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60)

<33화>

완전한 반칙이었다. 적어도 재경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한번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하지 않나. 그래서 재경은 계속해서 뻔뻔하게 그를 몰아세웠다.

“그렇게 말하면 제가 뭐가 돼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재경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가 미간을 찡그렸다. 너무 심했나?

“동의 없이 멋대로 행동해서 미안합니다.”

모든 것이 완벽한 그는 사과까지 깔끔했다. 나중에 이혼할 때도 이렇게 깔끔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재경은 괜히 마음이 울적해졌다.

“저는 고도결 씨 부속품이 아니라는 것만 잘 기억해 줘요. 우리가 1년간 부부 사이라고는 하지만, 설사 진짜 부부라고 해도 서로를 소유하는 건 아니잖아요.”

재경의 말이 끝나자, 그가 이해하지 못한 눈으로 머뭇거렸다.

“진짜 부부 사이여도 안 된단 말입니까?”

“뭐, 어디 부부만 그렇겠어요?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일어나선 안 될 일이죠.”

그는 왜냐는 말을 표정으로 묻는 듯했다. 

재경은 진짜 그가 아무것도 몰라서 머뭇거린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설마, 고 회장님이 사람을 붙이고 그러는 건 아니죠?”

두리번거리는 재경의 눈빛엔 약간의 의심이 담겨 있었다. 

도결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재경을 빤히 바라만 볼 뿐이었다.

“사람은 타인의 소유가 될 수 없어요. 오직 나 자신만 스스로를 소유하는 거죠.”

너무 당연한 말을 하고 있는데 그가 감동이라도 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그렇게 눈을 반짝일 만한 말이던가? 재경은 어색해진 공기 흐름을 바꿔 보고자, 괜히 시선을 돌렸다.

“하여튼 호감을 표시하는 방법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요.”

초밥을 집어 먹는 재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결이 대뜸 물어 왔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예?”

“애가 타서요. 이런 쪽엔 전혀 경험이 없습니다. 어디다 상담할 수 있는 곳도 없고요.”

처음 본 날 만리장성을 쌓아 놓고선, 이런 쪽엔 전혀 경험이 없다니. 재경은 황당함을 숨기지 못하고 도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성한테 호감을 표현하는 방법을 알려 달란 거예요? 그것도 호적상 부인인 나한테?”

끄덕. 고개를 한 번 위아래로 흔드는 그를 보면서 재경이 눈을 깜빡였다.

잘난 저 얼굴을 하고선 여태 제대로 된 연애도 한번 못 해 봤다니. 이건 정말이지 재능 낭비였다. 

이성 관계가 난잡할 것같이 생긴 얼굴로 금욕적인 순진한 삶을 살았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크흠. 내가 이런 걸 도와서 얻는 게 뭐예요?”

하기 싫단 말을 돌려 하는 재경을 보면서 도결이 느른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나 지금 제안하는 거 아닌데.” 

“그럼, 부탁하는 건가요?”

“다른 사람한테 호감을 표현하면, 불륜 아닙니까? 계약이 지속되려면 차재경 씨가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하는 부분인데.”

재경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순진한 삶을 살았단 건 취소다, 취소! 도결은 협박에 도가 튼 사람이 분명했다.

“그래요. 차근차근 알려 드릴게요.”

*   *   *

진성그룹 본사에 재경이 부회장실에 들락날락하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지경이었다. 

애초에 도결은 그 점을 노린 것 같았고, 곤란한 건 백 비서뿐이었다.

“차재경 기자가 진성에 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고 회장이 백 비서를 직접 불러서 물어볼 정도라면, 사태의 심각성은 더 말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네. 사실입니다.”

아무리 백 비서의 상사가 고 부회장이라고 해도 진성그룹의 오너는 고 회장이었다. 그러니까, 그를 고용한 사람이 아직까진 고 회장이란 뜻이었다.

“고 부회장이 안 하던 짓을 계속하는 모양인데. 왜 보고를 안 한 거지?”

고 회장의 날카로운 눈빛에 백 비서가 입을 다물었다. 백 비서도 공과 사를 구별하지 않고, 재경에게만 유난히 너그러운 고 부회장에게 불만이 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제가 모시는 상사의 날개를 꺾고 싶은 비서는 이 세상에 없다.

“보고할 만큼 심각한 상황은 없었습니다.”

“지금, 자네가 내 앞에서 심각한 상황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한 건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낸 고 회장은 곧 물건을 집어 던질 기세였다. 고 회장은 늘 그랬다. 제 마음에 들지 않는 순간이 오면 버럭 성질을 부리고는 했다. 

이는 고도결 부회장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백 비서가 목격한 상황만 보면 그랬다.

“제가 실언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인 백 비서는 이 상황이 빨리 흘러가길 바랐다. 딱 1년만 숨을 죽이면 끝날 일이었다. 

1년 후면 두 사람은 이혼할 테고, 고도결 부회장이 지금처럼 이성을 잃는 선택은 없을 것이다.

“난 기자들은 안 믿어. 고작 남의 불행이나 팔아서 장사하는 장사치들의 졸개잖아. 안 그런가?”

