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60)

<25화>

도결의 물음에 재경이 고개를 기울였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오늘 많이 힘들었을 것 같아서요.”

그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다정해서였을까. 재경은 도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을 살짝 더 열었다. 들어오라는 뜻이었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와 재경을 꽉 끌어안았다. 그 순간 재경은 밤이 고요하게 깊어 간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 것만 같았다.

“오늘 본의 아니게 화나게 한 건.”

“…….”

“미안해요.”

그의 사과는 이상한 힘이 담겨 있는 듯했다.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화가 순식간에 발아래로 사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도결의 넓은 어깨에 파묻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재경의 몸은 그제야 긴장을 풀며 진정할 수 있었다.

“실은 괜찮아요. 아깐 그냥 초라한 내 모습을 들키는 게 부끄러웠어요.”

재경의 떨리는 목소리는 침착했다. 

“멋대로 들어가서 미안해요.”

도결의 대답에 재경이 어색한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   *   *

“고도결 부회장이 찾아왔다면서요?”

술에 취한 주혁의 물음에 은화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이런 질척거리는 연애는 딱 질색이라고 경고했는데, 요즘 들어 주혁이 자꾸만 선을 넘었다.

“김 부장님, 요즘 나한테 사람 붙였나 봐요?”

“우연히 들었습니다.”

“우리 회사 영 안 되겠다. 직원들이 하나같이 입이 가벼워. 아, 대표님이 가벼워서 그런가?”

은근히 제 부친을 먹이는 은화를 보면서 주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저라서 싫은 겁니까?”

주혁의 질문이 여전히 결혼을 향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은화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

“만약에 제가 재벌가 자제였으면….” 

“그랬으면?”

“제 청혼에 대한 대답은 들을 수 있었겠죠?”

참 따분한 대화였다. 은화는 슬쩍 왼쪽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이럴 시간에 들어가서 쉬는 게 나을 것 같단 생각에 몸을 일으켰다.

“나 좀 피곤해서 퇴근하고 싶은데. 김 부장은 더 할 일이 남은 건가요?”

남처럼 묻는 은화를 보면서 주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창피하십니까?”

“원하는 대답이 Yes라면 긍정으로 해 두죠.”

서늘한 은화의 표정에 주혁이 미간을 구겼다. 혼자서만 애타는 연애는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은데, 이대로 은화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아.”

마른세수를 하는 주혁을 보면서 은화가 고개를 까딱였다.

“뭐 해요, 내 사무실에서? 나와요. 나 퇴근하게.”

*   *   *

이른 아침 재경은 회사에서 받은 메일을 확인하고 씩 웃었다. 기껏 얻은 기회를 날려 버린 것이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완벽하게 질문에 응한 답을 보고서 안도감이 들었다. 

지금은 도결에게 얹혀서 사는 상황이라 월급이 썩 필요한 상황은 아니지만…. 내년이면 다시 돌아갈 현실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상황에서도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것만이 그녀가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노력이었다.

주혁은 그녀가 쓴 기사를 읽으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재경은 주혁에게 자신이 쓴 보도 기사의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따져 묻고 싶었지만, 애써 참아 냈다. 

상대가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것도 재경이 해야 할 업무에 포함된다고 믿었다.

“잤어?”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던 상황이었다. 다른 누군가의 입에서 나와도 상처가 될 말이었다. 그런데 상대는 재경이 그토록 존경하던 선배였기에 더 큰 상처가 되었다. 

그녀의 우상인 주혁의 입에서 잤냐는 질문이 나오자, 재경은 크게 휘청거렸다.

“뭐라고 하셨어요ㅡ 지금?”

잔뜩 굳은 표정으로 주혁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주혁은 재경을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의자에 기대고는 팔짱을 꼈다.

“FUK 본부장이랑 잤냐고 물었어.”

“선배 지금 나한테 너무 선 넘은 거 아녜요?”

재경의 눈빛이 완전히 차갑게 식었다.

