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60)

<24화>

도결은 재경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다친 곳은 없어요?”

“덕분에요.”

다시 정적이 흐르자 도결이 안절부절못했다. 

백 비서는 낯선 이 상황을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었다. 차라리 운전대라도 잡으면 안 들리는 척하기가 더 쉬울 텐데. 

오늘따라 운전 기사님이 부러웠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처럼 운전만 하는 기사님을 바라보다가 백 비서가 고개를 숙였다. 

콧대 높은 상사가 몸을 낮추는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자니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았다.

“크흠. 오늘 일은 많은 오해가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백 비서가 슬쩍 끼어들자, 재경이 고개를 정면으로 반듯하게 들어 백 비서의 옆모습을 보았다.

“오해요?”

“그러니까 부회장님과 제가 근처에서 식사하다 우연히 사모님과 마주친 상황이라서요.”

변명하는 백 비서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재경이 고개를 천천히 돌려 도결에게 시선을 두었다.

“설마 고도결 씨도 지금 백 비서님이랑 같은 생각이라고 할 건가요?”

그가 가만히 재경을 보다가 슬쩍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저녁으로 한정식이 먹고 싶었습니다.”

“하아. 이러려고 어디에서 인터뷰하는지 물어봤어요?”

“미안합니다.”

도결의 입에서 사과가 나오자, 백 비서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숨이 막히는 기분은 백 비서뿐만이 아닌 듯했다. 재경이 굳은 표정으로 창문을 살짝 열었다. 그녀는 열린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얇은 손가락으로 느끼며 눈을 감았다. 

바람 소리만 거칠게 들리는 차 안에서 백 비서가 백미러를 통해 힐끗 도결의 눈치를 보았다. 

그런 백 비서를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재경이 눈을 감고 읊조렸다.

“다음에는 갑자기 끼어들지 말아요. 내 일에 끼어들면 그게 누구라도 달갑지 않으니까.”

“네. 절대 끼어들지 않겠습니다!”

백 비서가 빠르게 대답하며 밝아진 표정으로 도결을 보았다. 지금이 기회라는 눈빛을 부회장에게 보내는데, 그가 심각해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은 못 합니다.”

앞뒤가 꽉 막힌 도결의 대답에 당황한 백 비서의 눈이 커졌다. 

아무래도 연애라고는 해 본 적 없는 부회장님이 이 말싸움을 빠르게 끝내는 방법을 모르는 눈치였다. 재경의 눈빛이 서늘해질수록 백 비서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부… 부회장님?”

백 비서의 간절한 눈빛을 보았으면서도 그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 갔다.

“차재경 씨의 법적 보호자가 된 이상 재경 씨가 위험한 걸 빤히 알면서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눈살을 찌푸린 재경을 보면서 그가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하. 부부 사이에 지켜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하단 뜻이에요.”

“왜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고작 계약 결혼이면서. 재경은 목구멍에서 간질거리는 그 말을 차마 뱉지 못하고 도결을 노려보았다. 

도결은 슬쩍 재경의 귓가로 몸을 기울이며 답했다.

“걱정되니까.”

다른 이유는 없다는 듯이 그가 대답했다. 

재경은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 것만 같았다. 오직 그와 자신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심장 소리가 재경의 귀에 깊이 파고들었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 백 비서는 서둘러 달아났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진다고. 계속 있다간 숨이 막힐 것 같아서 빠른 퇴근을 했다. 

재경과 도결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다.

“저녁은 먹었어요?”

갑작스러운 그의 질문에 재경이 고개를 들었다. 늘 빈집에 혼자 들어가서 잠이 들던 재경이었기에 그의 질문이 낯설었다. 

“아니요. 밥 먹을 정신이 없었어요.”

“그럼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내려와요.”

*   *   *

재경은 잘 차려진 상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간단하게 먹자고 들었는데. ‘야식’이라는 단어를 꺼낼 수 없을 만큼 잘 차려진 밥상이었다. 

된장찌개와 제육볶음, 상추와 나물 반찬들과 따뜻한 계란프라이.

“진짜 저녁 식사네요?”

언제 이만큼 차렸냐는 말이 재경의 목구멍에 걸렸다. 그와 그녀를 둘러싼 직원들을 보면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었다.

재경은 의자를 소리 내서 빼고는 대충 자리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혼자 먹기엔 많은 것 같은데….”

반면 도결은 어떤 소리도 내지 않고 의자를 꺼내 반듯하게 앉았다. 그가 자신을 AI 로봇이라고 소개한다고 하면 재경은 옳다구나 하고 속아 줄 의향이 있을 정도로 빈틈이 없었다.

“고도결 씨도 먹게요?”

그가 가볍게 끄덕이며 웃었다.

“재경 씨 혼자 먹기엔 많은 것 같아서요.”

도결은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소리를 내는 법이 없었다. 입안에 음식을 넣는 모습도 우아하기만 했다. 

반면 재경은 평범한 가정집에서 그렇듯이 우물우물 편하게 밥을 먹는 편이었다.

“원래 밥 먹을 때 대화하는 걸 싫어해요?”

숟가락 볼록한 부분에 묻은 밥풀로 김을 붙여서 옮기는 재경을 보면서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못 하는 편입니다.”

