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새벽,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은 조용했다. 제사가 끝나고 재경은 피곤하단 핑계로 도결의 어깨에 기댔다.
차 안에서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재경은 그런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실은 고 회장이 재경을 본가로 부른 이유는 제사 때문이 아니었다. 하필 제사하는 날이라 하춘의 손에 붙들려 본가에 더 오래 머물렀을 뿐이었다. 이 점은 재경도 고맙게 생각했다.
혼자 집으로 갔다면, 늦은 도결을 두고 온갖 상상을 했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가짜라고 해도 그는 자신의 남편이었다. 법적인 부부가 된 이상 다른 사람을 만나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게 욕심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지금은 그와 진짜 부부로 알려지고 싶었다. 그에게서 느끼는 모든 감정을 전부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몇 시간 전.
고 회장은 재경을 서재로 불렀다. 갑자기 나타난 재경을 보고 놀란 하춘이 따라나섰지만,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1년 뒤에 이혼해야 하는 건 잘 알고 있겠지?”
“알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1년간 부부 사이로 지내는 것이 계약 조건이었다. 그 내용이 지금 와서 갑자기 바뀐 것도 아닌데 재경은 묘한 서운함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고 부회장은 곧 진성그룹의 회장이 될 사람이야. 애초에 일반인과 결혼하는 게 터무니없는 행보야. 자네가 잘 알 테지.”
재경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재벌들은 본래 결혼을 비즈니스처럼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매년 그런 기사를 1회 이상 쓰는 재경이 모를 리 없었다.
“하고 싶은 말씀은 그게 전부일까요?”
그녀는 깔끔했다. 딱히 더 기간을 연장할 마음도 없었고, 결혼 생활이 불편하니 먼저 계약을 해지해 달라는 부탁을 할 이유도 없다.
초반에는 갑작스러운 결혼이 황당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재벌들의 논란에 대해 세상은 예민하게 반응했고, 재경과 도결 역시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큰 비난을 받았을 게 분명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와 결혼한 것이 다행이었는지도 몰랐다. 자칫하면 재경만 이상한 사진으로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1년 뒤에 이혼하면 한서일보 한은화 차장과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지.”
한은화 차장이라면, 재경도 좀 알 것 같았다. 한서일보 회장님 딸이라는 소문을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보통 신입 기자는 조인트 까이는 사회부에서 몇 년 구르다가 부서 이동을 하는데. 한 차장은 처음부터 정치부에 들어갔던 신입 기자였다. 이미 그때부터 다른 사람들과 길이 다르다는 걸 눈치챘지만, 몇 년 안에 차장까지 될 줄은 아무도 예상 못 했었다.
“그런데.”
고 회장의 말에 재경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재경은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 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함께 떠드는 토론보다는 조용히 인터뷰하는 쪽에 더 재능이 있단 뜻이었다.
“크흠. 고 부회장이 미래 사돈 될 분께 결례를 저질렀더군.”
“결례요?”
재경이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들자, 고 회장은 입을 닫았다. 고 회장은 재경을 떠보려는 듯이 표정을 살폈지만, 그녀는 큰 감정 변화 없이 이성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지금 그 일이 저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직설적으로 묻는 재경을 보면서 고 회장이 불편한 듯 목을 좌우로 움직였다.
“자네 사진을 지우겠다고 한서일보 본사까지 다녀왔다던데. 진짜 몰랐던 일인가?”
“고도결 씨가 한서일보를 다녀왔다고요?”
도리어 놀라는 재경을 보면서, 고 회장이 허탈하다는 듯이 웃었다. 재경의 부탁을 받고 움직인 줄 알았는데 반응을 보니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죠? 그 일이 어떻게 해결된 건가요?”
갑자기 질문이 많아진 재경을 보면서 고 회장이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러고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일은 자네와 나만 아는 것으로 하세. 고 부회장에게 엄한 부탁은 하지 않는 게 좋다고 하려던 말이었네.”
