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그들이 원하는 건 고작 잔에 술을 따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마치 재경이 별것 아닌 일을 못 해 준다는 듯이 굴고 있었다.
진짜 미꾸라지는 재경이 아니라, 인터뷰를 망치는 저들인데. 재경은 주먹을 쥐고 파르르 떨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술만 따라 드리면 되나요?”
재경이 유하게 웃으니, 그들도 조금 태도를 바꿨다.
“아, 거참. 뭘 그렇게 따져.”
“제가 술만 따라 드리면, 출입 기자로 잘 등록되는 거죠?”
“아. 그렇다니까.”
본부장이 못 믿겠으면 그만 가 보라는 태도로 재경을 보았다.
재경은 그런 신일성 본부장의 툭 튀어나온 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픽 웃었다.
“FUK그룹은 일을 이런 식으로 하나 보죠?”
재경은 신입 기자가 아니었다. 메인 기사를 쓸 만큼 일에 능숙한 사람이 그녀였다. 그들의 갑질을 고분고분 받아 줄 의향이 없는 재경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뭐라는 거지? 지금?”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신일성 본부장님은 원래 이렇게 보도 자료를 주시나요? 늦은 밤 클럽에서 술을 따라야만 주는 보도 자료라면, 제가 굳이 타이핑을 해야 하나 싶어서요.”
재경은 본래 그런 사람이었다. 강한 사람에게는 이를 드러내고, 약한 사람에게는 손을 내미는 이중적인 사람.
경쟁 사회에서 이런 성격은 백 프로 손해를 본다는 건 재경도 잘 알고 있었다. 빤히 알면서도 매번 이런 행동을 하고야 말았다.
“오. 필요 없으면 돌아가면 되겠네. 가. 다른 신문사에 다 나가는 보도 자료. 거기만 없어도 괜찮으면 가세요.”
은근한 협박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출입 구역에서 취재를 못 하면 손해를 보는 건 출입증을 가지고 있는 기자였다.
재경은 본부장의 오만한 태도를 보면서 미간을 구겼다.
“이유리 기자한테도 그런 식으로 말하셨나요? FUK그룹 출입은 절대 못 하겠다고 항의하던데.”
겁대가리 상실한 재경의 태도에 본부장이 술잔을 들어 술을 비웠다. 그러고는 비열하고 역겹게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차 기자, 나도 듣는 귀가 있어. 신입 기자가 버린 출입증 주워서 여기까지 왔으면, 뭐라도 해 봐야 할 것 아냐. 자존심 없어?”
“지금 제 자존심 걱정하셨어요?”
“그래. 듣자 하니, 찌라시도 돌던데? 한서일보는 원래 여 기자들이 침대 영업을 한다고. 그럼 나도 가능한 거 아냐? 침대에선 나도 꽤 자신 있는데.”
나이도 많은 유부남이 뻔뻔한 얼굴로 개소리를 했다.
재경은 이런 치욕스러운 모욕을 듣고도 꾹꾹 참아야 하는 제 상황이 분했다. 이를 악물고서 조용히 양주병을 잡은 재경이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표정 좀 풀어라. 술맛 떨어진다.”
그녀가 본부장을 향해 몸을 기울이자, 옆에 있던 네 명의 사내가 슬금슬금 룸을 빠져나갔다. 재경이 그들이 나가는 것을 슬쩍 바라보다가 병을 빈 잔에 기울였다.
“유감스럽지만, 저는 제가 기자라는 사실이 좀 많이 자랑스러워요.”
재경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며 술을 따랐다.
그녀가 하는 말에 전혀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신일성 본부장이 히죽 웃었다. 신 본부장의 음탕한 시선은 벌어진 그녀의 블라우스 사이를 향하고 있었다.
“나도 내가 참 자랑스러워. 이 나이 먹고 젊은 여자들 술 받아먹는 게 쉽지는 않잖아?”
변태 같은 말에 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술을 계속해서 따랐다.
