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60)

<29화>

비틀거리던 주혁이 은화의 팔을 꽉 움켜잡았다.

“저 때문에 피해받았다고 생각하세요?”

주혁이 우습다는 듯이 묻자, 은화가 손을 뻗어 주혁의 턱을 꽉 쥐었다. 

“그럼, 내가 피해를 안 받았다고 생각해요? 김 부장님의 그 이기적인 행동 때문에.”

“…때문에?”

“내가 당신 만난 거 아버지가 아셨어.”

주혁이 그토록 바라던 일이었다. 청혼했지만, 대답이 없던 은화 때문에 가슴이 저렸다. 집안에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해도 거절하는 은화 때문에 혼자 애가 탔다. 

그런데 집안에서 알았다고 하니, 조금은 상황이 달라진 게 아닐까 싶었다.

“다 끝난 사이인데. 그렇게 화가 나요?”

“끝나긴 뭐가 끝나. 당신은 몰라. 이 바닥이 얼마나 더럽고 치사한지.”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주혁의 물음에 은화가 미간을 구겼다. 제게 뭘 바라는 게 있어서 온 줄 아는 멍청한 남자를 두고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은화가 주혁에게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제 눈앞에서 조용히 꺼져 주길 바랐다. 주혁이 점잖게 끝내 줄 것 같지 않아서 더 거슬렸다.

“내 일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 김 부장도 앞으로 잘 견뎌 봐요.”

견딘다는 말이 평범한 회사원에게 얼마나 고약한 협박인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술에 얼큰하게 취해서 오길 다행이지. 주혁이 이성만 남아 있었다면, 헤어진 전 여자친구 앞에서 무릎이라도 끓고 빌었을지도 몰랐다.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와요.”

“김 부장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나 찾아오지 말아요. 조금도 도와줄 마음 없으니까.”

또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사라지는 은화를 보면서 주혁이 이를 악물었다. 자꾸만 다리에 힘이 풀리는데 억지로 버티고 섰다. 

은화가 타고 온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는 겨우 그 자리에서 버텼다.

*   *   *

“고 회장이 널 집으로 초대하겠다고 하더구나.”

은화는 우려했던 일이 생기자,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부친이 제 연애를 거들떠보지 않았던 건, 주혁이 쥐 죽은 듯이 숨만 쉬고 있어서였다. 갑자기 발톱을 드러낸 주혁 때문에 은화의 입장만 난감하게 되었다.

“제가 뭐라고 거길 가요?”

아무렇지 않은 척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지만, 은화의 표정은 이미 덫에 걸린 생쥐를 닮아 있었다.

“진성그룹의 차기 안주인이 될 사람이지.”

은화의 부친은 그렇게 믿고 싶은 모양이었다. 정말이지 지긋지긋한 인생이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공부만 하라고 하더니, 회사에 입사시켰다. 오직 회사에 뼈를 묻겠단 마음으로 열심히 살았는데.

‘체스 기물처럼 살란 거지.’

은화는 자신의 집까지 찾아온 부친을 쏘아보며 웃었다.

“싫다면요?”

“네 입장에 싫다 좋다 할 결정권이 있다고 생각하니?”

“당연하잖아요. 저쪽은 유부남이고, 저는 미혼인데. 누가 봐도 제가 손해 아닌가요?”

고집스러운 은화의 얼굴을 보던 한 사장이 이를 갈았다. 

“지금 보니 내가 어리석었다. 처음부터 연애 따위는 못 하도록 반대했어야 했는데.”

“아버진 가끔가다 지나치게 자신을 대단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뭐?”

은화는 불편한 기색으로 주머니에서 더듬더듬 담배를 찾았다. 예쁜 케이스에 옮겨 담은 담배를 꺼낸 은화가 라이터로 불을 붙이며 제 부친을 보았다.

“저 어린아이 아니에요. 보호받을 나이가 아니죠.”

“그래서? 네 일에 신경 꺼라 이거냐?”

“연애를 하든, 이별을 하든. 제 스스로 판단해서 내리는 결정이에요. 아버지가 이래라저래라 하실 일이 아니죠.”

은화는 제 모친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인형처럼 선택의 자유를 빼앗긴 채 불행하게 망가지는 꼴은 딱 질색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부모로서 마땅히 책임져야 할 행동을 하신 게 억울하세요?”

담배를 입에 문 은화가 뿌연 연기를 제 부친의 얼굴을 향해 내뱉으며 물었다. 무엇이 그녀를 이토록 차갑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은화는 스스로 생각해도 복에 겨운 인생을 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렇다고 해서 제 인생이 행복한 건 아니었다.

“다 널 위해 하는 말이 아니냐?”

“제가 유부남 꼬셔서 결혼하고 싶다고 했던가요?”

씁쓸하게 인상을 쓴 은화가 비웃음을 삼키며 물었다.

“화초처럼 자란 네가 뭘 알겠니. 당장은 돈과 권력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훗날에 내 나이가 되면 깨닫게 될 거다.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걸 말이야.”

확신에 찬 제 부친의 목소리가 듣기 싫었다. 소름 끼치게 자기중심적 사고였다.

“제발 아버지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마세요.”

차재경 기자가 출입증을 받아서 진성그룹에 들어가건 말건 그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그러나 제 부친이 알게 된 이상 이 일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게 되었다.

“그래.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나도 더는 좋은 방식으로 해결하지 못하겠구나.”