“그럼요. 남에게 쉽게 얹혀가는 성격 아닙니다. 걱정 마세요.”
그렇게 일이 끝났지만, 재경은 궁금한 것들이 많이 남았다. 아이피 추적과 관련된 일이라는 짐작이 들었지만, 이걸 따로 물을 수는 없었다.
‘한서일보 내부에서 사진을 올린 게 분명해. 그래서 확인하러 간 걸까?’
재경은 온갖 생각을 머리로 굴리면서도 그에게 티를 내지 않았다. 고 회장의 말처럼 미래에 진짜 그의 가족이 될 사람들과 엮인 일이라면, 그에게 부탁해선 안 될 것 같았다.
* * *
수요일 아침.
“아, 글쎄. 출입증이 바뀌어서 못 들어가신다니까요.”
재경은 늘 입장했던 회사 입구에서 출입이 불가하다며 경비에게 붙잡혔다. 당황스러워서 자신을 모르느냐고 물었더니 누군지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출입증이 바뀌었기 때문에 본사에서 다시 받아 오란 말만 되풀이했다.
“차 기자, 같이 들어가자.”
늦게 나타난 타 신문사 기자의 인사말에 재경이 반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 오늘 갑자기 출입증이 바뀌었다는데 어떻게 된 거예요?”
재경의 질문에 타 신문사 기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겠네. 한서일보에서 바꾼 것 아닐까? 전화해 봤어?”
“아니요. 먼저 들어가세요.”
그렇게 전화를 건 재경은 황당해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회사에서 갑자기 출입증을 반납하라는 말이 이어진 탓이었다. 기자에게 출입증을 반납하라는 말이 어떤 뜻인 줄 모르는 사람은 기자 중에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재경은 한서일보 본사로 급하게 향했다.
“부장님 안에 있어요?”
화난 재경이 묻자,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분명 닫힌 부장의 사무실 안쪽에서 소리가 나는 게 들리는데.
“점심 드셨어요? 시간이 곧 점심시간이네요.”
나름 머리를 써서 재경을 점심 핑계로 데리고 나가려는 모양이었다. 어림도 없었다.
“나 출입증 전부 막혔던데 부장도 아는 모양이네요?”
멀쩡히 입장이 가능했던 회사가 돌연 출입증이 바뀌었다면서 거부했다. 그리고 나타난 건 한서일보의 다른 남자 기자였다. 이 바닥에서 사람 하나 바보 만드는 건 일이었다. 회사 한번 다니기가 이렇게 어려웠다. 이제 좀 다닐 만하려니까, 다시 또 일이 생기는 걸 보면 그랬다.
이렇게 쉽게 회사에서 잘릴 거였으면, 고 회장에게 큰소리칠 일도 없었다. 재경은 성큼성큼 걸어가 경제부 부장의 사무실 문을 활짝 열었다. 부장은 전화를 받고 있다가 재경을 보고 눈이 커졌다.
“무슨 일이야?”
작은 입 모양으로 묻는 부장의 말에 재경이 미간을 구겼다.
“제가 묻고 싶은 말인데요. 부장님.”
“그럼, 제가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네.”
전화부터 서둘러 끊은 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옮겨 앉았다. 그러고는 재경에게 와서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출입하던 회사에서 출입 거부당했어요. 본사에선 출입증 반납하란 연락을 받았고요. 어떻게 된 거예요?”
재경의 질문에 주혁이 난감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말한다는 걸 깜빡했다.”
“깜빡할 일이 따로 있지. 이렇게 심각한 상황을 왜 말 안 해 주셨어요? 회사에 무슨 일 있는 건가요?”
“그런 건 아니고.”
말하기가 조심스럽다는 듯이 그가 재경의 눈치를 살폈다. 그를 짝사랑하던 때였으면, 재경이 먼저 괜찮으니까, 아무 말이라도 해 보라며 타일렀을 테지만. 지금은 그때와 완전히 달랐다.
