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60)

<31화>

“차 기자, 우리 먼저 일어날게. 지금 급하게 일이 생겨서.”

같이 온 기자들이 다른 출입처 문제로 급히 자리를 떠나자, 재경은 덩그러니 혼자 남게 되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도결은 독보적으로 빛이 났다.

“항상 여기서 식사해요?”

재경의 질문에 그가 긍정을 뜻하는 미소를 보였다. 표정만 보고 대답을 확인한 재경은 어색하게 고개만 까딱였다. 

그때 재경의 질문에 명쾌한 대답을 꺼낸 사람은 백 비서였다.

“저희 부회장님께서는 지금까지 줄곧 외부에서 식사하셨습니다. 시간이 없으실 땐 사무실에서 드셨답니다.”

백 비서의 말을 듣고 귀가 붉어진 도결이 휙 재경의 눈을 피했다. 의아해진 재경은 그를 보던 시선을 거두고 서 있는 백 비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다행이네요. 매일 식당에서 마주쳐야 하는 줄 알고 놀랐어요.”

앞으로 계속 구내식당을 이용할 생각이었던 재경은 진심으로 안도하며,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자 백 비서는 재경의 속을 빤히 본 것처럼 툭 뒷말을 덧붙였다.

“오. 그렇다면 앞으로도 계속 걱정하셔야겠습니다. 부회장님께선 오늘부터 이곳에서 식사하시겠다고 하셨거든요.”

“예?”

“고도결 부회장님께선 앞으로 복잡한 회사 식당에서 식판을 들고, 긴 줄을 서서 자리를 잡고 점심 식사를 하실 예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필이면 왜 갑자기 오늘부터람. 재경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도결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뻘쭘해진 재경이 그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매번 이렇게 얼굴을 보고 식사하는 건 좀 불편할 것 같았다.

“갑자기 왜요? 직원들이 불편하지 않을까요?”

그가 평범한 상사라고 해도 불편할 텐데, 재벌 후계자가 갑자기 안 하던 행동을 하면 금방 서민 코스프레한다는 소문만 떠돌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재경의 마음을 귀신처럼 알아차린 백 비서가 놀란 시늉을 하며 입을 가렸다.

“아, 차 기자님께선 많이 불편하신가 봅니다?”

일부러 도결이 보라고 한 행동처럼 보였다. 정작 보라는 고 부회장은 백 비서를 전혀 안 보고 있었다. 얼떨결에 백 비서와 눈이 마주친 재경만 화들짝 놀랐다. 

“아뇨! 제가 왜 불편하겠어요. 다른 분들이 그럴지도 모른다는 거죠. 어쨌든 회사 내에서 긴장하면서 식사를 해야 하니까요.”

두 사람이 오버하며 대화를 이어 가는 중에도 도결은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태연하게 젓가락을 쥐고 반찬을 집어 먹으며 식사를 했다. 

재경은 새삼스럽게 젓가락질을 하는 그의 모습이 우아하게 보였다. 식사 예절이 완벽하단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젓가락을 잡은 모습까지 교과서적인 남자였다.

“참 일리 있는 말씀이십니다. 안 그렇습니까, 고 부회장님?”

말이 없는 도결에게 슬쩍 대답을 요구하는 백 비서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결은 식사를 이어 갔다. 

재경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이내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더 구경해 봐야 끝나지 않을 기 싸움으로 보였다.

“차재경 씨는 어때요? 내가 여기 있는 거.”

갑자기 그가 쥐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이제 막 관심을 끊어 낸 재경에게 질문했다. 날아든 화살을 받은 재경은 느릿하게 대답했다.

“직장인이 직장에서 식사하는 게 당연하죠. 그렇지만….”

“그럼, 됐습니다.”

아직 말이 다 안 끝났는데 그가 휙 말을 잘라 버렸다. 마치 재경이 그를 옹호라도 한 것처럼 흘러가는 분위기였다. 

