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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28/60)

<28화>

재경은 그런 주혁의 태도가 몹시 기분 나빴지만, 어느 조직이나 위아래가 있으므로 할 수 없이 주혁이 가리킨 자리에 털썩 앉았다.

“이 바닥에서 사람 믿는 습관 별로야.”

“그래서 그러셨어요? 선배를 너무 믿는 것 같아서 직접 환상을 깨 주시려고?”

가시 돋친 재경의 질문에 주혁이 재밌다는 듯이 픽 웃었다. 훈훈한 그의 얼굴은 웃을 때 빛을 더했다. 사람 좋게 웃을 땐 보는 사람의 기분까지 시원한 맛이 있었다.

“도움이 좀 됐으면 좋겠는데. 배운 건 있고?”

“아니요. 이제는 선배를 믿지 않아서요.”

재경이 불쾌하다는 듯이 눈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그러자 주혁은 검지를 들어 천장을 향해 손짓하며 웃었다.

“오우 무섭다, 차재경. 권력 있는 사모님은 다르네. 권력을 권력으로 눌러 버리고.”

“또 그 소리예요?”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올리는 재경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주혁이 미소를 지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게 일군 주혁의 텃밭은 재경 때문에 온갖 것들로 짓밟히고 있었다. 그래서 더는 탐탁지 않은 제 기분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 네가 믿고 싶지 않아도 이게 현실이니까.”

조금 뒤 재경이 진성그룹 출입증을 들고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주혁이 불안한 듯 다리를 떨었다. 

1시간 전 한은화가 그만 헤어지잔 소리만 하지 않았더라면, 주혁이 재경에게 진성그룹 출입증을 주는 일은 없었을 것이 분명했다. 

‘갑자기 한은화 차장이 헤어지잔 말만 안 했어도.’

주혁은 불안감을 느꼈다. 재경이 고도결 부회장을 꽉 잡지 않는다면,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었다. 

*   *   *

재경은 오랜만에 일찍 퇴근해서 저녁을 차리는 일에 힘을 썼다. 

진성그룹 출입증을 얻었으니까, 앞으로 도결과는 같은 건물에서 일하게 되는 셈이었다. 괜히 기분이 들뜨는 이유를 모르겠다.

“사모님, 오늘 기분 좋은 일 있으셨나 봐요?”

사용인들의 질문에 재경이 뺨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밀가루 반죽을 만지는 재경의 눈빛엔 진지함이 가득했다.

“회사에서 엄청 힘들었었는데, 오늘 갑자기 일이 잘 풀려서요.”

꾹꾹 반죽을 누르며 대답하는 재경을 보면서 다들 걱정스러운 눈초리를 했다. 

재벌가에서 일하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라 당혹스러웠다. 힘든 일은 보통 사용인들이 하고 간단한 지시만 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다행이네요. 그 반죽은 저희가 할게요.”

“아뇨. 닭칼국수의 생명은 이 반죽인걸요. 제가 할게요.”

집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은 도결과 비슷하게 점잖고 말수가 적었다. 일부러 그렇게 골라 뽑는 것인지, 교육을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거기까지 물어볼 틈이 없었다. 

도결이 들어온다는 사용인들의 소리에 재경이 앞치마를 입고 헐레벌떡 달려나갔다.

“왔어요?”

재경의 코에 묻은 밀가루를 보면서 도결이 픽 웃었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 웃는 도결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웃어요?”

“좋아서요.”

그가 손을 뻗어 재경의 코를 쓱 닦았다. 놀란 재경이 한 걸음 물러서자, 그가 성큼 다가왔다. 

“저녁은 뭐예요?”

자연스럽게 재경을 보고 묻는 도결을 보면서 그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저녁 준비한 건 어떻게 알았어요?”

“텔레파시?”

그의 유치한 대답에 재경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한 재경이 입을 가리며 키득거렸다.

“닭칼국수 했어요. 추울 때 먹으면 끝내주거든요.”

