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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30/60)

<30화>

옥상에 도착한 재경은 도결과 함께 비상계단을 이용해서 한 층 더 내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단 한 대뿐이었는데 백 비서가 카드를 대고 나서야 숫자 버튼을 누를 수가 있었다. 

평범하지 않은 출근길이라 모든 것이 신기한 재경이었다.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는 재경을 보면서 도결이 고개를 기울였다.

“필요하면 줄까요?”

결혼식을 올린 뒤 며칠간 도결이 재벌이란 느낌이 딱히 들지 않았던 재경이었다. 

그와 쇼핑을 하는 일도 없었고, 차가 좋거나 집이 좋은 건 이젠 좀 익숙해져서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건 좀 달라 보였다.

“아뇨. 출입증이 언제까지 유효할지도 모르고….”

거절하는 재경의 표정은 진심인 듯했다. 정말로 임원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진성그룹은 보통의 작은 건물이 아니었다. 엘리베이터가 8개였고. 그중 임원이 사용하는 엘리베이터는 극소수로 보였다. 

“있으면 편할 겁니다.”

“그러다가 회장님이랑 마주치게 되면요?”

재경이 장난스럽게 묻자, 그가 고갤 기울였다.

“불편합니까?”

“편하진 않죠. 좀 눈에 힘을 주시는 타입이시잖아요.”

밝게 농담하는 재경을 보면서 백 비서가 픽 웃음을 참았다. 고 회장님이 평소 눈에 힘을 주고 다니는 걸 모르는 직원은 아무도 없었다. 

도결은 그런 백 비서를 힐끗 보다가 재경을 보았다.

“이왕 준비했으니까. 받아 줘요.”

“네?”

당황한 재경이 도결을 바라보면서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이미 충분히 부담감을 갖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서일보에서 부장인 주혁과 나란히 다닐 때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았는데, 그보다 훨씬 높은 직책으로 있는 도결과 나란히 출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걱정스러웠다. 

일반 타 회사 직원이 받아도 문제겠지만, 언론사 직원에게 임원 엘리베이터를 허용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전 진짜 괜찮아요.”

재경이 서둘러 손을 흔들자, 그가 고개를 돌렸다. 

“백 비서.”

그가 백 비서를 향해 손을 내밀자, 백 비서가 가방에서 재경의 출입증을 새로 꺼내 주었다. 도결은 재경에게 카드를 내밀며 하얀 치아를 보였다.

“이게 뭐예요?”

한서일보에서 받은 출입증과 똑같이 생기긴 했는데. 차이가 있다면 출입증에 있는 줄 색깔이 좀 달랐다. 

재경이 부장에게 받았던 출입증은 녹색이었는데. 백 비서가 건네준 출입증은 붉은색이었다.

“이 출입증을 대면, 모든 출입문을 다 이용하실 수 있으십니다.”

“모든 출입문이라니요?”

놀란 재경이 카드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렇게까지 해 줄 것이라고 생각 못 했던 탓이었다.

“사모님께선 한서일보 기자이기도 하시지만, 부회장님의 부인이시잖습니까.”

“그래서 기자인 제게 모든 출입을 허락하겠단 건가요?”

황당하단 재경의 표정을 보고 백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직된 백 비서의 표정을 보면, 그도 딱히 옳다고 생각해서 건네는 건 아닌 듯했다.

재경은 슬쩍 저를 보고 부드럽게 웃고 있는 도결을 보았다.

“뇌물로 받기엔 좀 부담스러운데요.”

“원래 받아야 하는 걸 받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아요.”

그가 태연하게 구니까, 혼자 예민하게 굴기도 애매해진 재경이었다. 

딱히 쓸 일이 없을 거라고 판단했지만, 일단 주는 걸 계속 거부할 수는 없으니까, 재경은 출입증을 받긴 받았다. 

“백 비서님 저 부탁이 좀 있는데요.”

갑자기 재경이 백 비서를 부르자, 도결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저한테요?”

도결의 눈치를 보면서 백 비서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사를 모시는 입장에서 퍽 난감한 상황이었다.

“어디로 찾아가야 할지 모르겠어서요.”

보통은 로비에서 경비원에게 물어도 되었지만, 도결과 옥상으로 들어온 재경은 회사를 안내해 줄 사람이 없었다. 

백 비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도결이 슬쩍 재경의 앞을 가로막았다.

“회사라면 나도 잘 압니다.”

재경이 그래서 어쩌라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서운한 표정으로 재경에게 말을 걸었다.

“뇌물도 받았는데. 내가 안내해 줄게요.”

“아니요. 첫날부터 너무 관심받고 싶지 않아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부회장실 비서 팀이 나와서 전부 인사를 했다. 

얼떨결에 함께 인사를 받은 재경이 뻘쭘하게 엘리베이터에서 서서 내리지 않자, 백 비서가 다가왔다.

“옆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사회생활 경험상 백 비서의 말을 따르는 것이 훨씬 더 좋다고 생각한 재경이었다.

*   *   *

대기업에선 보도 기사를 써 주는 기자들을 위해 사무실을 내주고는 했다. 

진성그룹도 기자들이 이용하는 사무실을 따로 만들어 두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시설이 좋아서 놀란 재경이었다.

“오, 한서일보에서 왔죠?”

타 신문사 기자가 재경에게 알은척을 하면서 물었다.