이 말을 들었다면, 고도결 부회장이 반박하지 않았을까. 백 비서는 빠르게 머릿속에서 제 상사의 심중을 지웠다. 지금 그의 편에 서는 건 옳지 않았다.

“부회장님께선 요즘 차재경 기자와 점심 식사를 함께하고 있습니다.”

일부러 차재경 기자라는 말에 힘을 실었다. 괜히 고 회장의 심기를 더 건드려서 좋을 게 없으므로.

“알고 있네. 설마 내가 진성에서 그런 것도 모르고 있을까 봐?”

하지만 이번에도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백 비서가 다시 한번 반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먼저 보고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일과를 전부 보고하도록 하게.”

고 회장의 날카로운 지시에 고개를 숙인 백 비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고개를 들자 백 비서의 표정은 무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저, 회장님. 고도결 부회장님의 일과는 입사 이후로 매일 보고드리고 있습니다.”

“누가 고도결 부회장 일과를 보고하라고 했나? 차재경 기자 일과를 보고하란 걸세.”

백 비서는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동안은 고도결 부회장이 1년 후면 이혼할 부인에게 지나치게 잘하는 부분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1년 후면 이혼을 시키고도 남을 고 회장이 왜 이토록 예민하게 차재경 기자를 경계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가 보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회장실에서 나온 백 비서는 한숨을 쉬었다.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데, 차재경 기자까지 주시해야 하는 점이 싫은 탓이었다.

‘하기야, 이런 일이 아니어도 주시하고 있긴 했지.’

백 비서는 처음부터 차재경 기자를 완전히 신뢰한 적 없었다. 

애초에 한은화 차장이 나타나야 할 자리에 일반인인 그녀가 나타났다는 것이 의아했다. 

충분히 의심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어째서 아무도 이 점을 지적하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죄인인 내가 꺼낼 말은 아니니까. 침묵할 수밖에 없지만.’

도결의 업무는 전부 백 비서가 관리하고 있었으므로 이 부분은 그가 더 나서서 문제 삼을 순 없었다. 그래도 차재경 기자를 경계해야 한단 생각은 여전했다.

*   *   *

기자들은 재경이 도결과 함께 식사하는 것에 대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가 최근에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 것도 한 몫 했던 것 같았다.

“점심때마다 다른 곳에서 먹는 것 같던데. 어딜 가는 건지 물어봐도 되나?”

한 남자 기자가 묻는 말에 재경이 애매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냥 어쩌다 같이 먹을 사람이 생겨서요.”

“어쩌다가 생겼구나.”

그렇게 말하면서 질문한 사람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재경은 자신이 도결과 결혼한 일반인이란 사실을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1년 후에 이혼할 사이인데. 뭐가 자랑이라고 떠드는가 싶었다.

“좋은 정보원이 생긴 거면, 나중에 발제 기사 쓸 때 언질이라도 좀 줘.”

흔히 할 수 있는 생각이었기에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다만, 애초에 도결을 두고 정보원으로 생각한 적 없던 재경은 서둘러 부정했다.

“아니요. 정보원은 아니에요.”

“에이, 회사에 관련된 사람이면 정보원이지.”

이미 재경이 누구와 식사를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단 눈빛과 말투였다. 

재경이 눈썹을 일렁이다가 입을 떼려는데.

“저, 차재경 기자님이 누구시죠?”

갑자기 기자실에 나타난 진성그룹 직원 덕분에 할 필요 없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전데요.”

*   *   *

그녀를 찾아온 사람은 본사 직원이라고 했다. 

“제 이름은 김영란입니다.”

낡은 구두를 신고 있는 영란은 30대 중반으로 보였다. 

재경은 그녀가 건네준 커피를 받으며 미소를 지었다.

“반갑습니다. 차재경이에요. 오늘 저를 찾아온 건 따로 이유가 있으신 건가요?”

“아, 백 비서님과 연구실을 지나갈 때 봤어요. 생각나는 기자는 차재경 씨뿐이라서. 갑자기 와서 불쾌하셨죠?”

타이밍 좋게 나타나서 그런가? 딱히 불쾌한 첫인상을 준 건 아니었다. 

“아니에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백 비서님이 기자들은 연구실 쪽으론 가면 안 된다고 하던데요? 그런 이유라면 충분히 아는 기자가 있기 힘들 것 같아요.”

재경은 정보원이 필요하긴 했지만, 백 비서의 경고를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연구실에 있는 사람이라면, 일부러 접근해서 정보원으로 삼고 싶지 않았다.

“다름이 아니라, 뭐 좀 물어보고 싶어서요.”

영란의 말에 재경이 고개를 기울였다. 연구실에 있는 직원이면, 그녀에게 물을 질문이 딱히 없어 보였던 탓이었다.

“예. 제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어디든 인간관계가 중요하겠지만, 기자는 특히 사회성이 좋아야 했다. 

기사라는 것은 곧 정보를 파는 것이었고, 정보는 많은 사람과 알고 지낼수록 빠르게 모였다. 

그러니까, 아무리 정보원으로 쓸 수 없다고 해서 그녀를 벌써 내칠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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