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60)

<21화>

신문사답게 소문이 순식간에 퍼졌다. 출입증이 없는 기자라는 것도 우스운 상황인데, 후임까지 있는 기자가 돼서 신입 기자가 버린 출입증을 주워 쓰겠다고 했으니. 뒤에서 수군대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차 기자, 못 본 사이에 유명인 다 되었더라?”

“난 원래 유명했는데.”

갑자기 툭 튀어나온 윤서희를 보면서 재경이 애써 이를 악물고 웃었다. 

약 올리기로 작정을 한 윤 기자의 미소를 보니 뒷골이 당겼다. 

윤 기자로 말할 것 같으면, 재경의 동기이자 앙숙이었다. 거기다 얼마나 일을 악바리처럼 하는지. 

재경은 윤 기자랑 있으면 항상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치, 라인을 좀 잘 탔어?”

도결과 결혼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재경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한서일보에서 초고속 승진한 김 부장님 라인 말 하는 건가?”

씩 웃는 재경을 보면서 윤 기자가 입술을 삐뚤게 올렸다.

“설마. 그런 뜻일까?” 

“멋대로 생각해.”

“쯧. 요즘 기자들 참 걱정이야. 기자가 기사를 써야지. 왜 추문을 만들고 다닐까? 같은 기자지만, 기레기 소리 왜 나오는지 알 것 같아. 침대 인터뷰 같은 건 용납하면 안 되는 일이잖아. 안 그래, 차 기자?”

지금까지 김주혁 부장의 라인을 타고 잘나가던 재경이 고꾸라지는 모습을 보니 몹시 통쾌한 윤 기자였다. 

재경은 부드럽게 자신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

“하기야, 윤 기자는 기레기가 뭔지도 모르겠다. 기레기란 악플도 못 받아 봤잖아? 기사 쓰면 매번 조회 수가 손가락 열 개로 다 셀 수 있을 정도라며?”

재경의 눈빛에는 겁이 없었다. 오직 승부욕에 불타 있었다. 

윤 기자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부채질하며 어이없단 말만 되풀이했다. 이로써 입씨름은 재경의 승리인 셈이었다. 

씨익 웃는 재경이 얄미운지 끝내 윤 기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출입처 하나 주워서 기분 좀 우쭐한 모양인데. FUK 출입증은 독이 든 성배나 다름없어!”

순간 재경은 싸한 기분을 느꼈다. 구린내가 나는 출입증이라는 걸 짐작했지만, 그 사실을 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출입증이 없으면 쓸 기사가 없었다. 기자가 기사를 안 쓰는 건 말도 안 될 일이고. 각오는 충분히 되어 있었다.

“윤 기자, 자기 출입증이나 잘 챙겨. 나중에 나한테 빼앗겼다고 울지 말고.”

재경은 끝까지 윤 기자와 맞섰다. 출입증 좀 빼앗겼다고 움츠러들고 싶지 않았다.

*   *   *

이유리 기자에게 전달받은 정보는 생각보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오히려 이런 실력으로 왜 인터뷰를 못 하겠다고 우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될 정도였다. 

재경은 간단하게 인터뷰 내용을 암기하고는 시간을 확인했다. 애매한 시간에 인터뷰하게 될 줄은 몰랐던 터라 도결에게 미리 전화를 걸어야만 했다.

‘전화는 처음 거는 것 같네.’

연결음이 가는 동안 재경은 심장이 뛰었다. 혹시라도 도결이 자신의 전화를 받고 불편하게 생각할까 봐 걱정도 됐다. 끊을까 고민했지만 조금 더 연결음을 기다렸다. 

그래도 제법 가족 같은 사이인데. 늦으면 늦는다고 언질은 해야 할 것 같아서 끊기 싫었다. 이상하게 통화음이 길어질수록 재경의 심장이 점점 더 빠르게 뛰는 기분이었다.

