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영화의 엔딩은 키스신이었다.
“다음 주에도 같이 영화 볼까요?”
갑자기 질문하는 도결 때문에 재경은 정신이 확 들었다. 자신이 키스신에 너무 집중하고 있었음을 뒤늦게 인지하자 괜히 부끄러워졌다.
“네.”
민망함에 빠르게 대답을 했는데, 그가 태연하게 다시 물었다.
“영화 한 편 더 볼까요?”
도결을 만나기 전엔 사랑스러운 로맨스 영화가 끝나고 나면 사무치게 외로워지곤 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좀 이상했다. 영화가 거의 끝나 가는데도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외롭다거나 허무하단 기분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그저 그가 신경 쓰여서 행동이 조심스러워졌다.
“네.”
재경은 민망함에 빠르게 대답을 하며 앞만 보고 있었다. 여전히 키스 중인 주인공들을 보자 입이 벌어졌다. 그 순간 그가 다시 물었다.
“나랑 키스할래요?”
“네.”
순간 대답부터 하고 본 재경이 그의 질문을 곱씹다가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도결의 얼굴이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그의 입술이 재경의 입술을 부드럽게 감쌌다. 달콤하게 얽히는 혀를 그녀가 천천히 받아들였다.
“하아.”
입술이 떨어지고, 재경이 그를 보면서 얼굴을 붉혔다.
“사이트가 갑자기 없어졌어요.”
그녀가 사이트에 대해서 말하자, 도결이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좀 허무하지만, 다 잊으려고요.”
“허무했어요?”
그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사진이 돌아다니는 것보단 낫죠. 없어지고 나니까 속이 편한 것도 같아요. 그냥 누가 왜 무슨 이유로 나한테 그런 짓을 한 건지 알 수 없다는 게 좀 답답하긴 해요.”
그렇게 말해 놓고 분위기가 어두워진 게 신경 쓰였는지, 재경이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는 데 이유가 어디 있어요.”
“네?”
그녀가 뒤를 돌아보자, 도결이 재경을 부드럽게 끌어당겨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좋아해요.”
갑작스러운 도결의 고백에 재경의 눈이 끔뻑였다.
“저를요?”
“네. 특별한 이유 없이 그냥 좋아요. 차재경 씨가.”
대답이 없는 재경을 보면서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난생처음이었다. 누군가를 이토록 좋아하게 된 건. 타인과 스치는 것도 싫어서 사람이 많은 곳엔 걸음을 하지 않는 그였다. 각종 시설들이 집에 있는 이유도 그래서였다. 그런 고도결이 재경만 보면 닿고 싶어서 애가 탔다.
“데이트할래요?”
낯선 남자가 하는 말이 아니라, 그녀의 남편이 하는 말이었다. 모르는 남자가 갑자기 데이트하자는 것도 아닌데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왜 이렇게 적응이 안 되고 부담스러운 것인지….
재경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할 수 없다면, 최선을 다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럼 배고픈데, 우리 밥부터 먹을까요?”
도결과 재경은 마주 보고 앉아서 저녁을 함께했다. 저택 안의 사용인들은 도결과 재경의 모습이 너무 잘 어울린다며 속삭댔다. 재경은 편안한 맨투맨을 입고 있는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제 얼굴에 뭐 묻었습니까?”
그가 신경이 쓰이는지 자신의 뺨을 슬쩍 만지며 물었다. 재경은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씩 웃었다.
“그게 아니라, 옷이 얼굴발을 받는 것 같아서요.”
곧 고결의 귀가 붉어졌다.
“그런 말 많이 들어 봤죠?”
“아니요. 부인한테 처음 들어요.”
“다른 분들 생각도 저랑 같을걸요. 다들 내색을 못 했겠죠.”
뻔뻔하게 대꾸하는 재경을 보면서 그가 싱겁게 웃었다.
“데이트는 한강 어때요? 아, 사람 많은 거 싫다고 했지.”
“가요. 재경 씨랑 가면 어디든 좋습니다.”
당황한 재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한강 데이트는 다음 주에 갈까요? 이번 주는 집에서 쉬고 싶어서요.”
* * *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던 고 회장은 심각해진 비서의 얼굴을 보면서 표정을 구겼다.
“늦은 시간에 누구 전화야?”
까칠하게 묻는 고 회장에게 비서가 고개를 숙였다.
“한서일보 대표님께서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습니다.”
“그 양반이 나한테 화낼 일이 뭐가 있어.”
고 회장이 페이지를 넘기며 조용히 물었다. 비서는 조심스러운지 눈치를 보다가 나름대로 들은 내용을 간략하게 전달했다.
“부회장님께서 한은화 차장님을 찾아가셔서 한 회장님과 직접 만날 일은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다만, 해결은 한 대표님이 직접 하시는 바람에….”
그러자 고 회장이 손을 들었다. 말을 멈추란 뜻이었다.
“그러니까 고 부회장이 직접 한서일보까지 찾아갔단 거야? 그깟 계집애 때문에?”
“네. 그래서 심기가 좀 불편하신 모양입니다.”