백 비서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재경을 바라보았다. 

‘어떻게든 말려 보세요.’

백 비서의 눈은 정확히 그녀에게 이런 요구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며 저도 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표정을 찡그렸다. 

정작 도결은 두 사람을 난감하게 만들어 놓고 태연했다.

“저 부회장님, 아무래도 차 기자님이 불편해하시는 것 같은데요.”

끝내 백 비서는 재경을 물고 늘어졌다. 황당한 재경은 백 비서의 반질반질한 낯짝을 보면서 입가를 어색하게 올렸다.

“제가요?”

이 회사가 재경의 것도 아닌데. 도결이 들어서 딱히 받아들일 만한 변명이 아니었다. 괜히 더 마음이 불편해지는 재경이었다. 

백 비서 때문에 난감해지는 것도 싫고, 여기서 식사를 하겠다는 도결을 더 반대하기도 껄끄러워진 그녀가 호탕하게 웃었다.

“전 괜찮아요. 인간미 있고 좋지요. 사람 사는 것 다 비슷비슷한데, 이상할 게 뭐가 있다고요.”

그러자 일부러 재경을 자극하려는 건지, 백 비서가 느릿하게 대꾸했다.

“차 기자님께서 불편하다고 하시니, 무척 아쉽네요. 고급 도시락을 준비하려고 했거든요. 두 분께서 편히 드실 수 있도록 조치하려던 참이었는데 말이죠.”

“그런 중요한 말은 미리 꺼내 주셔야 하지 않나요?”

그녀가 황당한 눈으로 백 비서를 보았다. 얄밉게 눈웃음치며 재경을 바라본 백 비서가 고개를 까딱이더니 휙 자리를 떴다. 

멀어지는 백 비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재경은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고급 도시락은 반찬이 이것과 좀 달라요?”

뭐 딱히 도시락이 욕심나서 묻는 건 아니었다. 진짜 그런가, 아닌가 하는 호기심에 물은 말이었다. 

그런 재경의 마음을 모르는 도결이 웃음을 참는 모습이 보였다.

“지금 웃었어요?”

“아니요. 갑자기 재채기가 나올 것 같아서요.”

변명도 참 그럴듯하지 못했다. 재경은 그런 도결을 골려 주려다가 말았다. 괜히 백 비서에게 뺨을 맞고 그에게 화풀이하는 것 같아서.

“근데 왜 백 비서님은 식사를 안 하고 가세요? 고급 도시락 드시러 가신 거예요?”

“아니요. 선약이 있다고 하더군요.”

“어머, 그럼 지금부터 고도결 씨 혼자 식사하려고요?”

그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사람들을 살폈다. 다들 먼저 다가와서 말을 꺼내지 않았을 뿐, 도결을 힐끗힐끗 바라보는 눈치였다. 

재경은 혼자 남은 그가 난감할까 봐, 슬쩍 식판을 들고 일어나 자리를 옮겨 앉았다.

“같이 먹어도 괜찮죠?”

재경이 그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치 재경이 자리를 옮기길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럼요.”

냉큼 대답하는 도결을 보면서 재경이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일반인들만 있어도 소문이 확산되는 판국인데. 회사에 기자들이 득실거리는 이 상황에서 그가 혼자 먹는 건 좀 아닌 듯했다. 

물론 둘이 먹는 것도 좀 이상한 그림이 되지 않을까 싶어 우려하는 그녀였다. 

“백 비서님 말이에요. 내일은 선약 없으시죠?”

재경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묻자, 그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왜요? 갑자기 백 비서한테 관심이라도 생긴 겁니까?”

갑자기 차가워진 도결의 물음에 재경이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딱히 그렇다기보단.”

“혹시 호감이 있다고 해도 절대 티 내지 말아요. 추잡한 소문으로 얽히는 건 딱 질색입니다.”