그렇게 대답하고 보니까, 집 안이 후끈거릴 만큼 따뜻했다. 뒤늦게 고개를 올려 도결을 본 재경이 씩 미소를 지으며 눈웃음을 쳤다.

“보일러 끄고 먹을까요? 집이 좀 덥네.”

*   *   *

함께 식탁에 앉은 도결은 엉성한 닭칼국수를 보면서 계속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재경은 그런 그의 표정을 보면서 긴장했는지 눈치를 살폈다.

“보기엔 좀 그래도 맛은 있을 거예요.”

“맛있어 보여요.”

웃음기를 감추지 못한 얼굴로 대답하는 도결을 보면서 재경이 입술을 깨물었다. 

도결이 국물을 입에 넣자, 재경의 눈이 반짝였다. 대답을 기다리는 재경의 표정이 어린아이처럼 순수해 보였다. 

도결은 그런 재경을 놀리고 싶어서 일부러 표정을 굳혔다.

“이상하다. 간도 정확했는데.”

재경이 당황해서 서둘러 국물을 먹자, 도결이 가지런한 치아를 보이며 웃었다.

“맛있네요.”

“왜 사람을 놀려요?”

재경이 토라지자, 도결이 기분을 숨기지 못하고 즐겁게 웃었다.

“재경 씨가 너무 예뻐서, 놀리고 싶었어요. 미안해요.”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두 손을 모은 도결은 정말이지 행복해 보였다. 재경도 이 순간이 약간은 행복했다. 

1년 후면 이혼할 사이인데, 헤어질 걸 빤히 알면서도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런 감정은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재경은 이 순간 고도결이란 남자가 자신의 삶의 일부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 또 그러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요.”

“네. 명심할게요.”

그가 점잖게 식사를 시작하자, 재경은 자신이 하려고 했던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실은 오늘 도결 씨한테 할 말이 있어서 기다렸어요.”

수저를 내려놓은 도결이 반듯하게 재경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든 다 들어 줄 것 같은 다정한 눈이었다. 재경은 그 눈을 바라보면서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저 내일부터 진성그룹 본사로 출근하게 될 것 같아요.”

“…그래요?”

놀라지 않는 그의 반응에 당황한 재경이 그의 표정을 살폈다.

“진성그룹으로 이직했단 뜻은 아니고요. 출입증이 나왔어요. 앞으로 보도 기사랑 발제 기사를 쓰게 될 것 같아서….”

“다른 사람 말고 꼭 나한테 물어봐요.”

“예?”

그가 화난 줄 알았던 재경은 눈을 말똥말똥 뜨고선 도결을 보았다. 도결이 씩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이번에도 속았단 사실에 부들부들 떨었다.

“또 놀렸어요. 음식 먹지 말고 다 돌려줘요!”

재경이 으름장을 놓자, 그가 능청스럽게 그릇을 자신의 앞으로 살짝 당겼다.

“에이, 줬다 빼앗는 건 한국 정서가 아니죠. 앞으로는 진짜 안 놀릴게요.”

“한 번 속지, 두 번 속아요? 이젠 못 믿겠어요.”

투덜대는 재경을 보면서 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즐거운 듯 쿡쿡 웃으며 식사하는 도결을 보면서 재경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기쁜 일은 나누면 두 배가 된다더니. 이래서 그런 말이 있나 싶었다.

“아, 재경 씨.”

도결이 식사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재경을 불렀다. 숟가락을 쥔 재경이 토끼 눈을 하고선 그를 쳐다보았다.

“왜요?”

“축하해요. 출입증 되찾은 거.”

재경은 달콤한 그의 목소리에 홀려 고개를 끄덕였다. 

“진성그룹은 처음이라서 정보원이 없어요. 그러니까 법적 보호자인 고도결 씨가 앞으로 잘 도와줘요.”

“그럼요. 이렇게 뇌물도 받았는데. 맛있게 먹을게요. 고마워요.”

국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도결을 보면서 재경이 눈을 깜빡였다. 맨날 먹는 저녁인데 그렇게 좋은가 싶다가도 제 음식이 입에 맞는 것 같아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   *   *

한은화 차장은 주혁의 수상한 행동을 보고받고서 어이가 없었다. 질척이는 남자는 딱 질색인데, 집요하게 굴기까지 했다.