[여보세요.]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재경은 전화를 잘못 건 아이처럼 화들짝 놀랐다. 휴대 전화로 듣는 도결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더 다정해서 당황스러웠다.

‘기계음과 섞여 들려서 그런가?’

애매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던 재경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나예요. 차재경.”

[…무슨 일 있어요?]

“딱히 일이 있는 건 아닌데.”

괜히 전화를 건 게 아닌가 싶어서 멋쩍어졌다. 그런 재경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웃었다.

[이런 전화 좋네요. 자주 해 줘요.]

“크흠. 오늘 밤 9시에 인터뷰가 있어서 좀 늦을 것 같아요. 기다릴까 봐… 했어요.”

[고마워요. 내 생각 해 줘서. 그런데… 무슨 인터뷰길래, 밤 9시에 해요?] 

그의 질문에 재경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이렇게 늦은 시간에 하는 인터뷰는 처음이라 의아한 상황이었다. 

FUK그룹 담당 직원이 뭐라도 된 것처럼 으스대며 약속을 멋대로 잡아 버렸다.

“잘 모르겠어요. 일단 급한 일 같아서 가 보려고요.”

출입처가 있는데 왜 따로 외부에서 만나는 건지, 재경도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긴 했다. 메인 기사는 아니지만, 외면할 수는 없었다. 

보도 자료를 주면 보도 기사를 잘 써야 하는 게 기자였다. 일단 회사와 우호 관계를 만들어야 그다음으로 나아갈 기반이 되는 것이었다.

[…인터뷰는 누구랑 어디에서 하는 건지 물어봐도 됩니까?]

형식적인 목소리였는데, 재경은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까지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던 말이었다. 다들 특종에만 관심이 있지 재경이 어디에서 누구랑 만나는지는 묻지 않았다.

“외조는 됐어요. 그냥 간단히 저녁도 먹고 들어갈 것 같아요.”

[남편으로서 재경 씨한테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말 진심이었는데. 알려 주면 안 돼요?]

“부부 사이에 이런 걸 공유하던가요?”

[내가 재경 씨 법적 보호자잖아요. 인터뷰하다 도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경찰서에 참고인으로 조사를 가야 하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청산유수였다. 재경은 그의 말이 일부 맞다고 판단해 문자로 주소를 남겼다.

“만일을 대비한 거지. 절대 찾아오지 말아요. 엄연한 직장이니까.”

재경은 인터뷰 중에 일이 생긴 적이 없었다. 고도결 부회장의 인터뷰. 그때를 제외하고는 전부 무난하게 인터뷰를 끝내 왔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별일이 없을 것 같긴 한데….

[저도 직장 꽤 다녀 봐서 압니다. 부담될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요.]

*   *   *

첫 시작부터 이상하다는 의심을 했어야만 했다. 한정식집을 장소로 보내길래 별일 없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재경이 도람 한정식 앞에서 한참을 기다렸는데, 돌연 장소가 바뀌었다며 문자 하나가 띡 소리를 내며 도착했다. 우습게도 급하게 옮겼다던 장소는 GR클럽이었다. 

‘왜 갑자기 클럽으로 오라는 거지? 수상한데.’

정장을 입고 있는 재경은 클럽에 입장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입장 불가능하다는 남자의 말에 재킷을 벗어 가방에 욱여넣고 블라우스 단추를 몇 개 풀고서 겨우 들어왔다. 

‘룸까지 잡았어?’

그 순간 재경은 이유리 기자가 뒤늦게 따라와서 꺼낸 말이 떠올랐다. 

FUK그룹 신 본부장을 만날 땐, 꼭 남자 기자를 대동하라고 했었다. 자세한 말은 아꼈지만, 딱히 그녀를 도와줄 남자 기자는 없었다. 

재경과 유일하게 친한 남자였던 주혁에겐 같이 가잔 말을 꺼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설마, 별일 있겠어? 후.’

