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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18/60)

<18화>

도결이 놀란 표정으로 주방을 보자, 직원은 싱긋 웃으며 가던 길을 향해 가 버렸다. 좀처럼 주방과는 거리가 먼 분들이었다. 갑자기 며느리를 맞아서 변덕이 생긴 건가? 기강을 잡으려고? 그러자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근데 제가 이렇게 해도 되는 걸까요?”

“그럼.”

안에서 들리던 소리는 그의 등장으로 멈췄다. 재경이 전을 부치려던 것을 멈추고 놀란 눈으로 도결을 보았다. 정지 화면처럼 멈춘 재경을 보면서 정화와 하춘도 도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사 음식을 도운 적 없던 도결이 이 시간에 나타나자 놀란 건 정화와 하춘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간에 부회장이 어쩐 일이누?”

하춘의 질문에 도결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쩐 일이야? 이 시간에.”

정화가 팔짱을 끼고 도결을 보자, 그도 물러서지 않고 제 모친을 바라보았다. 곧 냉랭한 기운이 부엌을 가득 채웠다.

“두 분께 실망입니다. 차라리 저를 부르시지 그러셨어요.”

“어?” 

놀란 하춘을 보면서 정화가 나섰다.

“그건 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새아기가 뭘 좀 만들어 보겠다고 해서 주방에 데려온 거야.”

정화가 당황한 목소리로 도결에게 변명하자, 그가 미간을 구기며 성큼성큼 주방으로 들어와 재경의 앞에 섰다.

“나와요. 미련하게 시킨다고 이런 일을 다 하면 어떻게 합니까?”

“네?”

재경이 뒤집개를 쥐고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재경이 쥐고 있는 뒤집개를 빼앗아 들면서 더욱 인상을 썼다.

“기름이라도 튀면 어쩔 뻔했습니까? 화상으로 흉이라도 지면 어쩌려고.”

그가 말할수록 부끄러워지는 건 재경의 몫이었다.

“아니. 이건 제가 뭘 좀 보여 드리고 싶어서….”

재경은 갑자기 등장해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는 도결이 이해되지 않았다. 앞치마를 맨 재경이 힐끗 정화와 하춘의 눈치를 보자, 도결이 더욱 그녀를 제 뒤로 숨겼다. 

그 모습을 보고 선 정화와 하춘은 뭐가 그렇게 웃긴지 웃음을 참으려고 입가를 몇 번이고 씰룩거렸다.

“음식 할 사람이 필요하면 절 부르세요.”

그 순간 재경이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

“사람 민망하게 진짜 왜 그래요? 진짜 오해라니까요.”

“난 그냥….”

말문이 막혀 쩔쩔매는 도결을 보면서 정화가 웃음을 애써 참으며 말했다.

“새아가, 그냥 둬라. 다음에 진짜 음식 할 일 생기면 그땐 꼭 부회장 부를게.”

“그럼, 오늘은 가짜 음식을 하는 겁니까?” 

슬쩍 꼬리를 내리는 도결을 보면서 정화가 미묘하게 피식 웃는 모습이 보였다.

“그건, 집에 가서 다시 이야기해요. 지금은 어머님과 할머님께 사과부터 드려요. 두 분이 저한테 요리하라고 시키신 적 없어요. 그냥 제가 어릴 때 생각이 나서 의견을 낸 것뿐이에요.”

재경이 왼손을 허리에 얹고 그를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사과하라는 눈빛은 여전했다.

“확실합니까?”

“자, 봐요.” 

평소에 도결이 본 적 없는 전을 보여 주며 재경이 증거를 내밀었다. 전이 하트 모양이었다. 확실히 자신의 본가에서 누구도 시도한 적 없는 모양이긴 했다.

“게맛살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서 전을 하자고 의견을 냈어요. 두 분께 보여 드리고 이야기하고 싶어서 만들어 보는 중이었고요. 직원들 앞에서 어떻게 만드는지 시범하는 중이었다고요.”

재경의 말처럼 주방에는 주방 식구들이 모두 모여 재경이 만들고 있는 전을 구경하고 있었다. 귀가 붉어진 모습으로 그가 시선을 피했다.

“고도결 씨가 엄청 민망한 건 알겠지만. 그래도 사과 먼저 하세요.”

“…죄송합니다.”

그가 꾸벅 사과하자, 정화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였다. 그러니까, 그녀의 아들 고도결은 초등학교 입학 전을 제외하고는 사과할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워낙 제 일을 알아서 척척 해냈고 문제를 만들지 않는 아이였다. 그래서 손이 가는 일이 없었고, 따로 주의 준 적도 없었다. 그런 제 아들이 그녀를 향해 사과했다.

“인간미 있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그치, 아가?”

하춘의 말에 정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화가 하고 싶은 말이었는데, 시어머니는 참 잘도 알고 말씀하셨다. 재경은 머뭇거리다가 미소를 지었다.

“할머님께서 용서하셔서 다행인 줄 아세요. 고도결 씨 때문에 제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요?”

재경이 그의 팔을 툭 치며 웃었다.

“새아기가 만든 전인데. 먹어 볼래?”

정화가 제 아들을 보며 물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도결은 지금까지 한 번도 재경이 만든 음식을 먹어 본 적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붉은색 게맛살로 아기자기하게 만든 하트 전을 보면서 미간을 구겼다. 먹으라니까, 다시 또 잔소리였다.

“이걸 전부 재경 씨가 만든 겁니까?”

그가 또다시 재경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보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 그에게서 한 발자국 멀어졌다.

“얼마 안 만들었어요. 왜 자꾸 사람 민망하게 만들어요? 저 이래 보여도 자취 경력이 꽤 되는 사람이거든요.”

