽉 잡은 두 손. 영란은 세상에 불만이 많아 보였다.
“경쟁사의 미래에 관심을 갖는 건 평범하지 않잖아요. 마치 이직 의향이 있는 것처럼 보이죠.”
아무렇지 않게 말하면서 술을 따르는 재경을 보면서 영란이 고개를 숙였다.
“제가 사람을 잘못 찾아온 걸까요?”
“글쎄요.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전 진성그룹 직원은 아니라서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재경이 영란에게 잔을 건넸다. 잔을 받은 영란의 코끝이 루돌프 코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 * *
도결은 늦은 시간까지 나타나지 않는 재경을 기다리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정문 앞을 어슬렁댔다.
백 비서도 재경의 행방을 모른다고 하고, 재경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마치 일부러 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누군가 그를 이토록 기다리게 해 본 적이 있던가? 잘난 그의 부친도 하지 못한 행동을 그녀가 하고 있었다.
화가 나야 하는데, 걱정이 더 앞서고 있었다. 도결은 도무지 이 감정을 어떻게 따라가야 할지 몰라서 당혹스럽기만 했다.
멀리서 택시가 보이자, 도결이 몸을 기울였다. 도결을 발견한 택시 운전사가 문을 벌컥 열고 나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 아가씨 집이 진짜 여기 맞나요?”
뒷문을 연 택시 기사가 도결을 보며 물어 왔다. 그가 천천히 걸어가서 뒷좌석을 확인하자, 재경이 술에 취해 잠들어 있었다.
“맞습니다.”
“택시비는 계산했는데, 아무리 봐도 이 동네 사는 사람처럼은 안 보여서. 일하는 아가씨인가 했어요.”
도결은 잠든 재경을 빤히 바라보다가 씁쓸하게 웃었다. 전화 한 통이라도 주지. 그럼 바로 달려갔을 텐데. 재경의 선 긋는 태도에 괜한 서운함이 밀려들었다.
“제 집사람이에요.”
“예? 아, 이 집에 사는 사모님이시구나.”
놀란 택시 기사를 보면서 그가 고개를 까딱였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안전하게 돌아가세요.”
그가 고개를 살짝 숙인 뒤 재경을 두 손으로 번쩍 안아 들었다. 사용인들을 불러도 되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재경에게 가장 가까이 닿는 건 언제나 자신이고 싶었다.
“신혼부부인가 보네요. 참 보기 좋아요.”
머쓱해진 택시 기사가 두 사람을 칭찬하고 떠났다.
도결은 정문을 열고도 한참을 걸어가야 하는 제집이 마음에 들었다.
그동안은 왜 이토록 효율성 없이 지었을까 싶었는데, 재경을 안고 걷는 지금만큼은 정원이 조금 더 커도 좋았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눈을 감고 잠든 재경에게선 고소한 닭튀김 냄새와 달짝지근한 맥주 냄새가 났다. 재경을 기다리면서 걱정했던 것이 사르르 녹아내리고 있었다.
“저녁은 먹은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걱정했어요. 늦은 시간까지 안 와서.”
돌아올 대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다정하게 말을 걸고 싶었다. 이대로 재경을 영원히 품에 안을 수 있다면….
“너무 과한 욕심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