신일성 본부장은 제 술잔에 술이 넘쳐 테이블에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그녀의 가슴을 힐끗거렸다.
재경은 양주가 콸콸 넘쳐 신일성 본부장의 바지를 전부 적실 때까지 병을 기울였다.
콸콸콸.
“아악!”
차가운 액체가 바지를 홀딱 적시자, 그제야 놀란 신일성 본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재경은 슬쩍 몸을 뒤로 옮기며 시원하게 웃었다.
“미친 거야? 너 우리 회사 출입 안 하고 싶어?”
“하고 싶죠.”
“이게 지금 하고 싶은 사람의 태도라고 생각해?”
신일성 본부장의 말에 재경이 웃었다.
“허락할 마음이 애초에 있긴 하셨어요?”
“뭐?”
“처음부터 다른 것에 관심이 많아 보이시더라고요. 술값을 전부 계산하라고 하면 어쩌나 겁이 나긴 했는데. 대놓고 성희롱이라니. 재밌지 않아요?”
재경이 가소롭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신 본부장은 화가 났는지, 그녀에게 성큼성큼 걸어가 손을 뻗었다.
한 대 맞는 것까지는 생각 못 했지만, 그렇다고 물러서진 않았다. 맞으면 합의를 안 해 주면 그만이었다.
퍽.
분명히 둔탁한 소리가 났는데. 재경은 조금도 아프지 않고 멀쩡했다. 놀란 재경이 고개를 들었을 때, 코트를 벗으며 신일성 본부장을 발로 밟고 있는 도결이 보였다.
* * *
몇 시간 전.
“부르셨습니까? 부회장님.”
표정이 안 좋은 도결을 보면서 비서 실장인 백 비서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자신이 혹시 놓친 보고서가 있었는지 머릿속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결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방금 아내와 통화를 했는데.”
“아내요? 크흠. 사모님께서 전화하셨군요.”
당황하던 백 비서가 빠르게 입을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처리할 일이 회사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오늘 갑자기 일이 생겨서 늦는다고 하더군요.”
“뭐.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저도 항상 야근하고 있습니다. 부회장님.”
“밤 9시에 인터뷰를 하는 게 일반적입니까?”
그의 서늘한 물음에 백 비서가 슬픈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백 비서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부회장의 눈을 본 순간 본능적으로 알았다. 오늘도 야근 확정이 분명했다.
“일반적이진 않지요. 부회장님만 해도 인터뷰어와 일이 생겼으니까요.”
그렇게 뱉은 백 비서 때문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도결은 당황해서 허둥지둥하는 백 비서를 매섭게 바라보면서 미간을 구겼다.
“백 비서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건, 역시 좀 위험성이 있어 보이는데.”
“예?”
“FUK그룹 신일성 본부장을 한정식집에서 만난다고 하더군요. 알아봐요. 왜 하필 오후 9시에 한정식을 먹는 건지.”
“지금요?”
백 비서가 당황해서 그를 보았다. 회사에서 따로 개인적인 일을 시킨 적 없는 고도결 부회장이었기에 백 비서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는 게 당연할 만도 했다.
“지금이 아니면? 내년에 알아볼 생각입니까? 그래요?”
도결의 불안한 태도에 백 비서는 무언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혹시 사모님이 인터뷰하다가 부회장님을 만난 것 때문에 불안하십니까?”
그가 움찔거리자, 백 비서가 눈을 깜빡였다. 그냥 단순히 계약 결혼이라고 들었는데 고 부회장의 태도는 진짜 사랑하는 부부 사이처럼 보였다.
“하아, 내가 그렇게 속이 좁아 보여요?”
“아니면… 어떤 이유일까요?”
“그런 곳에서 사진이라도 찍히면 곤란하잖습니까. 진성그룹에 불똥 튀어 좋을 것이 없잖습니까.”
백 비서는 도결의 말을 듣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안 그래도 기자들 사이에서 재경이 침대 영업을 한 기자라고 찌라시가 도는 상태였다. 곤란하다는 보고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으니 도결의 걱정이 과한 건 아니었다.
