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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16/60)

<16화>

도결이 찾아온단 말을 들은 한은화는 다급하게 부친을 찾아갔다. 큰 소리와 함께 열리는 문을 보고 한 사장이 곤란하단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 사장 앞에 있던 직원이 허둥지둥 나가자, 한은화가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한 사장 앞에 섰다.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사나운 목소리만큼 화가 잔뜩 난 표정이었다. 한 사장은 눈을 감고선 말이 없었다. 은화는 천천히 소파에 앉았다.

“…….”

“아, 하도 벌이는 일이 많으셔서. 이젠 콕 집어 말하지 않으면 모르시죠?”

일부러 도발하듯 말했지만, 한 사장은 늘 그렇듯 조용했다. 

“영웅 놀이에 심취해서 익명 사이트 운영하는 행동.”

한은화 차장이 한서일보로 입사한 건 한 사장의 의도가 아니었다. 여자가 바깥일을 해서 좋을 게 없다는 게 한 사장의 생각이었다. 가장 몸값이 비쌀 때 시집이나 가는 게 이 집안을 위해 여자가 할 일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한 사장의 딸 한은화는 결코 쉽게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언제부터 알았어?”

“알고도 눈 감고 입 닫는 게 어디 이것뿐이겠어요?”

예사롭지 않은 눈빛으로 은화가 제 부친을 노려보았다.

“앞으로도 닫고 살아라. 무슨 일이 일어나든 네가 신경 쓸 일 아니니까.”

“확실해요?”

“그딴 거 신경 쓰지 말고 네 앞가림이나 잘해.”

그러자 은화가 붉은 입술을 잔뜩 끌어당겨 웃었다. 자신의 앞가림은 충분히 잘하고 있었다. 지금 제 앞을 막고 있는 건 도리어 그녀의 부친이었다.

“죄송하지만, 저도 아버지 일에 딱히 신경 쓰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제발 신경 쓰이지 않게 해 달란 말이에요.” 

“도대체 뭐가 문제냐? 뭐가 그렇게 항상 불만이야?”

“털어서 먼지 한 톨 안 나오시는 대단한 아버지께서 지금, 제 앞을 꽉 막고 계셔서 불만이에요. 제 손으로 청소하게 하지 마세요. 저 먼지 알레르기 있어요.”

익명 사이트에서 진성그룹과 관련된 사진을 대범하게 올릴 수 있는 사람이 절대 개인일 리가 없었다. 고도결 부회장이 직접 찾아올 정도라면, 이는 곧 그만큼 영향력 있는 상대가 개입한 문제라고 볼 수 있었다. 은화는 그게 제 부친이 아니길 바랐다. 

“그러니까 네 말은 지금 내가 네 앞을 막았단 거야?”

“그럼, 아니에요? 차재경 기자 사진, 설마 모른다고 하시진 않으시겠죠?” 

천천히 눈을 뜬 한 사장은 불만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깐깐하게 마주 보고 앉아 있는 한은화 차장도 보통 성질은 아니었다.

“애먼 놈이랑 연애질하다가 이 사달을 만든 게 누구인데?”

“그런 식으로 사진 올리는 건 범죄예요.”

“그럼, 경기 끝났다고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거야?”

한 사장의 물음에 은화가 입을 다물었다. 

“말했잖아요. 전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살면서 단 한 번도 결혼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래서 결혼과 상관없는 자유로운 연애를 즐겼다. 그런데 돌연 부친이 선을 보고 결혼을 하라며 독단적인 행동을 강행했다.

“꿈을 크게 키워. 고작 현실에 안주하는 게 네 인생 목표였어? 재작년에 너보다 4살 어린 네 사촌 동생도 DP그룹 장자랑 결혼해서 한자리 받았다더구나. 그동안 넌 뭘 했니?”

“그래서 저더러 유부남을 만나란 말씀이세요?”

“이혼하면, 싱글이다.”