“그 사람 업계에서 유명해. 너한테만 특별히 준 건 아닐 것 아냐.”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고 하더니 이렇게 발이 잘려 나갈 줄이야. 

사막 한가운데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다. 이유리 기자가 남자 기자를 대동하라고 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올랐던 사람은 주혁이었는데. 그런 주혁이 저를 이따위로 취급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너무 놀라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주체할 수 없이 머리가 저릿해졌다.

재경은 주혁을 노려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고생했다, 힘들진 않았니, 무서웠겠다, 많고 많은 위로 중에 선배가 꺼낸 말은 고작 ‘잤어?’ 한마디네요.”

“상사로서 물은 거야.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마.”

“그러세요? 그럼, 대답해 드려야겠네요. 안 잤어요. 상사로서 더 물으실 게 남았나요?”

주먹을 쥔 재경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저런 남자를 그토록 오랫동안 짝사랑했단 사실이 후회스러웠다.

“나한테까지 속일 필요 없어. FUK 본부장이 여색 밝히는 거 모르는 거 아니니까.”

알 만하다는 눈빛이었다. 그 차가운 눈빛은 끝내 재경의 눈에 뜨거운 눈물을 만들었다.

“안 잤다고요! 안 잤어요! 회사의 명예에 실추가 될 짓, 하지 않았습니다.”

“……”

반응이 없는 주혁을 보면서 재경이 눈물을 닦으며 다시 한번 주혁을 노려보았다.

“제 모든 것을 다 걸고. 안 잤어요.”

억울하다는 재경의 목소리에 주혁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한 기색으로 책상을 두드리던 주혁이 재경을 올려 보았다.

“그럼, 그 사람이 도와줬니?”

주혁의 서늘한 눈빛에 재경이 몸을 움찔했다.

“지금 누구를 말하는 거예요?”

“네 남편 말이야. 고도결 부회장.”

도대체 언제부터 선배와의 관계가 이토록 엉망으로 꼬였는지 모를 일이었다. 한숨을 길게 뱉어 낸 재경이 입술을 깨물었다.

“FUK그룹 신일성 본부장님께 직접 확인해 보세요. 인터뷰를 자의로 한 게 확실한지. 확인해 보면 아실 것 아녜요.”

“여색을 밝히는 본부장이 아무 대가 없이 자료를 넘겼단 거야? 그럼 권력을 이용했단 뜻 아니겠니?”

“권력이요?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선배가 그런 말을 해요?”

재경은 아무 권력의 도움 없이 노력해서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그래서 지금 주혁이 하는 말들은 전혀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할 마음도 없었다. 도결에게 자랑스레 꺼냈던 재경의 삶이 순식간에 휘청이고 있었다. 

‘내가 혼자 힘으로 이 자리까지 온 걸 빤히 알면서, 어떻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지?’ 

재경은 주혁을 바라보면서 제 자신이 비참하다 못해 한심해졌다.

“못할 말도 아니지. 너도 고도결 부회장과 결혼한 이유가 있을 것 아니야?”

“선배가 날 이용했다고 해서, 나도 그 사람을 이용했을 거라고 착각하지 말아요.” 

“그 사람 정도의 권력이라면, 뭐든 쉽게 해결할 수 있겠지.”

“제 힘으로 해결했어요. 선배야말로 그 잘난 권력으로 할 수 있는 게 있긴 해요?”

제 밑의 기자들도 못 지켜 줬으면서. 재경은 눈으로 주혁을 비난하고 있었다. 그러자 주혁이 황당하다는 듯이 웃었다.

“차재경. 내가 너한테 갑자기 일을 주지 않은 진짜 이유. 궁금하지는 않아?”

“궁금할 틈이 없어서 못 물어봤네요.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위에서 내린 지시야. 네가 한서일보에 제대로 밉보였단 뜻이지.”

그러니까, 주혁이 하고 싶은 말은 하나였다. 재경이 눈치 없이 기사를 써 와서 곤란하다는 말을 돌려 한 셈이었다. 

“내 권력은 고작 이 정도뿐이야. 권력은 더 큰 권력 앞에서 무릎 꿇기 마련이거든.”