“적당히 지내다 1년 뒤에 헤어지라고 했더니. 쯧.”
이혼하면 꼭 사돈이 되겠노라 약속한 것이 무색하게 되어 버렸다.
“체면만 구겼군. 월요일에 차재경 기자 본가로 오라 그래.”
* * *
월요일 오후, 회의실은 전쟁터 같았다.
“신기술을 시장에서 선점하지 못한다면 그만큼의 임팩트가 줄어들어 홍보 효과가 떨어질 것입니다. 이는 자연스레 매출 감소로 이어지겠죠. 소비자가 마주하는 효용 극대화만 두고 봐도 불리합니다.”
최 팀장의 말에 도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제품을 경쟁 회사보다 이르게 발표하면 시장 선점이 가능해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의 결혼식 때문에 신제품 출시를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경쟁 업체가 시장을 완전히 선점한 상황은 또 아니라, 아쉬웠다. 한 끗 차이인데.
“신제품을 한정 판매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도결의 질문에 직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표하던 직원은 당황한 눈빛으로 자신이 들고 온 자료를 빠르게 넘겼다. 미리 작성해 둔 대안 방법에 보이지 않자 머뭇거리다 도결에게 물었다.
“한정 판매요?”
“한정 수량만 시장에 풀어서 예약 판매하는 겁니다. 상품의 가치를 높이고, 타인과 차별화되고 싶은 소비자들의 심리를 이용하는 거죠. 어떻습니까?”
“어차피 기업은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 목적이니까요. 말씀처럼 한정된 수량을 마케팅에 잘 이용하면 충분히 소비자들의 이목을 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결이 다음 페이지를 넘길 때였다. 도결의 비서 실장인 백종일이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그의 옆에 섰다. 회의 중에 백 비서가 고도결 부회장을 찾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직원들의 시선이 전부 백 비서와 고 부회장을 향했다.
일에 미쳐 있는 고도결에게는 회사 일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으니, 필시 심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뭡니까?”
종이를 쥔 도결이 백 비서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백 비서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몸을 숙여 도결의 귀에 입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회장님께서 사모님을 본가로 부르셨다고 합니다.”
도결이 몸을 움찔하자, 백 비서의 말을 듣지 못한 직원들의 눈이 커졌다.
“언제요?”
백 비서는 빠르게 왼쪽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오후 5시 30분이었다. 백 비서가 이 소식을 들은 것은 한 시간 전이었지만, 호출은 훨씬 이전에 있었다고 했으니….
차재경 기자에게 별다른 일이 없다면, 지금 시간이면 본가에 있을 것 같았다. 백 비서는 그의 귓가에 조심스럽게 입을 가져다 대고 제가 알고 있는 것들을 이야기했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합시다.”
좀처럼 심각한 표정을 짓지 않는 도결이 굳은 얼굴로 의자 소리를 드르륵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서둘러 회의를 끝내고 회의실을 나서자, 직원들은 자기들끼리 눈을 마주치며 이 어리둥절한 상황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부회장님?”
백 비서가 당황하며 그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그러자 도결은 오늘 일정을 전부 취소시키고 곧장 본가로 가겠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마음이 다급해지는 자기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그의 인생은 늘 계획대로 순탄하게만 흘러갔다. 그러니 결혼도 지금까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집안에서 이어 준 상대와 맞선을 보고 적당한 시기에 정략 결혼을 하게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가 일보다 아내를 걱정하게 될 줄이야.’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정략 결혼을 할 테니, 시집살이는 평생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재경이 본가에 불려갔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의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소름이 끼쳤다.
‘울고 있으면 어쩌지.’
금요일 밤, 재경이 혼자 영화를 보고 있다는 직원의 말에 도결은 당장 재경에게 뛰어갔었다. 혹시나 그 일로 상처를 받아서 울면 어쩌나 걱정이 된 탓이었다. 씩씩하게 맥주를 쥐고 있는 재경의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안도했었는지 모른다.
그 순간 알았다. 자신이 재경을 생각보다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걸. 그런 재경을 건드리는 건 그 누구라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다급하게 걸음을 옮기던 백 비서가 깜빡했다는 표정으로 일정을 확인했다.
“저, 제사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늘이 고승강 전 회장님 기일입니다.”
* * *
본가에 도착한 그는 검은색 넥타이로 바꿔 착용한 모습이었다.
도결은 회사 일이 아무리 바빠도 조부의 기제사에는 꼭 본가에 들렀다. 그러고 보면 최근에는 유난히 본가를 들르는 일이 잦았다. 그전에는 별다른 일이 없으면 대부분 회장실에서 뵙는 것이 전부였는데. 최근에는 결혼 때문에 꽤 잦게 본가를 찾았다.
본가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주방으로 향했다. 당연히 울상을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주방에서는 하하 호호 웃음소리만 울렸다.
“안에 누굽니까?”
그가 지나가는 직원을 잡고 묻자, 여직원이 고개를 돌려 주방을 힐끗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큰 사모님, 작은 사모님 모두 주방에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