“지금 저 협박하세요?”

“너도 네 기준으로 세상을 보고 있잖니. 네 잘난 애인부터 지르밟고 시작해 보자꾸나.”

부친의 빌어먹을 협박에 은화는 이를 갈았다. 구질구질했지만 주혁을 사랑한 건 진심이었다. 

‘그러니까, 이딴 협박에 넘어가는 것이겠지.’

아무런 말이 없는 은화를 보면서 그녀의 부친이 미소를 지었다. 

애초에 이러려고 그간 은화의 연애에 시비를 걸지 않았던 거다. 그 사람을 두고 거래를 할 생각이었겠지. 은화는 씁쓸하게 웃으며 제 부친을 보았다.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셔 놓고, 그 불행을 자식에게 똑같이 물려주고 싶은 이유가 뭐예요?”

그녀의 눈빛에는 여전히 독기가 어려 있었고, 한 대표는 그런 은화의 표정이 못마땅했다.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 없다. 네 잣대를 들이밀면서 날 평가하지 말거라.”

은화가 빈정거리듯 웃자, 부친이 ‘쾅’ 소리를 내며 나갔다. 

집 안에 덩그러니 혼자 남은 은화는 천천히 갑갑한 옷을 벗어 던졌다.

“인생 참 지긋지긋하네.”

휴대 전화를 침대 위로 집어 던진 은화가 눈을 감았다.

딸 팔아서 회사를 키워 보겠단 부친의 심보가 고약하다고 생각했다. 말이 저를 위한 결혼이지. 결국은 부친의 명예와 부에 힘이 되어 줄 사돈이 필요한 것이었다.

은화는 지금까지 제 부친의 욕망을 위해 희생당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   *   *

갑자기 긴장감이 풀린 게 문제였을까? 평소보다 늦잠을 잔 재경이 화들짝 놀라 침대에서 일어났다. 

급하게 나갈 준비를 끝낸 재경은 마음만 앞선 상황이었다. 

‘빤히 같은 회사로 출근하면서 두고 가냐. 뇌물까지 받아 놓고.’

재경은 도결에게 서운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그렇게 문을 열고 나왔을 땐, 할 말을 잃었다. 

“일어났어요?”

저를 기다리고 있는 도결을 보면서 그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아직 출근 안 했어요?”

재경이 고개를 들었을 때 시침은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소파에 앉아 있는 도결은 무척 바빠 보였다. 왼손으로는 서류를 쥐고 있었고, 오른손으로는 펜을 잡고 있었다. 누가 봐도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라 당혹스러운 재경이었다.

“혹시 오늘부터 재택근무예요?”

“아닙니다. 부회장님께서 사모님이 더 주무실 수 있게 하라고 지시하셔서요.”

백 비서의 깔끔한 대답에 재경이 머쓱해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출근은요?”

“준비해 뒀습니다.”

도결이 마지막 서명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사용인들이 급하게 그가 본 서류들을 정리했다. 전부 회사로 가져갈 모양이었다. 

재경은 저 때문에 번거로운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민망해졌다.

“늦잠 잘 땐, 그냥 두고 가도 괜찮아요.”

“재경 씨.”

그가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자, 재경의 얼굴이 붉어졌다.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혹시 내가 늦잠 자도 나 두고 가지 말아요.”

“네?”

“앞으로는 차재경 씨랑 매일 출퇴근하고 싶어요.” 

무슨 의미인 줄 알고 하는 말인가? 재경은 아무렇지 않게 출퇴근을 함께 하자는 도결을 보면서 눈을 깜빡였다.

“그 말은….”

“나한테 무슨 일이 생겨도 두고 가지 말아요. 나도 꼭 차재경 씨 챙길 테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뜻으로 들렸다. 그가 마치 재경을 몹시 곁에 두고 싶어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기름 한 방울 안 나오는 국가에서 태어났으니까. 뭐 애국심으로 그렇게 해 볼까요?”

재경이 괜히 빙글빙글 말을 돌리자, 도결이 못마땅한 눈길로 고개를 기울였다. 삐딱해진 그의 시선에 재경이 침을 삼켰다.

“그런 애국심이면, 손잡고 같이 걸어 다닐까요?”

“예?”

“출퇴근 길이 늦으면 늦을수록 나는 더 좋고.”

재경은 미소 짓는 그를 보는 게 어색해졌다. 눈만 마주쳐도 가슴이 간질거리는 기분이라, 미칠 것만 같았다.

“크흠. 가요, 빨리.”

*   *   *

재경은 그와 나란히 출근하는 이 길이 어색해서 죽을 것 같은데 도결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오히려 너무 자연스럽게 재경의 손을 잡았다.

“손은 왜….”

연애를 해 본 적이 없어서 이렇게 손을 잡고 걷는 게 어색한 재경이었다. 

도결은 조심스럽게 잡은 재경의 손을 놓기 싫은 듯했다. 

“준비했다는 게 헬리콥터였어요?”

재경이 황당한 시선으로 백 비서를 보았다. 백 비서는 힐끗 손목시계로 시선을 돌리더니 정중하게 대답했다.

“부회장님은 본래 헬리콥터를 이용하여 출퇴근해 오셨는데요.”

“이상하다. 평소에 차 타고 출퇴근하지 않았어요?”

놀란 재경이 묻자, 도결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다급하게 도결의 눈치를 살핀 백 비서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단 늦으셨으니까, 타시죠. 사모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