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아무도 그에게 오만하다고 말한 적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다들 진성그룹 후계자인 그가 얼마나 잘 해내는지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한 번의 실수라도 하면, 뒷말이 시끄럽게 오고 가는 세상이었다. 적어도 그가 사는 세상은 그랬다.
“오만입니까?”
그가 픽 웃으면서 읊조리자, 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어린이는 어린이답게 순수해야죠.”
“어린애답게 자라진 않았던 것 같네요.”
도결은 진성그룹 후계자로 자라 왔다. 그가 평범한 어린이였던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았다.
“이런 말 하면 좀 그렇지만, 다른 애들 기분이 어땠겠어요? 이 상장들을 만들 때 고도결 씨만 주려고 만든 게 아닐 텐데.”
단 한 번도 재경처럼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부담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모두가 그를 특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그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완벽하지 않았다. 타인의 기대에 어긋나는 결과를 만들면, 그의 뒤에는 늘 질책하는 사람들이 따라붙었다.
원망 같은 것을 할 시간이 없었다. 그 시간에 그는 무엇이든 완벽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뭐 욕심 많다, 나쁘다 이런 말을 하려던 건 아녜요. 좀 고도결 씨 어린 시절이 퍽퍽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 말이니까. 대충 흘려들어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하며 재경이 휙 상장을 지나쳐 갔다. 그러나 도결의 시선은 재경이 머물렀던 그 자리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의 어린 시절은 재경이 말한 것처럼 퍽퍽하다 못해 꽉 막혀 있었다. 안 되는 것을 되도록 만들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연습을 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달리기하다 심장이 멈출 것처럼 찌릿했었는데. 그때의 그는 ‘쓰러질 거라면 차라리 연습하다 쓰러졌으면.’ 하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사람들 앞에서 망신당하는 건 죽어도 싫었달까.
“어머, 진짜 귀엽다.”
재경이 액자를 만지작거리며 그의 어린 시절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반짝이는 재경을 보니, 사진이 퍽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고도결 씨는 어릴 때부터 잘생겼구나.”
그 순간 도결의 귀가 붉어졌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잘생겼다는 말은 수천 번도 넘게 들은 것 같은데. 재경의 입으로 잘생겼다는 말을 듣자 심장이 뛰었다.
“내 얼굴이 차재경 씨 취향이란 뜻입니까?”
그는 재경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눈빛을 살폈다.
“물론이죠. 완전 제 취향이에요. 아니었다면 그날 그런 일도 없었….”
재경은 갑자기 생각난 첫날밤 때문에 당황해서 눈을 깜빡였다. 도결은 그런 재경의 대답이 마음에 들어서 미칠 것 같았다.
“나도 마음에 듭니다. 내 얼굴.”
얼굴로 그녀를 꼬드긴 게 사실이라면, 그의 얼굴은 제 인생에서 해야 할 일을 다 한 셈이었다.
“하아. 겸손하셔야죠. 진성그룹의 이미지를 생각해서라도.”
“겸손도 위선이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뻔뻔한 그의 대답에 재경이 머뭇거렸다. 사실 그의 얼굴로 겸손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예전에 잘생긴 유명 남자 배우가 자신의 얼굴은 평범하다고 말해 희대의 망언이라 비난받은 적도 있었다. 그의 말처럼 너무 겸손해도 위선으로 보일 수 있었다.
“맞는 말을 했는데, 왜 비호감이 되는지 모르겠네요.”
재경이 투덜거리며, 닫혀 있는 방문을 열었다. 침대가 놓인 방 안은 정말이지 깔끔했다. 재경의 본가에 있는 방은 너무 더러워서 엄마가 치우고 가라고 소리를 지를 정도였는데.
“설마, 청소도 본인이 했어요?”
청소까지 완벽하게 잘하느냐고 묻는 재경의 말에 그가 피식 웃었다.
“청소나 음식은 해 본 적 없어서 잘 못합니다.”
“오. 못하는 게 있었구나. 난 요리하는 건 자신 있는데, 청소는 잘 못해요. 엉성하달까.”
도결은 재경이 편안하게 웃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언제나 회사가 더 우선이었던 그는 제대로 연애를 해 본 적 없었다.
이렇게 심장 떨리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라서 도무지 어떤 것부터 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그러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재경이 웃을 때마다 그의 시간은 멈춘 것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요리 배워 보고 싶은데. 차재경 씨가 도와줄래요?”
별 볼 일 없는 남자들이나 추파를 던지는 줄 알았는데. 요즘은 그가 계속해서 재경을 꼬드기고 있었다.
“제가요? 아니, 집안에 요리할 사람이 이렇게 넘쳐나는데. 뭐 하러 요리를 해요? 돈 주고 시키지.”
재경의 말은 조금도 틀림없이 맞았다. 집안에 요리할 사람은 차고 넘쳤고 그도 요리에는 딱히 관심을 가져 본 적 없었다. 방금 재경의 미소를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말했잖습니까. 빼앗기는 건 싫다고.”
이렇게 아름다운 재경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1년이 지나도 재경은 그의 곁에 있어야만 했다. 제 것을 빼앗기는 건 죽어도 싫으니까. 그렇게 만들어 낼 생각이었다.
“설마, 지금 내가 요리 더 잘한다고 해서 그래요? 아니, 그럼 전문 셰프한테 배워야지. 왜 나한테 배워요?”
