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재경이 하루 분량으로 끝내야 할 보도 기사는 여덟 개 정도였다. 모든 건 생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죽어도 기사 노출을 안 시켜 줄 것 같았던 김 부장은 의외로 재경의 보도 기사를 쉽게 노출시켜 주었다.
‘전부 회사 이득 때문이었겠지만….’
출입증을 빼앗겨서 하늘이 무너질 것 같던 재경은 이제 좀 숨을 쉬는 것 같았다. 그래도 아주 만족스러운 건 아니었다.
보도 기사를 하나씩 쓰다 보니 욕심이 하나, 둘 늘어 가는 탓이었다. 마치 처음 기자 생활을 시작한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열정으로 활활 타오르는 기분이었다.
“발제 기사는 썼어요?”
타 신문사 기자의 질문에 재경이 고개를 돌렸다.
이제 겨우 출입증을 받은 탓에 발제 기사를 써도 되나 싶었다. 본래의 재경이라면 쓰고도 남을 기사였는데, 최근 출입증을 빼앗겼다가 돌려받은 이후로는 평소 하던 일도 망설여졌다.
“쓰기는 다 썼는데, 아직 답장이 없네요.”
재경이 아쉬움을 삼켜 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야기했다.
“차 기자 정도 연차면, 발제 기사는 당연하지 않아요?”
“당연한 기사가 어디 있겠어요. 다들 어렵게 쓰는 기사일 텐데요.”
온화한 말투로 대꾸했지만,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태도였다.
“혹시 차 기자 기분 나빴어요?”
“아뇨. 맞는 말씀 하셨는데요. 뭘.”
실은 발제 기사 정도는 당연히 쓸 줄 알아야 하는 게 맞았다. 막 들어온 신입 기자가 아닌 이상 발제 기사를 쓰는 것은 딱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기사 하나를 쓰는 것이 간단하게 타이핑만 해서 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준비한 자료를 기반으로 착실하게 인터뷰하다 보면 쓸 이야기가 무궁무진했다.
“그럼 다행이네요. 오늘도 열심히 해 보자고요.”
“네.”
희미하게 웃는 재경은 딱히 더 나서지 않았다. 그런 재경을 힐끗 보던 다른 기자가 몸을 비스듬히 돌리며 그녀를 보았다.
“그나저나 차 후배는 어떻게, 정보원 찾아봤어요?”
정보원이라고 하면, 정보를 주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아무래도 기자란 직업이 감으로만 움직여서 될 것이 아닌 분야라 정보원이 필요했다. 다들 인맥을 총동원하여 정보원을 만들며 일하는 분위기였고, 재경도 다르지 않았다.
이번 출입증 사건으로 출입처가 바뀌어 정보원도 새로 꾸려야 한다는 게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아뇨, 아직.”
경직된 재경의 표정을 보면서 기자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엄청, 힘들 거예요. 진성그룹처럼 애사심 넘치는 직원들만 있는 건 또 처음 봤다니까.”
초고속 승진한 주혁의 옆에서 그를 돕던 재경이었다. 정보원이야 구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또 다른 열정이 솟구쳤다.
* * *
며칠 뒤 재경은 기자들의 말이 헛소리가 아니라는 걸 금방 깨달았다.
‘진짜 정보원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네.’
사이좋게 지내려고 은근히 인사를 건네 봐도 다들 슬쩍 자리를 피해 갈 뿐이었다.
아무리 기자들끼리 주고받는 정보란 게 있다고 해도 경쟁자가 아닌 건 아니었다.
“하여튼 이런 대기업에서 직원들이랑 우리 같은 사람들이랑 말 섞을 일이 뭐가 있다고. 내가 이 회사에 대해서 아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만 가 볼게요.”
청소하는 직원분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정보원을 소개받으려고 했는데, 전혀 아는 것이 없다며 재경을 따돌리고 떠나 버렸다.
“어? 백 비서님!”
막 연구팀에서 나온 백 비서를 발견한 재경의 눈이 커졌다.
백 비서는 제가 있던 곳이 연구실이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한 뒤 표정이 굳었다.
“이렇게 보다니, 반갑네요. 여긴 어쩐 일이세요?”
“제 업무 구역이라서요. 여긴 기자들 출입 금지 구역인데. 차 기자님은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은근히 재경이 달고 있는 특별한 출입증을 집요하게 내려다보았다.
“아이고, 실례했네요. 전 그냥 길을 잃었어요.”
재경은 서둘러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다. 진심으로 연구실에 몰래 잠입하려던 건 아니었다.
청소하는 직원분과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틈에 이곳까지 흘러왔을 뿐이었다.
“그렇군요. 이제 곧 점심시간이네요.”
백 비서의 질문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오늘도 점심 약속 있으세요?”
재경의 질문에 백 비서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한테 하신 말씀이십니까?”
“네. 매번 점심에 따로 나가시는 것 같아서요.”
사실 요즘 재경의 고민은 점심시간이었다. 도결과 하루, 이틀 정도만 함께 식사할 줄 알았는데 벌써 일주일이나 그와 함께 식사하고 있었다.
“상사의 지시가 있으면 지시를 따라야 하는 게 비서의 업무라서요.”
“지시요?”
호기심이 담긴 재경의 눈빛을 보면서 백 비서가 껄끄럽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 보니까. 요즘 저희 회사 직원들을 많이 괴롭히신다고요.”
“네?”
“경비 팀부터 시작해서 경호 팀, 청소 팀까지 접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다들 차 기자님을 피하느라 애를 먹었다던데. 설마 모르셨습니까?”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백 비서를 보면서 재경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동안 백 비서를 너무 과소평가했던 모양이었다.
“전혀 몰랐어요. 오늘은 좀 피하시는 것 같긴 했는데.”
