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설마 차재경 기자님께 가시겠다는 겁니까?”
백 비서는 하나에 꽂히면 끝을 보고야 마는 도결의 성격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래서 차재경 기자를 향한 도결의 관심이 걱정스러웠다.
“그럼 전부 보고받아 놓고 모르는 척 그냥 두라는 겁니까?”
아무리 회사 밖에서 일어나는 인터뷰라고 해도 업무는 업무였다. 괜히 나서서 폐를 끼쳐선 안 된다는 게 백 비서의 생각이었다.
“방금까지 하던 말은 다 잊은 모양입니다? 차재경 씨가 위험할 것 같다고 보고한 건 내가 아니라, 백 비서님인데.”
백 비서는 침을 꿀꺽 삼킨 뒤 눈을 굴렸다.
“그렇다고 당장 쫓아가면 차 기자님이 불편하실 겁니다.”
그러자 도결은 오른손을 들어 반듯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와이셔츠 단추를 푸는 그의 태도에는 답답함과 불쾌감이 드러나 있었다.
“백 비서님.”
“네, 말씀하세요. 부회장님.”
이렇게 차 안이 고요해질 때면 백 비서는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도결은 한참 말이 없다가 손가락으로 툭툭 무릎을 두드렸다.
“인간이 숨길 수 없는 세 가지가 무엇인지 압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백 비서가 서둘러 손가락을 하나씩 펴면서 대답했다.
“가난, 사랑, 재채기 아닙니까?”
간결한 백 비서의 대답에 도결이 눈을 감았다.
혹시 틀린 말을 한 건가 싶어 슬쩍 휴대 전화를 꺼낸 백 비서는 검색창에 그가 물은 말을 다시 적어 보았다. 틀린 건 하나도 없는데 도결의 표정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저… 부회장님,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달칵.
뒷자리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놀란 백 비서가 몸을 틀어 도결을 보았다.
“그건 두고 보면 알겠죠.”
문고리를 잡은 그가 백 비서를 보면서 입꼬리를 싸늘하게 올렸다. 도결이 차 문을 열고 나서는 모습이 보이자, 백 비서가 이마를 잡았다.
사랑이라니. 말도 안 될 말이었다. 사람이 먼저가 아니라 회사가 먼저인 남자가 갑자기 사랑 타령을 하는 게 믿기지 않았다.
“같이 가셔야 합니다! 부회장님!”
어쨌든 백 비서는 도결을 따라 클럽 안으로 향했다. 그를 보필해야 할 의무가 아직 남아 있었다.
* * *
재경은 갑자기 제 앞에 나타나서 흑기사를 자처하는 도결을 보면서 눈을 깜빡였다.
“고도결 씨가 어떻게 여기 있어요?”
당황한 재경의 시야에 들어온 다른 한 사람은 백 비서였다.
본부장이 도결의 멱살을 잡으려 들자, 백 비서가 제 몸을 날려 도결의 앞을 가로막았다.
“위험합니다! 으윽.”
도결은 저를 밀치고 멱살을 잡힌 백 비서를 보면서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혹여라도 그가 백 비서의 뒤로 숨는 모습으로 비쳤을까 봐, 신경이 쓰였다.
갑자기 나타난 그와 백 비서를 보면서 본부장이 멱살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물었다.
“당신들 뭐야?”
성난 본부장의 목소리에 백 비서가 조용히 자신의 재킷 주머니에서 명함 지갑을 꺼냈다. 자신 있게 명함을 주려는데 재경이 막아섰다.
“죄송하지만, 제 일에 끼어들지 마세요.”
“예?”
“어떻게 온 건진 모르겠는데. 제 일에 나서지 말아 달라고 했어요.”
당황한 백 비서가 슬쩍 도결의 눈치를 살피다가 서둘러 대답했다.
“그, 근처에서 회식이 있었습니다. 크흠.”
눈동자를 굴리는 백 비서를 내려다본 고도결 부회장은 재경의 차가운 분위기에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비서란 본래 이런 직업이었다. 순발력이 곧 재능이었다. 백 비서가 스스로 순발력 있었다고 생각하며 우쭐하던 것도 잠시였다.
“요즘은 다들 이런 곳에서 회식하나 봐요?”
도결을 오해하는 재경을 보면서 백 비서가 몸을 움찔하며 손을 흔들었다.
“아닙니다! 절대! 오해십니다.”
당황한 사람은 오직 백 비서뿐이었다.
“그럼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회식은 근처 식당에서 있었습니다. 우연히 들어가시는 모습을 보고 따라 들어왔달까요.”
비 맞은 강아지처럼 바들바들 떠는 백 비서는 안쓰러울 정도로 피곤해 보였다. 재경은 도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도와주려는 마음은 고마워요. 근데 내가 아직 업무 중이라서요.”
백 비서는 평범하지 않은 재경의 태도에 당황해서 부회장의 눈치를 살폈다. 고결한 부회장님 성품에 자존심이 상해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도결은 의외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재경을 응시할 뿐이었다.
“저기, 차 기자님. 위험한 상황인 걸 빤히 알면서 제가 그냥 나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제 직업이 직업인지라.”
백 비서는 나가기 싫어하는 부회장을 위해 멱살 잡힌 채로 나가지 못하겠다 우기는 참이었다.
그러자 재경은 삐딱한 시선으로 도결을 보면서 말했다.
“문 닫고 밖에서 기다려 줄래요?”
도결은 태연하게 나가 달라 요구하는 재경의 말에 본부장을 서늘하게 내려다보았다.
“이런 곳에 끌려오는 게.”