말이 안 통한다는 듯 은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부친을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한참을 노려보다가 조용히 대꾸했다.

“고 부회장이 아이피 추적했어요. 지금 여기로 오겠대요. 아버지가 원하시는 대로 우리, 곧 만나게 되겠네요.”

“뭐?”

“그 사이트부터 당장 지워 버리세요.”

“기자들 사이에서 유용하게 쓰이는 찌라시 사이트다.”

한 사장의 말에 은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눈에는 지금 고도결 부회장이 제 얼굴 한번 보려고 한서일보 본사까지 오는 것 같으세요?” 

은화는 야망이 있고 똑똑한 여자였다. 그녀는 도결이 어떤 의도로 이곳을 방문하는 건지 빤히 보였다.

“그래도 갑자기 폐쇄하라고 하는 건….”

“잘난 진성그룹에서 익명 사이트 하나 해킹할 해커가 없어서 여기까지 오겠어요? 경고하러 오는 거예요. 그건 아버지께서 가장 잘 아시겠죠. 그토록 원하는 사윗감인데.”

분노와 원망이 얽혀 있는 은화의 눈빛을 보면서 한 사장이 주먹을 꽉 쥐었다.

“쯧. 그러게 진즉에 맞선에 나가서 결혼했으면 얼마나 좋았겠니.”

“억지로 조작해서 해결하는 방식, 요즘 세상에 안 통해요. 사이트는 지금 당장 해결하세요.”

그녀가 불같이 화를 내고 나가 버리자, 한 사장이 머리를 잡았다.

*   *   *

찻잔을 든 한은화는 언제 그랬냐는 듯 온순한 태도였다. 여린 수선화처럼 은은하게 기품이 있는 모습이었다. 자세를 낮춰야 할 때만 드러내는 온순한 표정은 이중적인 은화의 가면이었다.

도결은 한은화 차장을 보면서 재경과 맞선을 보던 날을 떠올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은화입니다.”

“고도결입니다.”

재경과 은화는 같은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으나, 풍기는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순수한 열정이 아름다웠던 재경은 계속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었다. 종일 긴장한 태도는 솔직했고, 그 모습이 그를 완전히 빠져들도록 만들었다. 

“갑자기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셨을까요?”

반면 한은화 차장은 형식적인 태도로 도결을 대했다. 이는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흔히 알고 있던 맞선 상대의 모습이었다.

“백 비서.”

그가 조용히 백 비서를 부르자, 준비한 서류를 꺼낸 백 비서가 한은화 차장에게 내밀었다. 적당히 읽어 본 은화가 백 비서에게 종이 뭉치를 넘겨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 처리 방식이 흥미롭네요.”

은화의 목소리에 도결이 낮게 웃었다.

“흥미라.”

“여기까지 직접 걸음 하실 줄은 몰랐거든요.”

“한서일보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 정도 예의는 보여야 할 것 같아서요.”

생각보다 더 근사한 도결의 모습에 은화의 표정이 화사해졌다. 비열하고 이기적인 인간들이 많은 세상이었다. 

은화는 딱히 사람에 대한 기대가 없었다. 기대해 봐야 실망만 커질 테니까. 하지만 눈앞에 있는 도결이라면, 꽤 나쁘지 않은 파트너가 되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아. 저도 그 예의에 어울리는 보답을 해 드릴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그가 구체적으로 물어볼 줄 몰랐던 은화는 고개를 기울였다. 고 부회장은 돌려 말해서 해결하는 방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음. 저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뿌리까지 뽑아서 처리하는 편이에요.”

은화는 사이트를 완전히 없애겠다는 말을 돌려 했다. 도결은 고개를 한 번 까딱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30분. 그 안에 해결하세요.”

“네?”

“난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당장 뿌리까지 뽑아서 처리하는 편이거든요.”

그가 뒤를 돌자, 은화가 피식 웃었다.