도결은 특이하게 김을 먹는 재경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자신의 숟가락을 내려다보았다. 

그도 볼록 튀어나온 부분을 김에 가져다 댔으나 재경처럼 김이 찰싹 붙지 않았다. 그러자 재경이 쿡쿡 웃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볼록 튀어나온 곳에 하얀 밥풀이 세 알 붙어 있었다.

“여기. 밥풀이 포인트예요. 여기에 밥풀을 묻혀서 이렇게.”

재경의 말처럼 그가 숟가락에 밥알을 붙여 김 위에 올리자, 김이 잘 붙었다.

“김밥 만들 때랑 원리가 같은데. 아, 김밥은 만들어 봤어요?”

“아니요. 딱히 요리할 일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재경이 주변을 힐끗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해 줄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그가 요리를 취미로 가질 필요는 없어 보였다.

“사실 저도 김밥을 잘 싸는 건 아녜요. 그냥 대충 남은 반찬 넣어서 싸 먹는 거라서. 하여튼 김은 밥알로 풀칠한다 생각하면 돼요. 잘 붙거든요.”

“남은 반찬으로 김밥을 만드는 겁니까?”

그가 의아한 목소리로 묻자, 재경이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이건 재경의 방식이었다.

“자취하다 보면 음식이 맨날 남았거든요. 어묵볶음이라든가 햄이라든가. 한 번에 다 넣어서 김밥에 싸서 먹으면 든든해요.”

“궁금하네요. 어떻게 든든한지.”

재경은 그가 진심으로 하는 말에 머뭇거렸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았는데.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전혀 모르는 도결이 진짜 로봇처럼 느껴졌다.

“그럼 고도결 씨는 어떨 때 보람이나 성취감을 느껴요?”

“그런 걸 꼭 느껴야 합니까?”

그가 무심하게 뱉는 말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꼭 느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재경은 일상 속 소소한 행복을 통해 살아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 작은 일들을 해결하다 보면 보람을 느꼈고, 그러다 보면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냥 그런 소소한 일들에서 용기가 생겨요. 내 손으로 밥을 해 먹고 월세를 내고 하면서. ‘아, 나 조금은 성장했다.’ 하는 기분. 물론 고도결 씨는 부회장님이니까 이런 제 기분을 절대 모르겠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제 생활을 잘 만들어 가는 것에 보람을 느끼며 살아간다.

도결처럼 이미 정해진 삶을 사느라 바쁜 재벌은 느낄 수 없을 감정일 테지만. 그녀에겐 더없이 소중했다.

“거창한 사람이라서 그런 감정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딱히 배울 곳이 없었어요.”

그녀를 바라보는 도결의 눈빛이 지독하게 차분했다. 먼저 말을 꺼낸 재경이 다 민망해질 정도로.

“흠흠. 무시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미안해요.”

그는 자신이 왜 재경에게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알고 싶습니다. 차재경 씨가 느꼈다던 그 감정들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그 순간 재경은 차에서 느꼈던 것처럼 심장이 울렁거렸다. 

“사실, 별것 아녜요. 전 식사 끝나서 먼저 일어날게요.”

붉어진 얼굴로 달아나듯 일어나는 재경을 보면서 도결의 표정이 굳었다.

*   *   *

재경은 거울 앞에서 제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로션을 막 바른 재경의 피부는 촉촉하고 윤기가 났으나, 까칠한 그녀의 표정 탓에 마냥 아름답기만 하진 않았다. 

‘정신 차려. 차재경. 눈만 마주쳤는데 심장이 떨리면 어쩌자는 거야. 이러면 나중에 이혼할 땐 어쩌려고.’

제 얼굴을 노려보면서 마음을 절제하려 했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심장은 여전히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재경은 저를 응시하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좋아할 리가 없지. 그냥 오늘 당한 일이 너무 충격적이라 그런 거야.’

그러고 보면 아까는 도대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주머니 속에 있는 녹음기 단추를 눌렀지만, 사실은 녹음이 제대로 안 되어 있을까 봐 얼마나 가슴이 떨렸는지 모른다. 

도결 앞에서는 괜찮은 척을 했지만, 그가 없었다면 그 안에서 어떤 일을 당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 생각에 도달하자 재경이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후. 일단 본부장이 아침까지 인터뷰 답변을 메일로 보내 준다고 했으니까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

오싹한 기분을 정리하면서 재경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그녀가 겁에 질려서 도망가면, 그다음은 없었다. 

세상은 원래 그렇게 냉정했다. 아무도 그녀를 대신해서 싸워 주지 않는다. 재경은 두려워도 맞서야만 제 자리를 지킨다고 믿었다. 

그때 방문 뒤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재경이 드르륵, 소리를 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밀자 벽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서 있는 도결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를 내려다보며 서 있는 그에게서는 향긋한 비누 향이 기분 좋게 풍겼다. 그 모습이 마냥 야하게 느껴져서 재경의 뺨이 붉어졌다. 

처음부터 그는 재경의 이상형이었다. 잘생긴 얼굴과 큰 키는 말할 것도 없었다. 넓은 어깨에 길쭉한 팔과 다리까지 시선을 안 끄는 곳이 없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건 감히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같이 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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