낮은 목소리는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
“진짜 꿈이에요?”
재경은 도결의 질문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올해는 참 더럽게 일이 안 풀리는 해였다. 익명 사이트로 충분히 고통받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또 이런 일이 반복되다니.
“네.”
차가운 표정으로 재경이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도결을 바라보면서 그만 나가 보란 눈빛을 보냈다.
도결은 재경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문밖으로 나갔다. 멱살 잡혀 있던 백 비서가 어색하게 본부장을 보며 웃었다.
“그럼, 저도 이만.”
탁, 문이 닫히자 룸에는 본부장과 재경만 남았다. 비열하게 미소를 짓는 본부장을 보면서 재경이 입술을 씹었다.
“출입증이 중요하긴 한가 봐. 구태여 나랑 남으려는 걸 보면.”
“그래 보인다면 유감이네요. 제가 왜 본부장님이랑 단둘이 남았을까요?”
재경이 은밀하게 묻자, FUK그룹 신일성 본부장이 고개를 기울이며 머쓱하게 웃었다.
“난 지금 차 기자랑 스무고개 할 마음 없어. 출입증이 필요하면 몸으로 한번 표현해 봐.”
“출입증? 필요하긴 하죠.”
단아한 목소리로 차갑게 대꾸하는 재경을 보면서 신 본부장의 표정이 굳었다.
“필요하면 사과부터 해. 용서할 마음은 없지만.”
“재밌네요.”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재경을 보면서 신 본부장이 험악하게 고개를 들었다.
“재미? 야, 내가 죽어도 너 같은 년은 우리 회사에 절대 출입 안 시켜.”
신일성 본부장이 분해서 몸을 부들부들 떨며 이를 갈았다.
재경은 퍽 곤란한 얼굴로 대꾸했다.
“제가 평소에 수전증이 심해서 술을 좀 흘렸는데. 그게 기분이 많이 상하셨나 봐요? 신일성 본부장님.”
“뭐? 수전증? 그걸 변명이라고 해?”
“변명이 아니고 해명인데. 듣기에 따라 다르니, 변명으로 들리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러면서 재경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런 재경을 보면서 신 본부장이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그럼 내 바지는 어쩔 거야? 얼마짜리인 줄은 알아? 기레기 월급으로는 감히 매장에서 구경도 못 해 볼 금액이라고.”
“세탁하시면 영수증 사진 찍어서 주세요. 활동비로 잘 처리하겠습니다.”
“활동비 좋아하네. 새로 사서 청구할 거야. 네년 꼴 보기 싫어서.”
신 본부장은 이런 식으로 재경을 겁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제 입사한 기자 시절이었다면, 재경도 회사에 피해가 될까 두려워서 맞서는 대신 피하는 길을 택했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재경에겐 이 바닥에서 억지로 길러진 힘이 있었다.
“마음대로 하세요.”
“당장 내일 기사 안 쓸 모양인가 보지?”
재경이 내일 아침 보도 기사를 쓰기 위해선 FUK그룹에서 뿌린 보도 자료를 봐야 했다. 본부장은 그걸 재경에게만 안 건네줄 생각인 모양이었다.
타 신문사에선 전부 다 나오는 기사가 한 곳에서만 나오지 않는다면 간단한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이제 좀 주제 파악이 되는 거야?”
“네. 덕분에 주제를 좀 금방 깨달았네요. 내일 기사는 걱정하지 마세요. 벌써 FUK그룹 기사 자료는 전부 확보했으니까.”
당당한 재경의 태도에 본부장이 이를 갈며 턱을 위로 높이 올렸다.
“누굴 속이려고. 나 신일성이야. 보도 자료 나한테 있어. 너한테 넘겨줄 수 있는 직원은 없었단 뜻이야.”
“제가 보도 기사라고 했었나요? 내일 전 보도 기사 말고 발제 기사로 쓸 거예요.”
“뭐? 발제 기사?”
재경이 조용히 주머니에서 손바닥 길이만 한 녹음기를 꺼냈다. 낡은 녹음기의 버튼을 누르자 신일성 대표가 재경에게 ‘아가씨’라는 발언을 하는 것부터 전부 녹음이 되어 있었다.
“본부장님께서 보도 자료를 주지 않으셨으니까, 제 선에서 알아서 정리하겠습니다. ‘F그룹 본부장 A씨, 지속적으로 성희롱하고 다녀.’ 이 정도 선으로 발제 기사 쓰는 게 더 유익할 것 같아서요.”
“그게 지금 무슨 개소리야?”
본부장은 술에 취해서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모양이었다.
“술에 취해서 소리가 잘 안 들리셨다면, 내일 아침에 기사로 직접 보셔도 괜찮아요.”
상황은 금세 역전되었다. 거들먹거리던 신 본부장도 회사에 이 일이 알려질 게 두려웠는지, 말투나 표정 따위가 온순해졌다.
“아이, 차 기자도 참. 내가 그냥 신고식 좀 한 거 가지고. 너무 안 받아 준다. 미안해. 발제 기사는 무슨 발제 기사야. 집에 가서 보도 자료 바로 보내려고 했는데.”
재경은 떫은 표정으로 신 본부장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더 싸울 생각은 없는지 시선을 돌렸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보도 자료.”
그녀가 문을 열자 본부장은 주먹을 꽉 쥐었다. 재경을 기다리고 있던 도결이 고개를 비스듬히 꺾어 본부장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 본부장의 등이 오싹해졌다. 낯익은 얼굴. 본부장은 어쩐지 잊어선 안 될 사람을 잊은 기분이 들면서 불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