그때 직원 한 명이 슬쩍 재경이 만든 하트 전을 그릇에 단아하게 담아서 챙겼다.

“그래 보이네요. 너무 정갈하게 잘 만들어졌어요. 이건 오늘 상에 같이 올릴게요.”

“잠깐만요. 어머님, 우리 재경이가 만든 건데 맛은 봐야죠. 아 해 보세요.”

정화가 예쁘게 만들어진 하트 전을 젓가락으로 반듯하게 집어 하춘에게 내밀었다. 하춘이 하트 전을 슬쩍 보고서는 옅게 웃더니 입을 벌려 한입 베어 물었다. 

엄지를 척 올리는 하춘을 보면서 정화도 재경이 만든 하트 전을 자신의 입에 넣었다. 그녀는 엄지와 검지를 모아서 하트를 만들어 보였다. 

생전 보여 준 적 없는 리액션을 보여 주는 조모와 모친을 보면서 도결이 토끼 눈으로 서 있었다.

“어머, 진짜 맛있다. 어머님 다음번에 또 이렇게 만들어서 올릴까 봐요. 아버님 좋아하시겠어요.”

정화의 말에 하춘이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새아기가 인사한다고 이렇게 하트까지 만들어 주니 기분 참 좋다. 영감은 복도 많지.”

감동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도결은 자신이 괜한 걱정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백 비서가 이런 상황을 제대로 설명 안 한 탓도 있었다. 당연히 언젠가 말로만 들었던 고부갈등이 제집에서 일어나는 줄로만 알았다.

“아, 해 봐요.”

재경이 제가 만든 하트 전을 들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회의 중에 뛰어올 만큼 재경이 걱정됐다.

그런 자신을 민망하게 만들더니, 이번엔 또 심장 뛰게 했다. 저를 향해 전을 내미는 재경의 모습은 그녀가 만든 전처럼 사랑스러웠다.

“뭐 하누? 새아기 팔 아프게.”

하춘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그를 핀잔하자, 도결이 당황해서 입을 벌렸다. 그러자 재경이 그의 입안으로 전을 쏙 밀어 넣었다. 조잡한 맛이 싫어서 잘 안 먹었던 게맛살인데.

‘원래 이렇게 맛있었던가?’

게맛살이 그의 입안에서 폭죽처럼 팡팡 터지는 것만 같았다. 재경이 주는 건 무엇이든 그의 기분을 설레게 했다.

“어때요?”

기대감이 가득한 그녀의 눈을 빤히 보던 그가 귀가 뜨거워짐을 느끼고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맛있습니다.”

그의 말에 재경이 붉어진 뺨으로 미소를 지었다. 정화는 두 사람의 풋풋한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아, 새아기는 고 부회장 방을 본 적 없지?”

“네. 지난번에는 급하게 왔다 가느라 못 봤어요.”

“가서 방 좀 보여 줄래? 나중에 본가에 와서 쉬려면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정화의 말에 도결의 얼굴의 뺨이 붉어졌다. 재경이 본가에선 자신의 방에서 쉰다는 생각에 심장이 주책맞게 뛰고 있었다.

“자, 이제 우리 새아기 음식 솜씨도 잘 봤으니까. 남은 상을 준비해 볼까요?”

정화와 하춘은 앞치마를 하고 있지 않았다. 가끔 직원들이 요리하는 음식을 맛보는 정도이지, 직접 음식을 만들지는 않았다. 

사실 이 집안에서 음식을 하는 여성은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재벌가 출신이었다. 요리를 배우러 모임을 나가긴 했어도 본가에선 하지 않았다. 워낙 바쁘게 살아온 탓에 집안일은 보통 직원들이 알아서 챙겼다. 그러니 돌아가신 그의 조부도 직원들의 손맛이 더 그리울 게 당연했다.

“그럼, 저 금방 다녀올게요.”

재경이 정화와 하춘을 향해 인사하자, 정화가 인상을 찌푸렸다.

“뭘 또 다시 와. 천천히 오래 쉬다가 시간 맞춰서 내려와라.”

장난스레 웃는 정화를 보면서 재경도 씩 미소를 보였다. 

도결은 저에게 보여 준 적 없던 정화의 다정한 모습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언젠가 재경의 집에서 보았던 재경의 모친이 절로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항상 겨울바람처럼 냉랭한 표정을 보이던 제 모친이 오늘은 봄바람처럼 정겹게 느껴졌다. 그런 모친과 조모의 행동이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다. 도결은 난데없이 다정해진 본가의 분위기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   *   *

재경은 남자 방에 들어간 적이 몇 번 없었다. 대학에 간다고 고등학교 시절엔 연애를 못 해 보았다. 대학에 가선 주혁을 짝사랑하느라 대부분 시간을 썼고. 따지고 보면 도결과 하는 것은 대부분이 처음이었다.

“고도결 씨는 어릴 때부터 이렇게 큰 방을 썼어요?”

그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재경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사실 그의 방은 일반 가정집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컸다. 좀 특이한 점도 있었는데. 일단 방 안에 거실이 있다는 점이 가장 특이했다. 방인데 방이 또 있다는 점도 특이했고. 

그러다 재경은 거실 수납장에 가득 채워진 상장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어렸을 때부터 못하는 게 없었나 봐요? 운동, 미술, 음악, 수학, 영어, 글짓기. 이야. 상이란 상은 다 독식했네.”

보통은 잘하는 게 한두 가지 정도일 텐데. 도결의 상장은 분야가 다양했다. 정말 자잘한 것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노력해서 받은 듯한 느낌이었다.

“빼앗기는 걸 싫어했습니다.”

태연한 그의 대답에 재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너무 오만한 생각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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