“남한테 못하는 걸 보여 주는 건 질색이라서 차재경 씨한테 배우고 싶습니다.”
“저도 남인데요?”
어리둥절한 재경을 보면서 그가 손을 들었다.
“우리 사이는 남이 아니고 부부.”
그가 가리킨 자리에는 재경과 도결의 결혼사진이 걸려 있었다. 재경은 그 사진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아니, 이런 게 왜 여기 침실에….”
“차재경 씨는 나한테 남이 아니라 가족이잖습니까. 좀 못하면 도와주는 게 가족이라던데.”
뻔뻔한 그의 말에 어이없었으나, 이내 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기대하진 말아요. 고도결 씨랑 나,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요리를 잘하느냐고 물으면 당연히 그건 나겠지만. 밖에서 날고 기는 요리사들에 비교하면 내 실력은 실력도 아니니까.”
재경의 말에 그가 씩 웃었다. 처음부터 요리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도결은 재경이 진지한 표정으로 요리 실력을 말하는 것이 사랑스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 * *
늦은 밤 제사가 시작되었다. 늘 그렇듯 가까운 친척부터 먼 친척까지 도결의 본가로 떠들썩하게 모여들었다. 계열사로 분리된 이후로 친인척의 왕래가 많이 줄어들었다. 그래도 특별한 날엔 꼭 입을 맞춘 것처럼 모였다.
달라진 건 단 하나였다. 이 자리에 차재경이 존재한다는 것. 고작 사람 한 사람 더 늘었을 뿐인데, 제사 분위기는 평소보다 더 경직되어 있었다.
재경은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원피스를 입고 있는 다른 부인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재경이 입은 정장이 가장 재경답게 보였다. 힐끗힐끗 바라보던 도결의 시선은 어느새 대놓고 재경을 좇고 있었다.
“고 부회장?”
그를 재촉하는 사람들만 없었더라면, 가만히 재경만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가 조용히 절을 올렸다. 늘 혼자였던 그의 곁에 재경이 함께 절을 하고 있었다.
다시 힐끗 옆을 바라보자 재경과 눈이 마주쳤다. 걱정하지 말란 듯이 옅게 웃는 재경의 미소를 보고 도결은 헛기침을 했다.
사랑에 빠진 게 분명했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어 본 적 없던 그였다. 애초에 사랑 따위를 믿은 적이 있었던가?
그는 재경의 옆에서 미간을 구겼다. 만약 결혼이라는 걸 하게 된다면 당연히 정략 결혼을 하게 될 줄 알았다.
제사가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적은 것도 아닌 집안이었다. 직원들이 알아서 준비하고는 있지만, 보통의 여자는 이런 문화를 싫어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재경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의 생각은 온전히 재경을 향해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하나둘 재경과 정화 사이에 모여들었다.
“이번에 하트 모양 전은 어떻게 된 거예요? 특이하고 예뻐서 눈길이 가던데요.”
제사 때문에 모인 친인척들은 다들 하트 모양 전에 빠져 있었다. 늘 점잖던 하춘마저 신이 나서 끼어들었다.
“손자며느리가 준비했는데. 내가 올려 보라 했어요. 아가씨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네요. 호호.”
할머님은 가족들 앞에서 재경을 칭찬하느라 바빴다. 정화는 평소처럼 무심한 표정이었지만, 재경을 아끼는 눈빛은 숨길 수 없었다. 게다가 은근히 하트 모양 전을 자랑하고 있었다. 도결은 제 옆에 있는 재경을 슬쩍 보았다.
“힘들면 좀 앉을래요?”
“아니요. 딱히 하는 일도 없는데요.”
재경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웃었는데, 도결은 그런 표정까지 신경이 쓰여 어쩔 줄 몰랐다.
“어른들이 이렇게 재경 씨 요리를 좋아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전 하트 전만 만들었어요. 별거 아닌데 이렇게 칭찬받으니까, 쑥스럽네요.”
재경이 뺨을 긁으며 수줍게 웃었다. 도결은 그런 재경을 보면서 머뭇거렸다.
“그래도 다음에는 하지 말아요. 힘들잖습니까.”
그러자 재경이 고개를 들었다.
“다음이 있을까요? 우린 딱 1년짜리 부부인데.”
그 순간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1년짜리 계약 결혼. 그 말이 그에게는 비수가 되어 꽂히는 것만 같았다.
“어디 아파요? 표정이 안 좋아요.”
재경이 그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재경이 1년 뒤면 이 자리에 없을 거란 생각이 들자 마음이 벌써 불편해졌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거래를 꽤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보니 그쪽 재능은 재경이 더 특출난 듯 보였다.
재경은 당연히 그를 떠날 생각으로 이 결혼에 의무를 다하고 있었는데, 그는 재경이 떠날 사람이라는 걸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독하게 벗어나고 싶었던 현실이었는데. 재경이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하루가 다르게 느껴졌다. 얼마 뒤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질 행복들이라고 생각하자 덜컥 겁이 났다.
“괜찮습니다.”
빼앗기는 건 예나 지금이나 싫었다. 재경은 자신을 1년짜리 시한부 부부쯤으로 생각하지만, 그는 달랐다.
재경과 헤어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원하는 것은 단 한 번도 빼앗긴 적 없던 그였다. 세상은 원래 불공평했고, 처음부터 그의 편이다.
이번에도 자신의 편에 설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