“왜 그러셨냐고 물으면 실례일까요?”
정보원은 자신이 정보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이건 기자들끼리 그들을 지칭하는 말로 실제로 그들이 듣기에는 좀 껄끄러운 호칭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재경은 백 비서에게 제가 왜 회사 직원들과 엮이려고 하는 건지 전부 알려 줄 수 없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던 건 아니었어요.”
“뒤가 구린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뭔 줄 아세요?”
갑작스러운 백 비서의 질문에 재경이 당황했다. 웃는 낯으로 재경을 바라본 백 비서는 선한 인상이었는데, 그 눈빛은 예사롭지 않은 무언가로 반짝이는 듯했다.
“글쎄요?”
“거짓말이요. 물론 차 기자님이 제게 거짓말을 하실 이유는 없으실 테지만요.”
이건 명백한 경고였다. 백 비서는 지금 재경에게 선을 넘지 말라 경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재경은 이곳에 그냥 놀고먹으러 온 백수가 아니었다. 기자로서 그녀가 해야 할 일들이 마땅히 있는 법이었다.
“지금 저 의심하세요? 그래서 제가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보고받으신 건가요?”
“아까 말씀드린 것 같은데, 잊고 계신 것 같아서 다시 말씀드릴게요. 전 지시만 따르는 사람입니다. 보고를 받은 건 제 의지가 아니지요.”
안경을 고쳐 쓴 백 비서는 여전히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거짓말쟁이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지시만 따른다며 선을 긋는 백 비서를 보고 있자니, 입안이 썼다. 도결도 그녀를 이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서 서운해졌다.
살다 보면 어떤 말과 표정은 권투 선수의 주먹처럼 묵직한 아픔을 느끼게 하곤 했다.
“하.”
도결과 좀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로써 그녀가 혼자 오해했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재경은 분노로 속이 들끓었지만, 태연하게 고개를 들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 재경의 곁을 조용히 따라오던 백 비서가 머뭇거렸다.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까칠한 그녀의 목소리에 백 비서가 고개를 저었다.
“딱히 더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대답을 들은 재경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백 비서가 물끄러미 재경을 바라봤다.
깐깐하게 선을 긋던 백 비서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 일은 드문 일이라, 재경이 고개를 들어 백 비서와 눈을 마주쳤다.
“그런데 왜 절 그렇게 보세요?”
“제게 욕이라도 퍼부으실 줄 알았는데. 조용하셔서요.”
재경은 쿨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보았다.
“이런 경우는 지시받은 사람이 아니라 지시 내린 사람이 잘못이잖아요. 따질 일이 있으면, 장본인에게 따져야 옳죠.”
재경은 그렇게 점심을 먹을 겸 부회장실로 향했다.
* * *
적막이 흐르는 부회장실은 정말이지 깔끔하고 시크했다. 세련된 인테리어에는 그의 개인적인 소품은 보이지 않았다.
마주 보고 앉은 도결과 재경은 제법 익숙한 표정이었다. 처음에는 어색해서 뚜껑을 여는 것도 불편했는데, 이젠 자연스럽게 젓가락을 들었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표정이 어두운 것 같은데.”
갑작스러운 도결의 질문에 초밥을 젓가락으로 들던 재경이 고개를 들었다.
“신경 쓰여요? 제가 알면 안 되는 비밀이라도 알게 되었을까 봐?”
도결이 자신을 경계하는 건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에게 정보원이 되어 달란 부탁을 하지 못했던 거다.
알면서도 서운한 감정이 몰아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게 재경의 본심이었다.
“비밀? 저한테 혹시 비밀이 있습니까?”
그가 순진한 표정으로 되묻자, 날카롭게 이를 세운 재경만 민망해졌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도결의 눈빛이 재경의 속을 더 뒤집어 놓았다.
“그럼 없어요?”
“딱히 비밀을 만든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설명해 줄래요? 왜 그렇게 화가 난 건지.”
설명만 해 주면 재경을 온전히 이해해 보겠단 말투였다. 오히려 그런 점이 그녀를 더 짜증 나게 만드는 줄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백 비서님한테 제 일정 보고받는다고 들었어요. 비밀이 아니라면, 그간 대놓고 일정을 보고받은 건데. 내가 눈치 없이 몰랐던 거겠네요.”
얼음처럼 차갑게 굳은 재경의 표정을 살핀 도결이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도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재경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떤 의도였는지는 모르겠는데.”
“재경 씨가 생각한 것만큼 나쁜 의도는 아니었어요.”
짧은 찰나였음에도 도결이 간결하게 재경의 마음을 이해한 것처럼 대답했다.
“무슨 생각을 했을 줄 알고요?”
“전 그냥 혹시 회사 생활에 불편한 건 없나 걱정이 돼서 보고받았습니다.”
“그걸 왜 고도결 씨가 신경 써요?”
짜증이 묻어난 재경의 질문에 그가 입술을 닫았다. 재경의 영역을 침범한 건 벌써 두 번째였다.
“기분 나빴습니까?”
“내가 진짜 산업 스파이 같아서 그래요?”
차분한 표정이었지만, 분명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재경을 보면서 그가 짤막하게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의심으로 한 행동은 아니었어요. 진심입니다.”
“그럼요?”
재경의 질문에 그가 천천히 물컵을 잡았다. 물을 마시는 그를 보면서 그녀의 눈에 들어갔던 힘이 서서히 풀렸다.
물을 삼킬 때마다 울렁대는 목울대는 재경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차재경 씨가 자꾸 신경 쓰여요. 눈에 안 보이면 걱정이 되고, 갑자기 미친 듯이 보고 싶고 그래요. 그래서 보고받았어요.”
그는 마치 좋아한다는 고백을 처음 해 보는 남학생처럼 순수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