재경이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땐, 혼자 남아 있다던 본부장은 여러 사람과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여. 아가씨가 바뀌었네?”

처음에는 ‘아가씨’란 말을 듣고 당황했다. 술에 만취해서 헛소리하는 게 아닌가 싶어 참았더니, 두 번쯤 더 ‘아가씨’란 호칭으로 재경을 불러 댔다. 명백한 성희롱이었다. 

룸 안에는 남자 다섯과 재경이 전부였는데. 이들 중 이 상황에 문제를 제기할 사람은 없어 보였다. 

지금 이 자리에서 아가씨라고 불릴 만한 성별을 가진 사람은 오직 재경뿐이었다. 온몸이 뜨거워지면서 분했으나, 재경은 차분하게 명함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안녕하세요. 한서일보 차재경입니다.”

“지난번 젊고 탱글탱글한 아가씨는 어디 가고?”

“이유리 기자의 FUK그룹 출입증이 제게 넘어와서요.”

재경은 일부러 딱딱한 태도로 차갑게 대답했으나, 그들의 태도는 여전히 저질이었다.

“오. 눈빛이 섹시한 게 마음에 들어. 지난번에 이 기자는 여기서 막 질질 짜던데 말이야.”

소파 중앙에 앉아서 어두운 주황색 술이 담긴 잔을 쥔 사내가 말했다. 아무래도 저쪽이 FUK그룹 본부장인 모양이었다. 

“벌써 많이 드셨나 봐요. 제가 섹시랑은 거리가 아. 주. 먼 스타일이라서요.”

재경은 거울 속에서 수천 번 연습했던 자본주의 미소를 활짝 지으며 본부장을 보았다.

“이제 시작인데. 아, 여기 합석 괜찮지? 두루두루 알면 좋잖아.”

재경이 떨떠름한 눈으로 부장을 바라보았지만, 그들은 재경이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재경은 가방을 꽉 쥐고 이를 악물었다.

“술자리가 있으신 줄 알았다면, 일정을 미뤘을 텐데요.”

“허어. 한서일보는 원래 그렇게 융통성이 없나?”

“융통성이요?”

그 순간 자본주의 미소를 장착하고 있던 재경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유진 기자가 왜 ‘남자’ 기자로 바꿔 달라고 요청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왔으면, 뭐라도 좀 하고 가야 할 것 아냐.”

재경은 눈을 깜빡이며 저를 향해 개소리하는 부장을 바라봤다. 신입 기자가 맡기에는 너무 저질스러운 부류였다. 

모든 회사가 이따위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버럭 화를 내기는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재경이 가진 출입증이라고는 고작 FUK그룹 것뿐인데 기회를 통으로 날릴 수는 없으니 퍽 난감했다. 

“술은 좀 힘들 것 같습니다. 시간이 늦어서요.”

“옛날에 기자들 전부 술 먹고 기사 쓰고 그랬어. 퇴근하고 마시자는 건데. 뭘 그렇게 유난이야?”

재경이 술을 거부하자, 좋은 분위기를 흐리는 사람이 마치 재경인 것처럼 몰아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몸이 좀 안 좋아서요.”

“아, 거참. 바빠서 싫다는데 보자고 난리를 쳐서 할 수 없이 그러라고 했더니만.”

재경은 부장의 말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화를 내지 않고 점잖게 고개를 끄덕였다.

“편의를 봐주셨는데. 몰랐군요.”

재경은 단 한 번도 부장에게 밤에 보자고 한 적 없었다. 

그러나 재경은 반박하며 따지는 대신 두 다리에 힘을 주고 곧은 자세로 서서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본부장님도 너무 무르셔서 탈입니다. 그냥 잔에 술 정도는 따를 수 있잖아. 그게 뭐 그렇게 어렵다고.”

“하여튼 여자들은 전부 미꾸라지 같단 말이야. 뭐만 하면 이래서 안 된다, 저래서 안 된다 하면서 싫다고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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