“네. 오늘부터 진성그룹에서 자주 뵐 것 같네요.”

“시설 좋고, 보도 자료도 깔끔해서 일할 맛 날 거예요.”

호평하는 기자들을 보면서 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그녀가 진성그룹 고도결 부회장과 결혼한 기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신입일 땐 재경도 무조건 대기업 기자실을 선호했었다. 뭐 시설을 비교하자면야 대기업이 중소기업보다 훨씬 더 고급스럽고 구비 된 것들이 많았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엄청 차이가 나는 건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한서일보 경제부 차재경입니다.”

재경이 정식으로 인사를 하자, 기자실에 있던 기자들이 눈으로 슬쩍 인사를 했다.

“한서일보 담당 기자님이 바뀌었단 소리는 어제 들었는데. 일찍 오셨네요?”

“네. 아무래도 현장에서 바로 움직이려면 빠르게 파악을 하는 게 중요하니까요.”

“환영합니다. 후후후.”

재경은 구석진 자리에서 가져온 노트북을 꺼냈다. 기자에게 노트북은 생명과도 같아서 점심을 먹을 때도 정리해서 챙겨 들고 다닐 정도였다. 

백 비서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 나가자, 기자들이 술렁거렸다.

“고 부회장 부인이 한서일보에 있다고 하더니. 엄청 대우해 주네요.”

“어제 여기 휴게 시설 싹 바뀌었거든요.”

기자들의 말에 재경이 머쓱해졌다.

“설마요. 그냥 바꿀 때가 되었었나 보죠.”

“아니요. 전부 최신식으로 바뀌었어요. 저기 저 커피 머신 보이죠? 진성그룹에서도 임원급들이 쓰는 머신이라던데요.”

재경이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결은 지난밤에 출입증 사실을 알았으니 기자들이 오해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잘 부탁드립니다!”

*   *   *

도결은 사무실에서 재경을 기다리느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인사만 하고 올라올 줄 알았는데 나타나질 않으니, 계속 신경이 쓰였다. 

백 비서에게 몇 번이고 물었으나, 잘 모르겠단 답변만 반복할 뿐이었다.

2시 20분. 도결은 더 이상 서류를 보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시계를 보는 도결은 지나치게 긴장한 표정이었다. 

똑, 똑, 똑.

문을 열고 백 비서가 들어오자, 도결이 미간을 찌푸렸다.

“백 비서. 차재경 씨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봐요.”

도결은 재경과 함께 점심을 먹을 줄 알고 기다렸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재경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백 비서는 서둘러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갔다. 그렇게 몇 분 뒤에 돌아온 백 비서는 재경이 구내식당에 있다고 대답했다.

“혼자 간 겁니까?”

황당하단 그의 질문에 백 비서가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기자들과 함께 있다고 보고받았습니다.”

재경이 구내식당에 있단 사실을 듣게 된 도결은 당혹스러웠다. 

“부회장님 점심 식사는 어디에서 할까요?”

“오늘은 구내식당으로 가죠.”

“예?”

백 비서가 당황하는 건 당연했다. 백 비서가 지금까지 도결을 모시면서 한 번도 구내식당으로 모시고 간 적은 없었다. 아무래도 타인과 함께 식사하는 게 불편한 탓이었다. 

그런 도결이 오직 재경과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 구내식당을 찾다니.

‘진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가늠이 되질 않네.’

*   *   *

재경이 기사를 쓰기 위해선 많은 조건이 필요했다. 

첫 번째로는 출입증이 같은 기자들과 친분을 쌓는 게 좋았다. 출입증이 여러 개로 늘면, 자연스럽게 자주 가는 출입처를 제외한 다른 출입 회사들에는 출근하기 힘들었다. 

이때 다른 기자들의 도움을 받으면 기사를 쓰기 수월했다.

“하하하. 그래서 FUK 보도 기사를 쓴 거란 말이야? 대단하네.”

다들 재경이 얼마 전 FUK 보도 기사를 썼단 사실에 놀라워하는 분위기였다. 

주혁의 말처럼 여자에게는 많이 가혹하기로 유명한 자리였던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재경이 쓴 보도 기사를 칭찬하며 다들 대단하다 칭찬까지 해 주었다. 

“별것 아닌데요. 뭘.”

겸손하게 대답하는 재경을 보면서 한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제가 아는 정보를 툭 꺼냈다.

“이번에 거기 본부장이 잘렸다던데. 진짠지는 모르겠어요.”

“그러게. 회사 내부에서 중요한 일이 있었다지?”

“그러고 보니까, 차 기자는 봤어? 한서일보 고 부회장이랑 결혼한 기자 말이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재경이 머뭇거렸다. 갑자기 자신이 도결의 부인이라고 말하는 게 머쓱했다. 

그때 멀리서 식당으로 들어오는 부회장실 비서 팀과 고도결 부회장이 보였다. 

기자들은 상주하고 있었으면서도 이런 광경은 처음이라며 놀라워했다. 재경은 그의 행동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도결은 식당을 둘러보는 듯하더니, 재경을 발견하고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설마 제게 오겠어 했지만, 그가 재경의 앞에 다가와 싱긋 웃는 순간 깨달았다.

“여긴 어쩐 일로….”

재경이 말끝을 흐리자, 도결이 옆 테이블에 대각선으로 앉으면서 싱긋 웃었다.

“나도 점심시간이라서요. 맛있게 먹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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