차 기자가 괜히 술에 취해서 엉뚱한 곳에서 사진이라도 찍히면 진성그룹이 다시 언급되는 건 당연했다.
“네. 바로 보고 올리겠습니다.”
도결은 백 비서가 나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주먹을 쥐었다. 재경의 겁 없는 태도가 묘하게 거슬렸다.
늦은 밤 9시에 남자랑 만나는 게 불편하지도 않은가? 그러다 지난번 자신과 엮인 것처럼 재수 없게 엮이면 어쩌려고.
“하여튼 겁이 없어.”
그는 해가 지고 있는 창문을 바라보면서 미간을 구겼다. 아직 9시가 되려면 한참이나 남았는데, 재경의 전화를 받은 이후로는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우리도 저녁은 한정식으로 하지.”
도결의 말에 경악하는 백 비서였다.
* * *
그는 도람 한정식 앞에서 오후 7시부터 대기하고 있었다. 평소에 길에서 차가 막히는 것도 질색하던 도결이 일부러 차 안에서, 무려 2시간이나 대기를 하고 있으니 백 비서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부회장님. 사모님 오셨습니다.”
백 비서가 재경을 언급하자 도결이 고개를 기울이며 창문을 열었다. 9시가 되기 20분 전이었다.
“일이 뭐 그렇게 중요하다고.”
그가 퉁명스럽게 중얼거리며 재경을 빤히 바라보았다.
무릎까지 오는 정장 스커트를 입은 재경의 다리가 추울 것 같았다. 20분이나 일찍 왔으면 한정식 가게에 들어갈 것이지. 서성이며 전화기를 잡고서 쩔쩔매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아, 지금 차 비서한테 메일이 왔습니다. FUK그룹 신일성 본부장은 여색을 즐긴다고 하네요.”
“그럼 그렇지.”
그가 거칠게 넥타이를 풀며 목을 기울였다. 도결의 모습이 흐트러진 적이 몇 번 없었기에 백 비서는 백미러로 그를 힐끗 바라보다가 침묵했다.
“더 해 봐요.”
“원래 다른 기자가 맡은 업무인데, 오늘 사모님께서 직접 하겠다고 나선 모양입니다.”
“어째서?”
그가 되묻자, 백 비서가 당황했다. 차재경 본인이 아닌 이상 따로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백 비서가 답하지 못하고 조용해지자, 그가 손가락으로 재경을 가리켰다.
“차재경 씨가 왜 갑자기 방향을 바꾸는 거지?”
“아, 어제 클럽으로 출입 기자를 불렀다고 합니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 기자가 오늘 아침에 FUK그룹으로 출입 못 하겠다고 해서 사모님이 맡게 된 것 같습니다. 클럽 방향 같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차재경 씨가 날 두고 클럽을 간다고 보고하는 건가요?”
미묘하게 의미가 달라진 고도결 부회장의 말에 백 비서가 눈을 깜빡였다.
다른 재벌들은 결혼하고도 여자를 끼고 술을 마신다는데 제가 모시는 고도결 부회장은 미혼일 적부터 여자를 만난 일도 없었고, 쓸데없이 술을 마신 적도 없었다.
흔한 회식에서도 예의상 몇 잔 받는 정도였으니까. 이런 문화가 익숙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원래 이런 일 저런 일 생기기도 하고 그렇잖습니까?”
백 비서는 왜 자신이 차재경 기자를 옹호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차 기자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고 부회장을 진정시키는 게 백 비서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백 비서가 변호할수록 고도결 부회장의 표정은 더 안 좋아졌다.
“그러니까 백 비서 말은 사회생활하는 사람들은 배우자를 두고 유흥업소에 들락날락해도 된단 뜻입니까?”
의미가 참 절묘하게 변했다. 백 비서는 더는 자신이 나설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빠르게 기권을 선언하며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