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60)

<27화>

“그럼 감기 걸리지 않게 입어요.”

분명 1년 후면 헤어질 사이였다. 좋든 싫든 두 사람의 사이는 그랬다. 아까는 정말 부부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동했지만, 술이 깬 지금은 이성이 되돌아왔다.

“저 진짜 괜찮아요. 가져가세요.”

재경이 단호한 표정으로 그에게 코트를 벗어 주었다. 그는 가볍게 한 손으로 코트를 받아 들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색한 정적이 차 안에서 흘렀다.

“사실은 위에서 누가 제게 일을 주지 말라고 했다더라고요.”

“누가 그런 말을 해요?”

무심한 듯하면서도 날이 선 목소리였다. 재경이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선배가요.”

“그 선배라는 사람이 내가 본 적 있는 그 사람이에요?”

재경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 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그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조용히 집에 도착했다. 

*   *   *

오후의 햇살이 넓은 유리창을 통과하자 도결의 뒤에서 후광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옆에 선 백 비서는 초췌한 모습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부회장님, 진짜 이대로 진행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어떻게 보나 만류하는 태도였다. 도결은 말없이 서명을 끝낸 서류를 휙 백 비서를 향해 건넸다. 백 비서는 얼떨결에 서류를 하나 더 받아 들고는 미간을 구겼다. 

“그대로 진행해요.”

그러자 백 비서는 껄끄럽다는 듯이 머뭇거렸다. 

“FUK그룹 하청 업체를 건드리시면 소문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억울하면 즉각 처리하겠죠.”

백 비서는 결국 이 상황을 통해 도결의 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청 업체를 빼앗겨서 금전적 손실을 만드는 것보다 본부장을 치우는 일이 더 간단하도록 상황을 몰아세울 줄이야. 

“나중에 회장님께서 아시게 될까 봐 우려됩니다.”

한서일보 조직 내에서 차재경 기자를 침대 인터뷰 기자라고 부른다는 소문은 백 비서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일을 고도결 부회장이 전부 책임져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백 비서한테 이유를 하나하나 설명해야 하는 사람입니까?”

그의 날카로운 눈빛에 백 비서가 움찔했다. 그러나 물러설 수만은 없었다.

“FUK 건은 이해할 수 있지만, 왜 하필 진성그룹 출입증을 차 기자님께 드리라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백 비서는 지난밤에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다만,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도결은 오늘 아침 FUK그룹 하청 업체를 진성그룹 하청 업체 심사에 올리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그뿐이면 다행이었다. 

그가 돌연 재경을 최대한 빨리 진성그룹으로 출근할 수 있도록 처리하란 지시를 한 탓에 백 비서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백 비서는 재경의 소문을 언급하며, 그를 설득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시간이 전부 해결해 줄 텐데, 구태여 나설 필요가 있을까요? 게다가 누가 개입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차 기자님이 견뎌 내야 할 일 아닙니까?”

그러자 도결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제 앞에서 끝까지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백 비서를 보았다. 

“할 말이 더 남았습니까?”

“아직 안 끝났습니다. 차 기자님이 부회장님과 함께 살면서 알게 된 사적인 정보를 가져다가 훗날 기사로 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처음부터 싹을 잘라 두어야 1년 후에도 문제가 없습니다.”

깔끔하게 기자 생활을 접고 1년간 쥐 죽은 듯이 생활했다면, 이렇게까지 재경을 억누를 필요 없었다. 경력 단절이 되는 대신 그만큼 보상을 해 주면 되지 않나.

“그렇군요. 두 번 말 안 합니다. 그대로 진행해요.”

백 비서는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고도결 부회장을 보았다. 바늘로 찔러도 눈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던 남자가 제 앞에 있는 고도결이었다. 그런 그가 왜 하필 차재경 기자에게만 쩔쩔매며 끌려다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부회장님, 제가 한마디만 더 해도 되겠습니까?”

백 비서는 평소보다 과한 반응으로 도결에게 답하고 있었다. 

애초에 고도결 부회장은 차 기자에게 일을 그만두라고 조언했었고, 그 조언을 무시한 건 차재경 기자였다. 그런데 어째서 이 책임을 고도결 부회장이 안고 가려고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간 공과 사를 철저히 구별하던 고도결 부회장을 존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감정에 휩쓸리는 결정을 하다니. 이 상황이 답답해서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백 비서가 생각할 땐 적어도 차재경 기자는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일에 책임을 져야 옳았다. 

“솔직히 전 차재경 기자를 못 믿겠습니다.”

지금 그가 받은 서류들은 차재경 기자에게 인터뷰를 몰아주도록 하는 업무였다. 이런 식으로 한 언론사에 몰아주는 행위를 하게 된다면, 진성그룹에 절대 이득이 될 게 없었다. 

특히 하청 업체에서 신제품에 대한 정보를 한 개씩만 흘려도 한서일보에 중요한 정보가 하나씩 쌓이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럼 경쟁 업체에게 진성그룹의 중요한 정보를 전부 빼앗길 수도 있었다. 

재경이 일부러 한다고 하면 협박을 해서라도 못하게 막아야 하는 상황인데, 직접 진성에서 기사를 쓰라고 나서는 꼴이니 너무 위험했다.

“유감이군요. 난 백 비서님한테 한마디도 허락한 적 없습니다.”

도결이 불쾌한 표정으로 백 비서를 바라보자, 백 비서가 머뭇거리다가 헛기침을 했다.