“선배는 경제부 부장이잖아요.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 그에 맞는 행동을 하셔야죠. 제가 출입하던 회사에서 한서일보 이미지가 어떻게 될지는 생각 안 하세요?”
재경의 당돌한 말투에 주혁이 흠칫 놀라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은 기사 쓰기 힘들 것 같다. 위에서 출입증을 전부 막았어.”
“그럼 앞으로도 계속 출입증을 안 주시겠단 말씀이세요? 왜요?”
눈을 부릅뜨고 묻는 재경을 보면서 주혁이 한숨을 쉬었다.
“익명 게시판 문제 때문인 것 같은데.”
“이미 해결된 문제예요. 사이트 터졌어요.”
“나도 모르겠다. 이미 그렇게 결론이 내려진 걸 번복할 수는 없잖아.”
머리가 터질 것 같단 표정으로 주혁이 인상을 썼다. 언젠가 이런 선배의 모습이 가엽고 안쓰러웠던 적이 있었다. 선배보다 더 약하고 힘없는 자신이 그를 위해 무엇이라도 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콩깍지가 완전히 벗겨져 버린 것인지. 주혁의 그런 태도들이 몹시 초라하고 볼품없어 보였다.
“사표라도 내란 거예요? 어떻게 늘 이렇게 한결같이 무책임하세요?”
“무슨 말을 그렇게까지 해?”
“제가 틀린 말 했어요? 잘못된 문자가 온 것도, 익명 게시판에 올라온 사진도 전부 다 저만 피해 보고 있잖아요. 선배는 늘 한 걸음 물러서서 아무것도 안 하고 계시죠. 오늘처럼.”
주혁에게 쓴소리하는 건 처음이었다. 원망과 분노가 뒤섞여서 이게 주혁을 위한 말인지, 자신을 위해 하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정확한 건, 이젠 주혁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쾅.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한 기자가 문을 과격하게 열고 들어왔다. 아이라인이 전부 번진 눈으로 주혁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모습이 좀 이상했다.
“흐읍. 경제부 이유리 기자입니다.”
눈물로 몸이 떨리는 것을 겨우 참아 내면서 뱉은 말이 자기 이름 소개였다. 재경은 자리에서 버티고 서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자리를 슬쩍 피하려고 했는데. 이유리 기자가 돌연 재경의 팔을 꽉 잡았다.
“잠시만 같이 있어 주세요.”
“저요?”
놀란 재경이 자신을 가리키며 묻자, 이유리 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지금 남자랑 밀폐된 공간에 같이 있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뱉는 이유리 기자를 보면서 재경이 침을 삼켰다. 같은 여자로서 외면하고 갈 순 없을 것 같아 주혁을 보았다.
“그래도 될까요? 부장님?”
재경의 물음에 주혁도 당황한 눈으로 이유리 기자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요.”
“저는 FUK그룹 보도 기사 포기하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이유리 기자의 말에 재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서일보를 오래 다녔지만, 이런 혼란스러운 일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멋대로 출입증을 빼앗는 것도, 기자의 개인적인 이유로 출입증을 반납하는 것도 전부 처음 보는 일이었다.
“이미 배정 끝난 일이라, 못 바꿔요. 이유리 기자.”
주혁이 온화하게 달래듯 말했으나, 이유리 기자는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저는 죽어도 못 하겠습니다.”
“그렇게 갑자기 감정적으로 못 하겠다고 통보하면 내 입장이 좀 난처한데.”
“…보도 자료를 넘겨주지 않아서 기사를 쓸 수 없습니다.”
“그렇군요. 당장은 대타 구하기가 힘들 것 같은데. 어쩌죠?”
“단 하루도 더 못 하겠습니다. 부장님.”
단호한 이유리 기자의 목소리에 주혁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재경은 물끄러미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슬쩍 손을 들었다.
“제가 맡겠습니다. 그 기사. FUK 출입증 저한테 주세요. 제가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