오랜만에 쇼핑이나 가려고 했는데, 기분이 엉망이라 쇼핑은 힘들 것 같고. 자신의 존재를 알아 달라고 구걸하는 주혁이나 보러 가야 할 것 같았다.

은화는 주혁의 집 앞에서 자신의 차를 세워 두고 기다렸다. 이런 식으로 남자를 기다려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래서 사내 연애는 안 된다고들 하는 건가?

“…은화 씨?”

술을 마셨는지 술 냄새가 나는 주혁이 비틀거리며 은화에게 다가왔다. 이리저리 살펴보는가 싶더니 손을 들어 은화의 오른쪽 뺨을 만졌다.

“진짜 한은화 씨네.”

“술 취한 사람이랑 입씨름하는 거 딱 질색인데.”

비아냥거리는 은화의 목소리에 주혁이 손을 조용히 치웠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김주혁 부장이 우리 아버지 엿 먹였다면서요?”

“…….”

주혁이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자, 은화가 따분하다는 듯 제 손톱 위에 칠해진 네일 아트를 내려다보았다. 가로등 불빛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주혁을 바라보는 것이 따분해서 시선을 돌리려 한 행동이었다.

“차재경 기자한테 진성그룹 출입증 줬다던데, 사실이에요?”

“그것 때문에 오셨어요?”

“그럼? 다른 이유로 여기 올 이유가 있어 보여요?”

은화의 말에 주혁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서운한 감정이 밀려드는 걸 억지로 참으려니까, 입술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사적인 일로 오신 거라면 들어가서 이야기해요.”

“하, 꿈 좀 깨요, 제발. 업무가 아니면, 내가 이딴 허름한 동네에서 당신을 뭐 하러 기다려.”

나름 서울에서 비싼 오피스텔이었다. 적어도 주혁이 구할 수 있는 수준에선 그랬다. 있는 돈을 전부 끌어다가 구한 오피스텔이지만, 은화의 눈엔 그저 그런 오피스텔인 모양이었다.

“진짜 업무 이야기 때문에 온 거 맞아요? 내일 회사에서 해도 될 텐데.”

희망이 남은 주혁의 눈빛에 은화가 미간을 구기며 부정했다.

“회사에서 김 부장 얼굴 보는 게 껄끄러워서 왔어요. 내일부턴 제발 내 눈앞에서 알짱대지 말아요. 이렇게 부탁합니다.”

주혁을 똑바로 바라보는 은화의 표정엔 분노가 엿보였다.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화나게 했는지 궁금한 주혁이었지만, 물을 수가 없었다. 

지금 와서 고도결 부회장과 결혼하겠다고 할까 봐 두려운 탓이었다.

“헤어져서 불편하십니까?”

“그딴 걸로 불편할 것 같았으면, 김 부장을 애초에 만나지도 않았겠지. 안 그래요?”

“그럼 왜 회사에서 보기 껄끄러우십니까?”

주혁의 물음에 은화가 목을 좌우로 꺾었다. 예민하게 올라간 눈꼬리가 평소 은화보다 더 까칠해 보이도록 했다. 

“왜 껄끄러울 것 같아요?”

그 순간에 은화만의 독특한 표정이 나왔다. 화가 난 것처럼 날카롭게 올라간 눈썹이 매를 닮은 듯했다. 

주혁은 가만히 은화를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제가 혼사를 망쳤다고 생각하세요?”

“그랬다면 나야 땡큐죠. 이렇게 화낼 이유도 없고.”

문제는 그가 한 행동이 다른 결과를 가지고 왔단 것이었다. 

“그럼, 왜….”

“잘난 김주혁 부장님이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나댔잖아요. 그래서 일이 이따위로 꼬였고. 멍청하면 제발 가만히 있기라도 하지. 그럼 중간은 갔을 텐데.”

분노가 치밀어 오른 은화는 그를 몹시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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