“당장이라…. 이런 분인 줄 알았으면, 그냥 약속 장소에 갈 걸 그랬어요.”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도결이 뒤를 돌아 한은화의 얼굴을 보았다. 은화는 어색한 듯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날, 그 문자 제가 보냈어요.”

“…….”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조용히 은화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녀는 어색하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결혼이란 제도가 저랑 좀 안 맞아서 그 자리에 대신 나갈 사람이 필요했어요. 지금 보니까, 부회장님이 좀 제 스타일 같아서 아쉽네요.”

잘못을 고백하는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뻔뻔했다. 그가 느슨하게 넥타이를 풀며 느른하게 읊조렸다.

“한 차장은 본인이 매력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죠?”

“아닌가요?”

“피해 끼쳤으면, 사과를 먼저 해야 하지 않나?” 

싸늘한 그의 눈빛은 냉소적이었다. 그렇다고 은화의 무심한 표정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크리스마스 일은 미안해요.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 몰랐어요.”

“…그날 차재경이 아니라 당신이 나왔다면, 나 역시 결혼하지 않았을 겁니다.”

도결의 대답에 은화가 민망하단 표정을 지었다. 

“진심이세요?”

“누구처럼 거짓말은 안 하는 편이라.”

“제가 거짓말을 했단 건가요?”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 되묻자, 도결이 오른쪽 입술 끝을 올리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날 호텔에서 봤어요. 한 차장이 프러포즈 받는 모습.”

“하.”

놀란 은화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자, 도결이 무심하게 몸을 돌렸다. 그가 걸음을 떼자, 백 비서가 빠르게 문을 열었다. 

“저기요. 그렇게 가면 제가 뭐가 돼요?”

“한 차장이 뭐가 되든 나랑 상관없습니다. 한 번 더 내 아내를 건드리면, 진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보게 될 거예요.”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져 가는 도결의 모습을 보면서 한은화가 허탈하게 웃었다.

“내숭이 안 통하는 남자네.”

*   *   *

재경은 갑자기 사이트가 없어졌단 소식에 안도하며 퇴근을 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안도감이었다. 그간 너무 바빠서 신혼집을 돌아볼 틈이 없었는데.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보니, 넓고 예쁘고 신기했다.

“집에 영화관까지 있을 줄은 몰랐어요.”

감탄하는 재경을 보면서 직원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빠르게 준비하겠습니다.”

“이미 충분해요. 근데 영화 보면서 맥주 마셔도 되나요?”

“물론이죠. 안주도 준비하겠습니다!”

직원의 말에 재경은 신이 나서 자리를 잡았다. 맥주와 나초를 앞에 두고 넓은 영화관에 혼자 앉아서 영화를 보려니까, 기분이 좀 이상했다. 

“재벌들은 원래 다 이렇게 혼자 영화를 보나?”

혼잣말하면서 나초를 와그작 씹는 순간, 누군가 그녀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헉.”

놀란 재경이 고개를 돌리자, 도결이 씩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재경이 입을 벌리자, 그가 조용히 나초를 그녀의 입안에 넣어 주었다. 급하게 오물오물 나초를 씹은 재경이 그를 보며 속삭였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재경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영화 소리에 묻히자, 도결이 재경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재경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자, 상쾌한 향기가 풍겼다.

“뭐라고 했어요? 너무 작아서 안 들려요.”

귓속을 간지럽히는 숨결과 다정한 중저음 목소리에 재경의 몸이 바짝 굳었다. 붉어진 얼굴로 재경이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곤 조용히 물었다.

“아니, 여긴 어쩐 일이냐고요?”

습관처럼 작게 속삭이던 재경은 이곳이 집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긴장하면서 깜빡 잊어버린 탓이었다.

“큭.”

그가 고개를 돌리며 웃었으나, 이미 웃음소리를 다 들어 버린 재경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영화 보고 싶어서 왔어요.”

“제가 비킬게요. 보고 싶은 거 봐요.”

재경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자, 도결이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움켜잡았다.

“실은 재경 씨랑 같이 보고 싶어서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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