허탈한 재경의 말문이 막히자, 주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더 할 말 없으면, 그만 나가 봐.”

*   *   *

늦은 오후가 다 되어서 사람들이 퇴근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식 출입증이 없는 재경은 본사로 출퇴근을 하게 된 상황이었다. 

할 일 없이 벽을 보고 있는 동안 재경은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재경도 사람인데 그런 찝찝한 소리를 듣고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도대체 누가 자신의 앞길을 막았단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안색이 어두워진 재경은 터벅터벅 길을 걸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가 문제였는지 모르겠다. 

답답한 재경의 발걸음을 멈춰 서게 만든 건 그녀의 앞을 막아선 단단한 몸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인 건 도결이었다. 

놀란 재경이 오늘 처음으로 새로운 표정을 지었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세요?”

“지나가는 길에 생각났어요. 혹시 다른 일정 없으면, 같이 퇴근할까요?”

“그래요. 어차피 집에 가려고 나오던 길이에요.” 

“표정이 안 좋은데. 무슨 일 있었어요?”

오늘 아침 재경이 주혁에게 바랐던 말을 그가 해 주고 있었다. 생각도 못 한 애정 어린 물음에 재경이 당황하며 머뭇거렸다. 

“어렵게 받은 보도 자료로 기사를 썼는데. 오늘 노출이 안 됐더라고요.”

그러자 도결이 재경에게 차에 타라는 듯이 차 문을 열었다.

“기분 전환 겸 데이트 가요, 우리.”

그의 말에 재경은 복잡했던 생각들을 애써 지워 내며 웃었다.

“좋아요.”

*   *   *

어두운 한강은 그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은은한 빛에 반짝이는 물결이라든가 코가 시릴 듯한 바람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강렬해서 아주 잠깐도 다른 생각을 못 하게 했다.

재경이 몸을 웅크리자, 도결이 자신의 코트를 벗어 그녀의 어깨 위로 덮었다. 

“괜찮아요.”

당황한 재경이 붉어진 손으로 그의 코트를 주섬주섬 잡자, 그가 미간을 구겼다.

“재경 씨는 거짓말할 때 얼굴에 티 나는 거 알아요?”

“제가요?”

표정 관리는 꽤 잘한다고 생각했던 재경은 어정쩡하게 서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 재경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그가 얼굴을 붉혔다.

“흠흠. 그나저나 한강은 원래 이렇게 텅 비어 있습니까?”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보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SNS에 올라오는 사진처럼 북적거리지는 않았다. 

재경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그를 올려다봤다.

“이 날씨에는 잘 안 오나 봐요.”

“좋네요. 세상에 재경 씨랑 나랑 단둘이 남은 기분.”

덤덤한 목소리로 태연하게 닭살 돋는 말을 하는 도결을 보면서 재경이 픽 웃었다. 

세상에 사랑은 단 하나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그와 있는 이 시간이 좋았다.

“고도결 씨, 라면 좋아해요?”

재경의 물음에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재경과 있으면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말들을 많이 들었다. 아무도 그에게 라면을 좋아하냐고 묻지 않았다. 애초에 도결은 인스턴트 라면을 입에 댄 적이 없었다.

“…차재경 씨는 좋아합니까? 라면?”

“네. 추우니까. 한 그릇씩 할까요?”

눈을 반짝이는 재경의 얼굴에 그가 픽 웃었다. 싫다고 하면 풀이 죽은 강아지처럼 실망하려나. 그가 재경을 부드럽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수선한 편의점 주변을 보면서 그가 미간을 구겼지만, 재경은 그의 손목을 잡았다.

“여기예요.”

언젠가 와 본 적이 있었던 것처럼, 재경의 행동이 꽤 자연스러웠다. 

재경은 봉지 라면을 두 개 사면서 맥주도 함께 골랐다. 그가 계산하려는데, 그녀가 불쑥 휴대 전화를 내밀더니 배시시 웃었다. 

“이건 내가 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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