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우리 처음 만났을 때도 재경 씨가 샀는데.”
그의 말에 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땐 사실 법인 카드로 긁었으니까 재경이 샀다고 하기에는 애매했다.
그러고 보니 의아했다. 법인 카드 내역이 남아 있을 텐데 어떻게 주혁은 그날 벌어진 일들을 전혀 모를 수가 있었을까?
‘다른 꿍꿍이가 있었던 건 아닐까?’
재경은 제발 지금 떠오르는 것들이 전부 사실과 다르길 바랐다.
“우리 부부잖아요. 누가 사는 게 뭐가 중요해요. 어차피 고도결 씨 월급은 내 손에 있는데.”
그러자 그가 붉어진 얼굴을 돌리며 손으로 입술을 가렸다.
재경은 호일 그릇 두 개를 겹쳐 그 안에 라면 두 개를 넣어서 챙겼다.
“호호호, 신혼부부인가 보네.”
계산을 끝낸 직원이 그들을 보면서 나무젓가락을 내밀었다. 재경이 미소를 지으며 편의점을 나서자, 그가 슬쩍 재경의 뒤를 따라나섰다.
플라스틱 의자는 엉덩이가 시렸고, 강바람이 닿은 손은 얼음장처럼 찼다. 그 손으로 차가운 맥주를 쥐고 마시려니 온몸이 어는 것 같았다.
그런 와중에도 재경은 호일에 끓인 라면을 후후 불어 후루룩 잘만 먹었다. 반면 도결은 재경의 얼굴을 바라보느라, 면이 퉁퉁 불어 가고 있었다.
“라면 안 좋아해요?”
재경이 맥주를 삼킨 뒤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물었다. 그녀의 시선은 그가 남긴 라면을 향해 있었다.
“좋아해요.”
“그런데 왜 면은 하나도 안 먹어요?”
황당한 재경의 눈빛에 그가 침을 삼켰다. 라면은 딱히 좋아하지 않는데, 라면을 먹는 재경의 모습이 좋았다.
라면이 싫다고 하면 다시 보기 힘들 것 같아서 꺼낸 거짓말인데 그걸 또 재경은 금방 알아차렸다.
“종종 이렇게 나와서 먹을까요?”
도결이 다 불어 터진 라면을 한 젓가락 들어 올리며 재경을 보았다. 재경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찰랑이는 강물을 보면서 그녀의 마음도 조금씩 진정되는 것 같았다.
“오늘, 고마워요.”
뜬금없는 그녀의 인사에 그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그녀의 옆모습을 빤히 보았다.
“고도결 씨가 옆에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나도 고마워요.”
강물의 물비늘처럼 재경의 눈가가 반짝였다. 그는 그런 재경의 모습을 아는 척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손을 뻗어 재경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냈다.
민망해진 재경이 손을 뻗어 아름답게 반짝이는 한강을 가리키며 손짓했다.
“저기. 엄청 예쁘네요.”
그 말이 시작이었다. 두 사람은 사이좋게 빈 맥주 캔을 늘려 갔다. 처음에는 라면을 먹으면서 한 캔을 비웠는데, 조금 뒤 맥주를 두 캔씩 더 마셨다.
취중 진담이라고. 재경이 슬슬 자신의 진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후. 그냥 인정받고 싶었던 것뿐인데… 내 우상이었는데.”
“좋은 선배였나 봐요. 재경 씨가 우상이라고 부를 만큼.”
“선배처럼 멋있는 사람은 처음이었어요. 정의롭고 똑똑하고….”
얼굴도 모르는 상대를 두고 이토록 질투해 본 적이 있었던가. 도결은 빈 맥주 캔을 힘주어 잡으면서 미소를 지었다.
“겉만 봐선 모를 일이죠.”
“그러니까요. 선배가 나한테 일을 안 주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거라고. 그러니까 조금만 더 선배를 이해해 보자고 그렇게 달랬는데… 선배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재경이 얼마 남지 않은 맥주를 입안에 넣어 보겠다고 고개를 꺾었다. 그런 재경의 말에 그의 눈썹이 일렁거렸다.
“오늘 일이 없어서 많이 속상했어요?”
“…아마도요.”
“그 사람이 인정해 주지 않아서, 그래서 울어요?”
그의 질문에 빈 맥주 캔을 테이블 위에 ‘쾅’ 소리 내며 올린 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요. 내가 너무 자랑스러워요.”
“…….”
언제나 자신의 행동을 점검하며 조바심 나는 도결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말이었다. 그런 재경이라서 그의 시선을 끌고 있는지도 몰랐다.
살면서 그는 절대 가져 볼 수 없는 마음이라서. 차재경이라는 여자가 자꾸만 더 탐났다.
“나는 머리도 별로 안 좋아서. 공부를 되게 열심히 해도 성적이 드라마틱하게 좋지도 않았어요.”
그가 입을 가리며 피식 웃자, 재경이 미간을 구겼다.
“지금 나 비웃었어요?”
“아니요. 좀 귀여워서.”
“나는요, 지금 여기 서울에서 두 발 버티고 서 있는 내가 매일매일 대견해요.”
평소의 도결이었다면, 이런 비생산적인 시간을 아까워했을 텐데, 이상하게 재경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하나도 아깝지가 않았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재경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마냥 즐겁게 느껴졌다.
“대견하네요. 차재경 씨.”
그가 손을 뻗어 재경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재경이 무너져 내리며 엎어져서 엉엉 울었다.
“흐엉. 그런데 어떻게 나한테 이래. 으흐엉.”