“네. 그렇지만 제가 부회장님을 보필하는 비서 실장이라면, 꼭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저는 차재경 기자님을 위해 부회장님이 인터뷰를 준비하는 것이 싫습니다.”

비실거리는 분위기를 풍기는 백중일은 그런 사람이었다. 나약한 듯하면서도 절대 물러서기만 하지 않았다. 

도결은 그런 백 비서가 오늘따라 거슬렸다.

“차재경 기자가 아니라, 사모님.”

화가 난 그의 목소리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당황한 백 비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지금 돌이켜 보니, 자신이 너무 주제넘은 것 같았다.

“…사모님께서 안 좋은 소문으로 어려워하실 거라는 건 부회장님도 이미 짐작하고 계셨잖습니까?” 

“백 비서, 그 발언 많이 위험하단 생각은 안 합니까?”

“크흠. 솔직히 퇴사까지 권유했는데 사모님께서 끝까지 우겨서 견디는 자리 아닙니까? 그냥 더 고립시키면 알아서 그만두실 텐데요. 그편이 회사에 더 이득이 될 것 같습니다.” 

이성적으로는 백 비서의 말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옳았다. 그건 그도 잘 알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재경의 앞에선 무엇이든 감정적인 사람이 되었다.

“내가 오늘부터 백 비서한테 일 안 주면.” 

도결의 싸늘한 표정에 당황한 백 비서가 침을 삼켰다.

“백 비서는 쉽게 퇴사할 수 있습니까?”

“죄송합니다.”

결국, 도결이 내린 지시를 처리하러 발걸음을 옮기는 백 비서였다.

“그나저나, 회장님 지시로 빼앗은 출입증인데, 이런 식으로 돌려놔도 되려나.”

걱정이 태산인 백 비서였다.

*   *   *

오전까지만 해도 일거리가 없던 재경은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이제는 김주혁 경제부 부장실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주혁에게 크게 실망해서 더는 일거리를 달라고 사정하고 싶지 않았다.

“저기….”

인기척에 놀란 재경이 고개를 돌리자, 며칠 전에 본 2팀 기자가 작은 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

“아, 오랜만이네요.”

불쑥 상자를 내민 이유리 기자를 보면서 재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난번에는 감사했습니다.”

“아, 선물은 안 주셔도 괜찮아요. FUK 건은 보도 기사 못 나갔어요.”

“저 때문에 고생하셨을 것 같아서요. 죄송해요. 꼭 받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신이 없어서 상황을 제대로 설명 못 했던 게 마음 쓰인 모양이었다. 

재경은 리본이 묶여 있는 작은 상자를 조심스레 받고는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그리고 오늘 보도 기사 나온 거 봤어요.”

이유리 기자의 말에 재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혁이 위에서 억압하고 있다고 해서 당연히 기사가 못 나오는 줄 알았다.

“진짜 기사가 나왔어요?”

재경이 놀란 얼굴로 이유리 기자에게 물었다.

“네. 차재경 기자님 이름으로 보도 기사 올라왔는데. 못 보셨어요?”

“…아, 몰랐어요. 선물은 잘 쓸게요. 고마워요.”

상자를 자신의 업무용 책상에 올려 둔 재경이 부장실로 시선을 옮겼다. 이유리 기자도 재경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유리가 슬쩍 몸을 틀어 자리를 비켜 주었다. 

“잘 다녀오세요!”

다시는 주혁과 상대를 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는데, 자신의 기사를 올린 주혁의 행동이 의아해서 계속 무시하고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복도에서 마주친 윤서희 기자는 힘이 들어간 재경의 발걸음을 보고 인상을 썼다.

“김 부장님이 찾던데.”

“내 보도 기사 봤어?”

재경의 밝은 표정에 윤 기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종도 아니고, 그렇다고 발제 기사도 아니고. 고작 보도 기사를 내가 왜 봐?”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묻는 윤 기자를 보면서 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 좋을 때 괜히 초를 칠 필요 없었다. 

“모르면 됐어. 어떻게 기자가 돼서 남들 다 아는 소식도 모르니.”

재경이 휙 스쳐 지나가자, 윤 기자가 입술을 삐쭉이며 재경을 흘겨보았다.

*   *   *

재경이 부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주혁은 빨간색 펜을 입에 물고 있었다. 주혁은 담배를 입에서 뽑아내듯이 손가락 사이로 펜을 잡아 입술에서 뗐다. 

재경과 시선이 마주치자 주혁이 미간을 구겼다.

“사내에서 절대 금연. 너무 따분한 규정 아니냐?”

“한서일보에서 따분한 게 어디 그것뿐이게요?”

재경의 삐딱한 눈빛에 주혁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주혁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편안한 주혁의 모습은 대학 시절 이후로 처음인 듯했다. 복학생 시절과 닮은 모습으로 주혁이 재경이 있는 곳으로 편하게 걸어왔다.

“기사는 봤니?”

“아니요. 방금 이유리 기자가 알려 줘서 왔어요.”

아직 어안이 벙벙한 재경의 표정을 보면서 주혁이 씁쓸하게 웃었다.

“오다가 복도에서 윤 기자 만났어요. 선배가 나 찾았다고.”

“권력이란 무엇인가. 아직 앞길 창창한 후배 기자가 모르니, 내가 그 답을 알려 줘야 할 것 같아서.”

주혁이 자리에 앉으라는 듯이 고개를 들어 소파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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