딱히 그가 해선 안 될 말을 뱉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말이 재경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뭔가 오해를 하는 것 같은데. 제가 관심 있는 쪽은 백 비서님이 아니라, 고도결 씨거든요.”

오해를 일부러 키우고 싶지 않은 재경은 서둘러 제 진심을 꺼냈다. 

그녀의 대답이 효과가 있었던 건지, 싸늘하던 그의 눈초리가 서서히 평정심을 찾았다.

“나한테 관심 있어요?”

“네. 내일도 백 비서님이 선약이 있다고 하시면, 사무실에서 따로 식사하시라고요. 여긴 보는 눈이 워낙 많아서 고도결 씨한테 좋을 게 없어 보여요.”

신문사에 있으면 다들 특종에 예민해졌다. 연예부에 있는 모 기자는 연예인들이 우연히 옷깃만 스쳐도 열애설 의혹을 기사로 쓴다고 했었다. 그만큼 이슈가 될 법한 것에 눈독을 들인단 뜻이었다. 

도결이 이곳에서 식사를 하다가 사소한 문제라도 생기면, 이는 전부 특종이 될지도 몰랐다. 

백 비서도 이 부분이 염려되어 도결을 따라나섰을 터였다.

“상관없습니다. 걱정해 준 건 고마워요.”

도결이 재미있단 눈빛으로 재경을 바라보았다. 여유로운 그 눈빛이 이상하게 재경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카리스마와 능청스러움이 공존하던 주혁의 눈빛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커다란 파도가 제힘을 숨긴 듯한 고요함. 그는 딱 그런 분위기를 자아냈다.

“딱히 걱정한 건 아니에요. 그걸 꼭 따져야 한다면, 제 걱정을 한 거죠. 부부는 일심동체니까.”

기자들이 조금만 노력하면, 재경과 도결의 사이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같은 회사로 출근하는 부부가 따로 식사하는 모습을 보이면 괜한 소문이 돌 것 같았다. 또 같이 식사를 하는 장면을 연출하는 것도 좀 이상했다. 너무 주작 같은 느낌이랄까?

“거기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재경 씨를 난감하게 만들려던 건 아닌데. 미안합니다.”

갑자기 그가 순한 강아지처럼 꼬리를 내리자, 재경은 민망해졌다. 

휙 시선을 피하는 재경의 뒤통수로 그가 제 말을 마저 했다.

“그래도 혼자 먹는 건 딱 질색이라서요. 같이 먹어 줄 사람이 있다면 또 모를까.”

“앞으로 백 비서님 점심 약속 있을 땐, 제가 사무실에서 같이 먹어 줄까요?”

그러자 당황한 듯 놀란 눈을 한 그가 서둘러 제 얼굴을 커다란 손으로 가려 버렸다. 그러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내일부터 같이 먹을 수 있는 겁니까?”

이제 막 출입처를 옮긴 재경은 제 코가 석 자였다. 사람들을 사귀기에도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래도 명목상 부부인데, 도결을 혼자 둘 순 없었다.

“대신, 시간은 못 맞춰 줘요. 점심시간은 정확하게 12시부터예요.”

*   *   *

우려한 일은 꼭 일어난다. 잠깐 함께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이 재경에게 들러붙었다.

“오늘 어떻게 된 거예요? 고도결 부회장님이랑 같이 식사한 거 맞죠?”

재경이 기자들이 득실대는 기자실로 돌아왔을 땐, 다들 눈에 불을 켜고 그녀에게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내일도 그와 식사하는 걸 알면, 다들 같이 가자고 조를 기세였다.

“그냥, 전에 인터뷰한 적이 있어서요.”

“인터뷰를요?”

의아하게 받아들이는 기자들을 보면서 재경이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불발되어서 노출은 못 했었어요.”

그럼 그렇지 하는 눈빛으로 바뀐 기자들을 보면서 재경이 활짝 미소를 보였다.

“아, 하기야 재벌들 인터뷰 따는 게 좀 어렵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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