우는 재경을 보던 도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무릎이 더러워지는 줄도 모르고 그녀를 위해 오른쪽 무릎을 바닥에 꿇은 채였다.
“재경 씨?”
걱정스러운 그의 목소리에 얼굴을 들어 올린 재경의 입꼬리가 축 처져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어린아이처럼 귀여워 도결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나 한 번만 안아 봐도 돼요?”
코를 훌쩍이는 재경을 보면서 그가 천천히 두 팔을 벌렸다. 그의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묻은 재경이 머뭇거리다가 이내 더 깊이 파고들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지만, 사실은 재경도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었다. 자신의 노력과 상관없이 흘러가는 분위기가 그녀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겁이 나요. 난 진짜 그런 사람이 아닌데. 사람들이 날 바라보는 시선이 싸늘해서. 내가 진짜 그런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 같아서 무서워요.”
그는 재경이 하고 싶은 말들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를 향한 타인의 기대가 그의 숨통을 쥐고 흔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타인의 시선은 언제나 노력과 상관없이 흘러가는 것이라, 아무리 잡으려고 애를 써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언제나 최선을 다했는데. 부끄럽게 살았던 적 없는데. 믿었던 선배까지 저를 그런 사람으로 바라보니까. 내가 진짜 보잘것없게 느껴져서….”
그녀는 한 번도 누군가에게 이토록 서러운 마음을 털어놓은 적 없었다. 그러니까 도결은 재경의 진짜 속마음을 처음 듣는 사람이었다.
“그건 그 사람의 잘못이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고도결 씨가 그렇게 생각하는 줄은 몰랐어요.”
재경이 눈물을 닦아 내고는 그를 보았다. 그러자 도결이 머뭇거리다가 그녀를 자신의 품 안에서 놓아주었다.
“생각해 보니까, 이대로 가만히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위축되어 있는 건 멋이 없네요. 내일부터는 남들이 뭐라고 하든 차재경답게 살아야겠어요. 결국엔 나를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 거예요.”
도결은 갑자기 기운을 내는 재경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오해하는 사람들의 탓이라니. 보통은 남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가 있을 것 아니냐고 말하잖아요.”
“차재경 씨한테 지금 필요한 말 같아서.”
언젠가 누군가가 그에게 해 주길 바랐던 말이었다. 도결은 어린 시절 자신이 내린 결론으로 그녀를 위로하고 있었다.
“사실 그동안은 잘 몰랐는데. 남편이 있다는 건 생각보다 꽤 든든하네요. 이렇게 위로도 해 주고. 같이 술도 마셔 주고.”
밝아진 재경의 표정에 굳어 있던 도결의 표정도 조금씩 부드럽게 풀렸다.
“다행이네요. 맨날 내년만 기다리는 줄 알았는데.”
무심하게 진심을 뱉던 그가 잠시 주춤거리며 미간을 구겼다. 재경이 떠날까 봐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들켰을까 봐 뒤늦게 신경이 쓰였다.
정작 재경은 그의 말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솔직히 결혼은 생각해 본 적 없어서 당황스러웠는데. 오늘은 든든한 친구가 생긴 기분이에요.”
그녀의 말에 도결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단 한 번도 재경을 친구로 생각한 적 없었다.
지금도 재경의 작은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대고 깊은 키스를 마구 퍼붓고 싶었다. 친구끼리는 절대 할 수 없는 것들을 그는 매일 밤 재경을 두고 상상했다. 이런 마음으로는 절대 친구가 될 수 없지 않나?
“미안하지만 난 차재경 씨랑 친구 할 생각 없는데.”
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재경이 몸을 움찔하더니 도리어 그보다 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애매하게 웃었다.
“좀 친해졌다고 너무 주제넘었죠? 나이 차이도 네 살이나 나면서 친구라니.”
그러자 그가 재경의 턱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몇 초간 허공에서 눈이 마주치자 재경은 부끄러운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피하는 재경의 모습이 그의 신경을 묘하게 긁었다.
“나 지금 차재경 씨한테 키스해도 됩니까?”
재경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재경의 말캉거리는 입술에 제 입술을 부드럽게 포갰다.
포개진 입술 사이로 서로의 온도를 조금 더 느꼈다. 그러고는 그의 혀가 살짝 벌어진 재경의 입술 안으로 거칠게 비집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흐읍.”
뜨겁게 이어지는 키스는 에스프레소에 녹아 버린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했다. 그의 키스는 마치 아포카토 같았다. 재경의 입술을 남김없이 전부 녹여 버릴 것만 같았다.
* * *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술이 전부 깨 버렸다. 재경은 자신의 어깨 위에 있던 도결의 코트를 벗어서 건넸다.
“잘 썼어요. 고마워요.”
도결은 제 코트를 무심히 바라보다가 이내 코트를 받아 들었다.
“몸은 좀 괜찮아요? 춥진 않아요?”
그의 걱정 어린 물음에 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연인이 생긴 기분이었다. 주혁과 하고 싶었던 것들을 그와 하는 중인데 불쾌하지 않았다. 도리어 조금 설레기까지 했다.
“덕분에요. 에이취.”
대답하고 바로 재채기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재경이 머쓱하게 웃었다.
그는 들고 있던 자신의 코트를 재경의 무릎 위로 올렸다.
자동차 바닥에 코트가 쓸리는 것 같아서 신경이 쓰인 재경이 서둘러 코트를 집어 들었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불편해요?”
도결의 질문에 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느릿하게 제 코트를 들어 그녀의 어깨 위로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